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 겹따옴표는 성역인가? 중매媒 몸體 (Media)

앞에서 쓴 글의 뒷부분이다. 요지는 '보도문에서 겹따옴표는 취재원이 실제로 한 말을 그대로 옮겨 인용할 때 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널리즘에서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라서, 이렇게 길게 쓸 거리나 되는지 싶다. 하지만 당연한 상식이라도 잊히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학습을 통해 부단히 재생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인터뷰를 당하는 사람, 즉 언론을 상대로 하여 말을 하는 사람 중에는 기막힌 비유나 레토릭을 꺼내서 문제의 핵심, 혹은 자신의 주장을 간명하게 짚어주는 이들이 있다.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들으면, 기자들의 머리 속에서는 기사의 윤곽이 그려지며, 제목 나오고 인용할 문장까지 결정되어 착착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졸면서 취재를 하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다.

반면에,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있다. 딱 이런 말을 해 주었으면 좋은데, 그 말을 못 만들어서 변죽을 울리는 경우다. 눈에 확 띄는 뻔한 말 한 가지를 내놓지 못하고 주물럭거리면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말을 유도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도 된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취재 수첩을 보거나 녹음을 풀 때 안타깝기 그지없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겹따옴표로 취재원의 말을 직접 인용할 때는, 오로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 중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같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특히 민감한 주제나 논란 거리와 관련한 기사일 때(언론 기사치고 그렇지 않은 게 있던가), 언론사가 소송을 당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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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서 인용이 잘못되어 저널리스트가 소송을 당한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주간지 <뉴요커>의 필자였던 재닛 말콤의 경우일 것이다(Masson v. New Yorker Magazine Inc.).

말콤이 취재를 위해 정신분석학자 제프리 메이슨을 만난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하버드 산스크리트학 박사 출신인 메이슨은 토론토 대학에서 인도학을 가르치면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여, 필요한 의학 과정을 이수한 뒤 1978년에 정신분석가 자격을 얻었다. 이 때 그는 런던 교외에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드 연구소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프로이드의 딸을 비롯한 연구소 관계자들과 친해졌다. 이런 인연으로 프로이드 연구소의 연구 책임자를 맡게 되었으며, 이후 연구소장직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남긴 비공개 문서들을 접하면서 메이슨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구체적으로는 프로이드의 유혹 이론(seduction theory)에 대한 입장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공공연히 발표하였으며, 프로이드 연구소는 메이슨과의 계약을 끝내버렸다. 프로이드에 기반하고 있던 당시 정신분석학계에서도 추방이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흔드는 저술 작업을 계속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당시 정신분석학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뉴요커>의 기사감이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재닛 말콤은 메이슨과 여러 차례 접촉해 취재했다. 직접 만나기도 했고 전화로도 오래 이야기했다. 이렇게 취재한 내용은 장문의 기사가 되어, 1983년 12월에 <뉴요커>에 두 차례로 나뉘어 실렸다. 그녀의 기사는 메이슨과 프로이드 연구소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주로 다루었다.


(1983년 12월5일자 59쪽에 실린 말콤의 첫번째 기사. 중간중간에 광고가 끼이긴 했지만, 94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기사 두 개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이상하지 않다.)


말콤의 기사가 나가기 전에 메이슨은 <뉴요커>의 사실 확인 부서(fact-checking department, 기자들이 쓴 기사의 사실 관계가 맞는지를 체크하는 부서)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몇 가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기사 내용을 들은 메이슨은 기사에서 잘못된 부분이 여럿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기사가 지면에 실리기 전에 완성된 원고를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 메이슨은, 담당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나 이후 연락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담당자는 자신이 그렇게 약속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기사는 나갔으며, 말콤은 기사 내용을 그대로 묶어서 다음해인 1984년에 책으로 발행했다. 책이 발행되고 나서 각종 북리뷰들이 나왔는데, 대부분이 메이슨을 저급하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허풍쟁이로 평가했다. 말콤이 쓴 책(과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보스턴 글로브>의 리뷰는 이러한 평가가 저자 말콤이 내린 것이 아니라 메이슨 자신이 자기 입으로 토해낸 것이라고 비평했다. 책(과 기사)에 메이슨의 말이 겹따옴표로 대거 인용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에서 이러한 평가가 추출되었기 때문이다. 메이슨은, 자신이 말한 것으로 인용되어 있는 말들은 자신이 한 게 아니며 왜곡되어 인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재닛 말콤이 자신의 기사 두 개를 묶어 발행한 책, <In the Freud Archives>.)


