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의 임기는 보장해야 한다 때時 일事 (Issues)

지난 2월20일에 문화체육부관광부는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인촌을 서울 예술의전당 이사장에 임명했다. 임기 1년 남은 대통령의 정부가 임기 3년 짜리 기관장을 임명한 셈이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아주 어이없고 황당한 인사다. 임기 때문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문화 기관장 자리가 정치하는 자리도 아닌데, 대통령 임기와 연동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유인촌님이 누군가. 이명박 정부 등장 후 문화부장관이 되어, 전 정부에서 임명한 산하 기관장들을 쫓아낸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 임기가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본인이 이제 그런 꼴을 당할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갔다. 황당하다. 코미디 아닌가? 바본가?

기억에도 생생한 한 기사에서 유인촌은 이렇게 말했다. 2008년 3월, 이명박 정부 초기 때 일이다:

유 장관은 이날 광화문 문화포럼(회장 남시욱)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을 주제로 연 초청 강연에서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나름의 철학과 이념, 자기 스타일과 개성을 가진 분들로 그런 분들이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라며 “30여개 산하기관장들 중 철학·이념·개성이 분명한 사람들은 본인들이 알아서 물러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주관을 가진 것을 고려하면, 올해 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이 바뀔 경우 유인촌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제꺼덕 알아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유인촌처럼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인물도 드물 것이며, '나름의 철학과 이념, 자기 스타일과 개성을 가진' 사람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국민이 카메라를 통해 지켜보는 회의를 하면서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것보다 더 특이한 스타일과 개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만치, 그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다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코미디 아닌가? 바본가?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유인촌이 나름 자존심과 일관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쳐 보자. 그렇다면, 그는 올해 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당선하여 이명박 정부의 뒤를 이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의전당 이사장 부임은 자신이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여당 후보가 당선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다.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강하게 지녔더라도 그냥 눌러앉아 있으면 되고, 그게 지금껏 살아온 유인촌의 인생을 뒤집는 것도 아니다. 걱정할 게 하나 없다.

맞든 틀리든, 믿는 것이야 개인의 자유 영역에 들어 있는 것이니까 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현실화하기 위한 작위에 나선다면 문제가 좀 달라지지.

둘째, 예술의전당 인사가 발표된 뒤, 일부에서는 '유인촌 1년짜리 ㄳ ㅋㅋ' 하는 반응이 나왔다. 이를테면 신문들이 대표적인 반응으로 인용한 공지영의 트위터다.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호사가들의 이런 코멘트 말고, 실제로 유인촌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 이를테면 김정헌, 김윤수, 황지우 같은 이들의 말을 취재해 쓰는 것이 정도라고 본다. 너무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유인촌이 어떤 경로로 1년짜리가 되는가이다. 본인의 철학과 일관성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길도 있고, 본인은 물러날 의사가 없는데도 그가 그랬듯 새 정부가 압력을 가해 쫓아내는 길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꼴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 정권이 바뀐 뒤, 이명박이 임명한 기관장들을 임기 상관 없이 잘라내 버린다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결국 같은 인간 되는 거고 같은 정부 되는 거다. 이건 이명박과 유인촌에게 말아먹히는 꼴이다. "봐, 당신네도 별 수 없잖아? 이중기준 쩌네요 ㅋㅋ" 이렇게 된다. 그게 원래의 잘못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라는 점은 무시하거나 깨닫지 못한다.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 이명박은 반이명박 진영의 도덕성을 훼손하거나 그렇게 선전할 수 있는 미끼를 던져 놓은 셈이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똑같은 잘못이라도 데미지는 도덕성 강조하던 쪽에 더 크다.

그래서인지 공지영은 위의 트위터 바로 다음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해 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쪽에서도 완장 차고 나대는 인간들 틀림없이 나올 것이다. 천박함과 몰상식의 정도가 정치적 취향이나 지향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은 불행히도 현실과 잘 맞지 않는다.

셋째, 이렇게, 너는 시정잡배식으로 나오더라도 나는 원칙과 철학에 따라 처신하겠다! 하는 것은 점잖고 바른 태도인데, 문제는 이게 별로 학습과 교훈이 되지 않고 오히려 "븅- 너는 그러라능. 나는 내 갈 길 가겠다능"의 반응과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다음에 야당이 집권하고도 유인촌을 비롯한 전임 정부 임명 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더라도, 또 5년 뒤 지금 여당이 다시 집권하면 그들은 야당 임명 기관장의 목을 또다시 줄줄이 날릴 것이란 뜻이다. 철면피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은 대체로 그렇다.

이렇게 되면 피는 언제나 이쪽이 보고 과일은 언제나 저쪽이 따먹는다. 이건 철면피들과 상대할 때 늘 벌어지는 일이다. 이쪽이 잘못하면 이쪽은 늘 전전긍긍하고 변명하기 바쁘며 형식적으로나마 고치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저쪽이 잘못하면 "ㅋㅋ 난 원래 나쁜 놈이라능, 아니면 병신이등가 ㅋㅋ" 하고 현찰 챙기며 넘어가는 거다. 원칙이고 뭐고,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신경 안 쓰고 실리만 따라 살면 이렇게 편하고 행복한 것이다. 살아남는 것만 알기 때문에 잘 살아남거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니까.

