법원에 사랑과 지성을 바라지 말라 때時 일事 (Issues)

[왜냐면] 사랑과 지성의 공동체를 위하여

이 칼럼에 표현된 의견과 소망 대부분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 그런 일들을 한두 번 외면하고 방기하다 보면 그 부당함의 사슬이 결국 우리를 휘감게 된다는 것을 배우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희망버스는 지성과 사랑을 교육하는 학교입니다"라는 말에는 백 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 문장이 아쉽다. 필자는 맨 끝에 "그가 무죄판결을 받도록 2월7일 재판에서 지성과 사랑을 겸비한 공정한 판사가 선임되었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이 마지막 문장은 빼고 딱 그 앞에서 끝났더라면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개인의 소망을 넘어 보편적 희망으로 승화하기는 어려운 생각이다. 송경동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를 판사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송경동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려야 지성과 사랑을 겸비한 공정한 판사다'라는 생각이거나, 혹은 '지성과 사랑을 겸비한 공정한 판사라면 송경동에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해당 판사는 송경동에 적용된 여러 혐의 중 어떤 것이라도 유죄 판결을 내리는 순간, 지성도 사랑도 없는 불공정한 판사가 되고 만다.

판사가 지성과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이런 개인적인 특성이 판결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이것은 판사가 게으름이나 욕심이나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런 개인적인 특성이 판결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당하든 부당하든, 일단 법 앞에 몸을 드러내고 선 자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판관이 공정하게 재판을 하는 것이다.

송경동은 불을 들고 달리는 자이고 판사는 그어진 줄을 넘지 않았나를 판단하는 자이다. 활동가이자 시인인 송경동의 모습을 판사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송경동을 추동해 온 지성과 사랑이 판사의 판결을 이끌도록 바라서는 안 된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만 하면 된다. 지성과 사랑, 혹은 다른 어떤 이름의 모호함(법의 측면에서 볼 때)과 낭만주의와 눈치보기가 법정을 채우는 순간, 법의 항상성은 무너진다.

시인이 풀려나기를 염원하는 감옥은 따로 있다

법의 기준에서 볼 때 송경동의 구속이 적합한 것이었나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가 도주나 증거 인멸을 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결은 다른 문제다. 희망버스 및 부산 시위와 관련해 송경동에게 적용된 혐의는 다섯 가지다. 특수공무집행방해, 일반교통방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공동건조물 침입,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다. 송경동의 '범법 사실'이 발생한 배경을 돌아보는 정도는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어쨌든 이런 혐의로 기소가 된 이상, 법원은 실체적 범법 사실에 대해 판단을 하는 수밖에 없다.

송경동 재판의 판사에게 무죄를 요구하면서, 무죄가 아닐 경우 지성과 사랑이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할 준비를 하는 것은, 소방관에게 강도를 잡으라고 요구하며, 못 잡으면 무능하다고 비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태도는 송경동이 재판대에 서게 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든다.

도로교통법이나 집시법을 어기면서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은 그러한 법으로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현행 실정법에 어긋나면서도 '지성과 사랑' 때문에 위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런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래 인류사에 보편적이고 영속적으로 지속되어 왔다. 불을 들고 달리는 사람을 위해, 뽑기(판사 선임)가 잘 되어 처벌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가 든 불의 의미를 희석시킨다.

지난 12월에 송경동은 감옥에서 책 한 권을 냈다. 제목은 <꿈꾸는 자 잡혀간다>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썼다.

"더 이상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가 내 몸에 자신의 구조와 상처를 깊이 새겨두었다. 그 상처를 말함은 그래서 내 이야기만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었다."

또 이렇게도 썼다.

"이제 다시는 누구라도 혼자 외로운 고공으로 오르지 않아도 되게 만인의 연대가 굳건한 세상"을 꿈꾸고 있다. ... 아, 이런 좋은 꿈들을 꾸다 보니 갇혀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꿔본다."

꿈꾸는 자는 잡혀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송경동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구조의 상처를 아파하는 송경동이 풀려나기를 염원하는 감옥은 부산구치소 감옥이 아니라 시대의 감옥인 것이다.

나 역시 송경동이 무죄 판결을 받고 활짝 웃으며 법원문을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은 따로 있다. 판사 개인의 취향을 가늠해 보고, 그런 취향으로 인해 당장의 재판이 우호적으로 끝나기를 기대하고, 더 나아가,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신문사가 그렇듯 판사의 경력이나 신상을 파헤쳐 비난하며 공적(公敵)으로 만드는 일은, 그러한 심정은 이해는 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도대체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성과 사랑을 가질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 마땅한 쪽은 따로 있다. 판사가 판결을 내릴 기준을 만드는 입법 담당자들이다. 사회의 정의와 당위와 이해관계는 결국 법으로 집약된다. 법이 사회 정의와 당위에 기반해 제정되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지성과 사랑에 지배받는 것이 우리가 바라고 요구해야 할 일이다. 법이 오로지 강자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지고 그런 법에 따라 법원에서 재판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사랑과 지성'에 따라 행동하다 처벌받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풀려 나오기를 염원하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물론 입법 담당자, 즉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사람 모두가 지성과 사랑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선거를 하는 것이다.

 

덧글

  • 그건 좀 2012/02/08 20:14 # 삭제 답글

    그건 좀 아닌듯 싶습니다.

    실제 법이 있어도 판사마다 판결이 다르고, 피고가 누구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니까요.

    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 무거운 죄에 최소 형량을 내리거나, 가벼운 죄에 최대 형량을 줄 수도 있는 문제이고...

    유죄임에도 증거를 무시하고 무죄를 판결하거나, 무죄임에도 정황만 놓고 유죄 판결도 할 수 있으니 말이죠.

    법만드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 판결하는 사람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판사보단 2012/02/09 16:40 # 삭제

    피고인의 변호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많이 갈리는 듯...
    사실 판결하는 사람에겐 그저 수 많은 재판 중 하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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