1984년에 메이슨은 말콤과 <뉴요커>, 책을 출판한 회사를 상대로 하여 1천만 달러를 요구하는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소송 사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인용하여 기사화함으로써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된 부분은 여섯 곳의 겹따옴표였다. 모두 메이슨의 성격을 묘사하거나 프로이드 연구소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등 민감한 부분이었다.

말콤은 자신이 인용한 메이슨의 말은 모두 40~50시간 분량의 녹음 테입에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뉴요커>는 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문제가 되는 인용 부분과 정확하게 맞는 부분을 녹음 테입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명예훼손 소송이 성립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허위 인용이라고 본 것이다. (여담이지만, 사실과 의견을 조목조목 따져 판단을 내리고 후대의 기준이 될 판례를 성립시키는, 잘 쓴 에세이 같은 미국 대법원 판사들의 판결문은 언제나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소송은 10년 넘게 진행되었다. 1994년 11월에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연방 법원의 배심원들은 인용문이 잘못임을 인정하면서도 <뉴요커>와 말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문제가 된 겹따옴표 인용문들 중에서 두 개는 허위이고 하나는 명예훼손을 일으키는 진술이긴 하지만, 명예훼손의 성립 조건이 되는 '실질적 악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논리를 들었다.

이 부분은 명예훼손과 표현의 자유(미국 헌법 수정조항 1조)의 갈등과 관련한 내용이다.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미국 법원에서는 '공인'이 언론 보도를 대상으로 하여 명예훼손 판결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 제프리 메이슨은 공인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설령 허위 사실이 보도되었더라도 기자나 언론사가 실질적인 악의(거짓임을 알고도 보도하거나 사실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은 경우)가 없으면 진다. 이러한 악의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원고인 공인이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 원칙에 따라 연방 법원의 배심원들은 <뉴요커>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이 판결은 즉시 법조계와 저널리즘 모두에서 반발과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악의만 없다면' 기자나 언론사는 취재원이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 인용해도 면책된다는 결론을 내린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법률가는 이 판결이 한 측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느라 다른 측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였다고 주장했으며, 언론이 거짓말을 할 자유를 합법적으로 부여했다고 비난했다. 일부 저널리스트 역시 기사문의 전통적 인용 도구로서의 따옴표의 정의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이 소송과 판결에 대한 견해가 어떻든, 대부분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기자들은 따옴표를 쓰는 데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판결 직후 그 결과에 찬성하고 배심원의 결정을 높이 치하한 한 변호사도, 이번 소송은 그 자체로 저널리스트들에게 보내는 강한 경고라고 평가했다. "기자들이 긴 인터뷰를 간추리고 잘라서 기사에 필요한 말만 활용하는 일은 흔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과정을 말콤처럼 대충대충 한 경우는 흔하지 않죠. 그런 일을 벌이다가는 엄청난 위험을 맞게 된다는 것이 이번 사건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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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에 12년 동안 콜로라도 주지사를 지냈던 리처드 램은 언젠가 노인들에 대해 "당신들은 죽어야 할 의무가 있소. 길에서 비켜나시오(You got a duty to die and get out of the way)"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지역 신문이 겹따옴표를 써서 직접 인용한 데 따르면 그렇다. 우리 나라에서도 선거철 같이 예민한 때에 노인들을 경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을 했다가 경을 친 정치인들이 있지만, 램의 말도 다 죽어가는 노인네를 펄쩍 뛰게 만들 만큼 자극적이다.

지역 신문에 실린 이 인용문은 AP 기사가 되어 확산되었으며, 이후 수많은 매체에 등장하게 되었다. 뉴욕의 <데일리 뉴스>는 제목을 "콜로라도 주지사, 노인들은 죽어야 하며, 그게 그들의 의무라고 말하다"라고 뽑았다. <보스턴 글로브>는 주지사 램이 노인들을 절벽에서 발로 차 버리는 만화를 실었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은 램이 그렇게 말했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꼭같은 인용을 쓴 웹 문서들이 널렸고, 구글에서 리처드 램을 치면 'duty to die'가 자동 완성으로 따라 붙는다.