이야기가 약간 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쁜 놈, 병신들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도 나쁜 놈 하고 병신 하자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바지에 팔을 꿰고 티셔츠에 다리를 꿰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칼을 휘두르던 유인촌을 칼 맞을 자리에 앉힌 것은 매우 교묘한 수다. 잘라 내면 반대측을 이율배반이라고 실컷 욕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음 대에 비슷한 일을 마음놓고 벌일 수 있는 발판을 갖게 된다. 안 잘라 내면 반대측의 절제력에 기생하여 천수를(즉 임기를) 다 누릴 수 있다. 이 경우 앞으로 이명박이 퇴임하기 전까지 임명하게 될 다른 기관장들의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손해볼 게 없네?

물론 이것은 유인촌이 나름의 철학과 일관성을 갖지 못했다고 가정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기왕 예술의전당 이사장 자리를 떠안은 이상,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일관성을 보여주는 게 가장 무난한 모습일 것이다. 새 정부의 새 완장들이 똑같은 병신짓 하면서 나대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 전에 유인촌이 "난 원래 나쁜 놈이라능, 아니면 병신이등가 ㅋㅋ"의 멘털리티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판명나면 더욱 좋겠다.

아니, 일단 이런 일을 고민해야 할 상황, 즉 정권이 바뀌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우선 과제겠지. 안 그럼 말짱 꽝. 그런 점에서, 인터넷에 코 박고 트위터나 처보면서 정권 당근 바뀌리라고 김칫국 마시며 삽질 하는 야당 인간들도 반성 좀 해야 하리라 본다. 5년 전인 2007년에 정치부 기자나 여론조사 기관 사이에 이런 말 돌았다: '이렇게 요지부동인 지지율 첨 본다'. 이명박 후보님이 아무리 코를 풀고 똥을 싸고 삽질에 곡괭이질까지 해도 도무지 지지율이 떨어지지가 않는 거다.

이건 저쪽의 고정 지지율에 이쪽의 일부 지지가 가서 단단히 달라붙은 결과다. 지금 야당이 그런 상황인가 생각해 보시길. 지금 야당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어떤 삽질을 해도 압도적 지지율이 흔들림없는 반석에 올라 있나 생각해 보시고, 그렇다면 삽질 좀 해도 된다.

여담이지만, 남들이 뭐라건 예술의전당 이사장에 임명된 게 유인촌 개인으로서는 경사라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1월 중순에 또 한 번의 경사가 있었다. 별을 단 것이다. 그 별? 아니면 이 별? 아니다. 사람들이 거의 들어보지 못한 별인데, 당연한 것이, 처음 생긴 별이기 때문이다.

한글학회는 한 달 전인 1월18일, '한글나라 큰별'이라는 새로운 상을 만들어서 공무원 네 명에게 안겨 주었다. "한글을 빛낸 공무원들에게 고마운 뜻으로 ‘한글나라 큰별’ 칭호를 드리고"라는 취지로 주는 상이라고 한다. 그 중 1번 타자가 유인촌이다.

유인촌이 '한글나라의 큰별'이 된 이유는 한글박물관을 짓는 일을 기획하고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상 취지문"이번에 ‘한글나라 별’이란 칭호를 받고 감사패를 받는 분들은 국민의 소리를 듣고 정책을 반영한 모범 사례로서 한글과 겨레를 빛내는 큰일로서 한글시대에 꼭 해야 할 일을 한 분들입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한글박물관은 2008년 3월 이명박 대통령이 "한글문화의 상품화ㆍ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하라"고 지시함으로써 구체화됐다"고 한다. 국민의 소리를 듣고 만든 것인지 대통령의 소리를 듣고 만든 것인지, 그렇다면 한글 나라의 진짜 큰 별은 이명박인 것인지 헷갈리지만, 걍 넘어가자.

문화 유산을 기리고 홍보할 공간으로서 박물관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본다. 한정된 문화 예산을 그렇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잘 아실 테고, 나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한글 나라의 큰 별인데다가 이제 또다시 문화 예술계의 품격 높은 자리에 앉으신 분이므로, 그가 주재하는 예술의전당 오디토리움에서는 곱고 아름다운 말만 울려퍼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 이미지: 공지영 트위터

 

덧글

  • 2012/02/26 03:4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2/26 05:16 #

    그게 제일 걱정이죠, 정말. 이를테면 4대강 사업처럼 일단 첫 삽질 떠 놓으면 물릴 수도 없는 일 한 판을 벌인다... 그래서 포지션이 다운사이징되는 게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관계자들에게는 심심한 애도를 표하고 싶습니다만...
  • 2012/02/26 05: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2/26 06:19 #

    그런 점은 잘 몰랐는데, 말씀 듣고 보니 정말 심각하군요. 맞습니다, 어떤 단일 정책이나 잘못보다는 사실 큰 물꼬를 틀어버리고 작풍을 뒤바꿔 놓는 일이 정작 큰 문제죠. 문화 영역은 망가뜨리기는 쉬워도 회복하기는 또 지난할 것이구요... 폐해의 파장이 넓고도 깊군요. 그런데 10년이라 하심은?
  • 2012/02/26 06:5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2/26 07:58 #

    아아 그런 말씀이었군요. 예전에 어떤 분에게 편지를 드리면서, 한국도 이제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쪽 분야가 중요해지지 않을까 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떻게, '한식 문화' 창달과 보급은 잘 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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