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한 재외국민 투표 때時 일事 (Issues)

재외국민 투표 신청 저조… 총선 등록률 5.6% 불과

외국에 나가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고국의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재외국민 투표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두어 달 뒤 벌어질 4.11 총선이 그 첫 대상이다. 그런데 신청을 마감한 결과, 이 선거에서 투표를 하기 위해 신청을 한 재외 선거권자가 매우 적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신청을 하지 않았다. 지난 12월 말에 동료로부터 '국외 부재자 신고서'를 받아서 작성해 두었으나, 공관(영사관)으로 보내지 않았다. 실제로 투표를 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대한민국 영사관이 10개 있다(앵커리지 출장소를 포함하면 11곳). 태평양 지역을 뺀 본토에는 8개다(뉴욕, 로스앤젤레스,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애틀랜타, 휴스턴). 일반 영사 업무를 처리하는 데 이 숫자가 많거나 적은지, 혹은 적당한지는 내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재외 국민들의 투표소 역할을 하기에 지나치게 적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미국 중부의 시카고 영사관이 관할하는 지역은 중서부 13개 주다. 이 지역에 사는 재외 국민 중 투표를 하려는 사람은 모두 시카고까지 찾아가야 한다. (아래 지도 참조. 파란 점이 시카고. 오른쪽 아래는 크기 비교용 한반도.)




시카고로부터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노스다코다의 주도 비즈마크(노란색)에서 시카고까지의 거리는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편도 14시간이고, 남서쪽 캔사스의 주도 토피카(녹색)로부터는 10시간이다. 하루종일로도 안 되고 왕복 2~3일 잡아야 한다. (노스다코다 쪽에는 한인이 많이 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로 밑의 네브라스카나 캔사스에는 상당히 많이 살고 있다.)

10분도 걸리지 않을 투표 한 번 하자고 모든 일을 작파하고 이런 비용을 치를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설령 있다면 그 투철한 참여 정신을 크게 칭찬해야겠지만, 상식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투표 신청을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려면, 며칠은 아니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하루가 완전히 깨진다. 게다가 살인적인 연료비와 톨게이트비와 기타 잡비가 든다. 내가 한국에서 투표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침에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 잠바때기 입고 슬리퍼 끌고, 길 하나 건너에 있는 투표소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서 투표하고 오는 데 30분이면 충분했을 것이며, 비용은 단 10원도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게다가, 유학생이나 주재원 같은 일시 체류자가 아닌 영주권자의 경우는 우편 신청이 되지 않았으므로, 영사관을 직접 찾아가서 신청해야 했다. 투표 한 번 하려면 고난의 길을 두 번 걸음해야 하는 셈이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신청 마감 결과 12만 명이 넘는 사람(예상 재외 선거권자의 5.6%)이 투표를 신청했다는 것은 저조한 게 아니라 놀라운 수치다. 대부분 각 영사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근 지역 국민들이고, 영사관 관계자들도 적지 않겠지만 말이다. 물론 신청을 했더라도 실제로 투표를 하는 사람은 다시 그 중 일부일 것이다.

재외국민 투표를 아예 하지 않으면 모를까, 일단 한다면 이 역시 민주 정치에서 요구되는 선거의 원칙을 충족시켜야 한다. 재외 공관의 위치에 따라 투표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정해진다는 것은 민주 선거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보통선거 원칙에 실질적으로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재외국민 투표 제도는 이번에 처음 시행되는 것이므로, 실제로 해 보는 과정에서 문제점이 나오면 앞으로 보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투표란 일반 국민이 민주적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이러한 참여를 고무하고 보장하려면, 공정성과 보안이 지켜지는 한 최대한 실효성을 높이도록 현실화가 되어야 한다. 이번 경우만 보면, 재외국민 투표는 말만 화려하고 실효는 없는 말잔치로 끝날 것 같다. 여야 중 누구에게 유리할까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사람들도 머쓱하게 됐다.

근본적으로 나는 이러한 현실화나 보완책 이전에, 왜 외국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선거권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특히 한국을 떠나 외국에 살 것을 선택한 영주권자들에게 4년, 혹은 5년 임기인 한국 공직자를 뽑는 선거권(혹은 정당 투표권)을 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영주권자라도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한국 선거권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 제도가 그 말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치권의 주판알 튕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각지의 한인회 등속에서 이번 재외국민 투표를 놓고 줄대기, 힘 겨루기, 세 불리기 따위 모습을 보인다는 소식이 들린다. 위와 아래 꼴을 모두 보자면, 왜 하는지를 대체 모르겠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되는 막대한 비용까지 치러가면서 말이다. 그 비용은 한국에서 선거 참여를 높이는 데 쓰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사리에도 맞지 않을까 한다.

여담이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중앙선관위의 보도 자료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신고.신청자 수' 전체인 123,358명이 5.52%가 된 것은 전체 예상 선거인 수의 5.52%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재외 선거인(즉 영주권자) 중 신청한 사람 20,036명은 전체 예상 재외 선거인 수의 2.18%이고, 국외 부재자 중 신고를 한 사람은 전체 부재자의 7.86%인 103,322명이라고 나와 있다.

이 계산을 역산해 보면, 이번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재외 선거인 총수는 919,083명, 국외 부재자 총수는 1,314,529명이 된다(둘을 합치면 '예상 선거인 수인 2,233,193명과 비슷해진다). 외국에 있으면서 투표를 하여 한국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수로 따지면, 영주권자들보다 일시적 체류자들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셈이다. 그 차이도 상당히 크다(영주권자 41.1%, 국외 부재자 58.9%). 말하자면 외국의 각종 한인회 등을 주름잡고 있는 영주권 소지자보다 유학생이나 주재원 같은 일시 체류자의 잠재적 영향력이 더 높다는 것. 어쨌거나 이번 4.11 선거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겠지만 말이다.

 

덧글

  • 5150 2012/02/13 09:05 # 답글

    영사관까지 직접 찾아가야 되는군요;;
    저런 문제점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 것조차 계산에 넣은 정치적인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 . 2012/10/30 09:14 # 삭제 답글

    미국에서 유학중인 학생입니다. 영주권자는 모르겠지만 조금 긴 해외 출장, 유학 등의 사유로 나와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라고 봅니다. 다만 그 권리를 주는 척만 하는게 참 짜증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유학 온 친구들 보면 다들 우편으로 투표하더군요. 귀찮아서 안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뭐가 모자라서 우편/인터넷으로 투표를 못하는지 참 의아합니다.
  • deulpul 2012/10/31 15:57 #

    네, 해외 임시 체류자에게 투표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처럼 투표의 결과가 자신의 삶보다 남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사람들의 경우는 납득이 잘 안됩니다. 엄중한 투표 관리의 측면에서 선거 관리 당국의 고민도 있으리라 싶습니다만, 말씀대로 좋은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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