문제는 램이 실제로 한 말은 이것과 달랐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한 말은 이랬다: "우리는 온갖 기계나 인공 심장 따위에 의지해 생을 연명하는 일을 중지하고 죽을 때 죽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나 젊은 세대가 건강한 삶을 영위하도록 해야 한다(We've got a duty to die and get out of the way with all of our machines and artificial hearts and everything else like that and let the other society, our kids, build a reasonable life)."

앞에 쓴 <한겨레>기자는 "어차피 같은 얘기 아닌가?"라고 할지 모른다. 아니다. 주지사가 '우리'라고 한 것이 '노인'으로 잘못 인용되었으며, '(기계 따위에 의지하는 일을) 중지해야 한다'는 말이 '늙으면 죽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잘못 인용되었다. 그 결과, 내용은 훨씬 자극적이 되었으며, 발언한 당사자는 패륜아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피인용자 발언의 일부만을 잘라 내어 왜곡하거나 자극적으로 만드는 신공과 관련된 사례기도 하지만, 피인용자가 한 말을 제대로 옮기지 않고 다른 말을 써서 변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1984년 3월29일자 <뉴욕 타임스> A16면에 실린 관련 기사. AP 통신의 기사를 전재했는데, 잘못 인용된 부분(붉은 색)이 그대로 올라와 있다. 이 신문의 웹사이트에 실린 이 기사에는 긴 편집자 주가 붙어 있다. 보도의 내용이 왜곡이며, 어떻게 해서 이런 왜곡이 나오게 됐는지, 원래 발언의 맥락은 무엇인지, 당사자(주지사)의 주장은 무엇인지, 자기네 신문에서 맥락을 제대로 반영해 실은 기사는 무엇무엇인지, 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잘못 인용한 기사는 무엇무엇인지 조목조목 밝혀 두었다. 책임 있는 언론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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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원이 실제로 한 말만 겹따옴표로 인용한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론 여기에 아무런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겹따옴표는 성역인가?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로, 100%, 순전히, 완벽히 취재원이 한 말 그대로여야 하는가?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이러한 논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점검한 한 을 참고해 보자.

영미권 저널리스트들이 겹따옴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떠한 경우라도 취재원의 말을 손대서는 안 된다는 원칙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필요한 경우 손을 볼 수 있다는 수정주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정주의자들이 '손을 댈 수 있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되겠다.

저널리스트들은 글을 제대로 쓰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고,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법이 맞지 않는 문장을 보면 불편해한다. 그런데, 입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으면 어법에 제대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즉흥적으로 하는 입말과 시간을 두고 퇴고할 수 있는 글말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취재원의 입말을 기사로 옮길 때,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 군더더기, uh..., ummm..., you know, I mean, gonna, wanna 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인용문의 청소(cleaning up a quote)'로 표현되는 일이다. 내용에는 전혀 손대지 않고, 오로지 문법적으로 불완전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만 어법에 맞게 손본다는 뜻이다. 이것이 영미 저널리즘에서 기자가 인용문에 손댈 수 있는 최대치다. '필요할 경우 손을 볼 수 있다'라는 수정주의는 바로 여기까지다. 여기서 더 나가면 일단 저널리즘의 원칙을 벗어나는 일로 간주되며, 무엇보다 소송이 기다리고 있다.

원칙주의는 물론 이러한 단순한 어법상의 수정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어법에 맞게 고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 듯하다. 인용자가 한 말을 다듬어 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것이 왜 논란거리가 되는가? 하지만 이런 의문은, 취재원이 한 말을 다듬어 인용문을 쓰는 관행을 우리 보도문이 당연시해 온 데서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한 고위 정치인이 부적절한 단어들을 쓰며 더듬거리며 한 말을 기사로 인용한다고 해 보자. 그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채택하면, 그의 조야한 말 씀씀이는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며,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대로, 보도 기사에서 인용문을 다듬을 수 있다는 주장에 따른다면, 그의 발언은 매끄러운 문장으로 바뀌어 기사에 실리겠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감추어진다. 그 차이의 가치가 우리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올바른 말을 쓰는 것을 공인의 중요한 덕목으로 치는 영미권에서는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저널리즘에서 취재원이 한 말을 인용할 때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그 최대 허용치는 원래의 말을 어법에 맞게 고치는 데까지다.

언론윤리학을 가르치며 본인이 신문 편집자이기도 한 한 교수는, 인용문을 바꾸는 것(changing)과 다듬는 것(cleaning up)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인용문을 다듬는 것은 흔히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로 장황한 말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필요한 부분만 남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한 말을 실제로 다른 말로 바꾸는 일이죠.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든 강조를 위해서든 말이지요. 실제로 말한 단어를 바꾸고도 '다듬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시제 수정 뿐입니다. 이 경우에도 본인이 한 말에 기반해서 그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취재원이 한 말의 요지나 맥락을 바꾸는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좀더 엄격한 기준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한 신문 정치부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합니다. 남이 한 말을 수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용하기에 부적당해서 손을 보아야 할 말이라면 인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부분 인용을 할 수 있죠. 정말 엉망이라서 그것조차 마땅치 않으면 (겹따옴표를 쓰지 않는) 간접 인용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고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겹따옴표는 신성한 부호입니다. 당신이 이 부호를 쓴다면, 그 의미는 다른 사람이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죠."

또 다른 언론학자는 "겹따옴표는 실제로 한 말을 옮길 때 씁니다. 당연하죠. 그렇지 않다면 겹따옴표의 의미가 대체 뭡니까?"라고 말한다.

한 신문의 편집장이자 부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언론의 임무는 다른 사람이 말하고 생각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말을 꺼내서 표현해 주는 게 아닙니다. 기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써 주는 스피치 라이터가 아니니까요."

이와는 조금 다른 의견은 어떨까. 책을 세 권 낸 한 잡지 프리랜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겹따옴표 안에 넣는 것은 사실(실제로 그 사람이 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압축하거나, 여러 대화에서 이끌어와서 쓰곤 하죠. 나는 평생을 그런 방식으로 인용해 왔는데, 그런 방식의 인용에 대해 불평한 취재원은 단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정리해서 명확하게 옮기기 때문이죠. 예컨대 기사의 인용문 안에 다섯 문장이 들어 있을 때, 취재원과 차에서 이야기한 부분 중에서 두 문장과 사무실에서 이야기한 부분 중에서 세 문장을 함께 쓰는 식이죠."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한 말들을 한 자리에서 한 것처럼 인용해 쓴다는 뜻.)

많은 저널리스트나 언론학자는 이 사람의 인용 방식을 위험하게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뉴요커>의 말콤이 심리분석학자 메이슨의 말을 잘못 인용하고 거액의 소송을 당한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눈여겨 볼 점이 조금 다르다. 이렇게 위험한 인용 방침이라는 게, 역시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말의 순서나 시간만을 조정하여 정리한다는 것이다. 따옴표 안의 말이 어쨌든 취재원 입에서 나온 말임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본다.

어디까지 수정할 수 있는가와 관련하여, 한 신문의 편집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자들은 겹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이 그 사람이 실제로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정치인이 'I gonna...'라고 한 말이 기사에서는 'I'm going to...'라고 나온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죠. 이런 정도의 수정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독자들은 이렇게 매끄럽게 다듬기를 기대하는 편이죠."

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이 쓴 취재 수첩이나 녹취록을 들여다 본다면, 취재원 대다수가 말을 엉망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누구나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기사에서 인용하는 목적은 그 사람을 바보처럼 보이게 하려는 게 아니죠. 따라서 그 사람들이 실제로 한 말을 어법에 맞게 손을 본 뒤 겹따옴표를 치게 됩니다."

다른 기자도 비슷하게 말한다:

"나는 문법적 오류를 수정하긴 하는데, 특히 평범한 일반인의 말을 인용할 때 그렇습니다. 내가 그들과 인터뷰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어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것이지, 그들을 멍청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뉴스위크>에서 오래 일했던 한 프리랜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명한 의대 교수가 발언을 하면서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다듬는 일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시골 아낙네와 인터뷰를 하여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듣고 난 뒤, 그녀의 말을 유명 대학 졸업생이 한 것처럼 매끄럽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낙네가 말하는 방식은 바로 진실의 일부이며, 가장 중요한 사항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어떤 저명한 학자가 대학 총장에 오르는 일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문법적으로 엉망인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인용된다는 전제 아래에서 말이죠."

또 다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만일 시카고 시장의 발언을 매일매일 날 것 그대로 인용한다고 해 봅시다. 그 자신은 별로 신경쓰지 않을지 모르지만, 독자 중 많은 사람이 그를 한심하게 생각할 겁니다. 이런 경우는 겹따옴표를 버리고 간접 인용하는 방식으로 가야죠."

운동선수들도 골칫거리 중 하나다. 말을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스포츠 전문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유명 농구 선수가 한 말을 인용할 때, 끊임없이 주어와 동사 일치를 손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 자체를 손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대중 연설가로 훈련받은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용문을 수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이렇게 장황하게 열거한 이유는, 겹따옴표 안에서 허용되는 수정이란 게 어떤 성격인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다.

논란에서 분명한 것은 1) 독자들이 겹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을 그 사람이 실제로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과, 2) 저널리스트들이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겹따옴표는 여전히 중요하며, 기자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직접 인용할 때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두 차례 퓰리처 상을 받은 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용할 말이 엉망이어서 꼭 손을 대야 한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렇게 고치는 게 더 나을까? 그리고 이게 그 사람이 한 말일까?' 그리고 나서 본인에게 전화를 해서 인용문이 정확한지를 확인합니다."

그는 인용하기가 마땅치 않으면 다시 소스(녹음 테입이나 취재 수첩)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취재원이 하지도 않은 말을 기자가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과 충분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당신이 필요한 말은 틀림없이 녹음 테입에 들어 있을 겁니다."

취재를 열심히 하면 거짓 인용문을 만들어 낼 일이 없다는 뜻이 되겠다.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기사를 쓸 때, 많은 기자가 인용문을 쓰면서 취재원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 본인이 하지 않으면, <뉴요커> 사례에서 나왔듯 사실 확인 부서 직원이 한다. 사실을 전달한다는 언론 본연의 자세이기도 하고, 거액 소송을 당하지 않기 위한 대비책이기도 하다. 그래도 안 되면 따옴표를 버리고 간접 인용 등 다른 방식을 쓴다.

그런 점에서, 영미 저널리즘에서 겹따옴표는 성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안에 들어가는 말이 수정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오로지 문법적 적합성(good English)의 측면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직접 인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는 입말을 기사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의 차원인 것이다. 직접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 인용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저널리스트 그만 두고 소설가 개업하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창작의 영역에서는, 주인공의 입에서 어떤 단어들이 나오게 할지는 완전히 작가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 <뉴요커> 기사 이미지: The New Yorker (링크에 들어가면 기사 전문을 원본 이미지 그대로 볼 수 있다), 책 표지 이미지: goodreads.com, <뉴욕 타임스> 기사 이미지: 해당 신문 아카이브.

 

덧글

  • Jayhawk 2012/02/15 15:00 # 삭제 답글

    오랜만입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오랜만에 속독을 하고 정독하였습니다.
    누군가 나의 말을 기사의 형식으로 겹따옴표를 써서 옮긴다면, 그냥 생생하게 그대로 옮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문법에 맞지 않고, 멍청해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 young026 2012/03/09 22:15 # 답글

    ...운동선수들의 말은 지면이 아니라 방송에서의 인용(?)에서도 cleaning up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쏼라쏼라~~*beep* 쏼라쏼라~~ 이렇게요.^^;
  • deulpul 2012/03/09 22:32 #

    하하... 정말 그렇네요. 그런 지뢰밭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라이브 생방송에서 몇 초의 broadcast delay를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 굴비 2018/02/22 19:21 # 삭제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굴비 2018/02/22 19:27 # 삭제 답글

    저는 공학/법학을 전공하는데, 공부 좀 하다 보면, 어느새 어법, 띄어쓰기 등에 관한 글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게 되네요. 공학은 온통 외국어를 어떻게 번역하고 어떻게 표기하느냐의 문제로, 법학은 판결문이 맞춤법에 맞게 쓰인 건지라는 의문에.... 요즘은 판사들도 국어 공부를 많이 하지만, 과거 판례들을 보면 표준 국어가 아닌 다른 체계를 가진 것 같아요. ^^;
  • deulpul 2018/02/23 13:26 #

    말씀하신 두 가지가 모두 필요 이상으로 골치를 썩이게 만들지요... 그래도 모두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고 문제의식도 넓어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개헌 논의와 관련해, 헌법부터 국민이 알기 쉬운 말들로 바꾸자는 운동도 있고요.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어법에 관심을 가지신 것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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