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나 젊으나 무개념은 무개념 때時 일事 (Issues)

얼마 전 경춘선 전철 안의 장면을 찍은 사진 두어 장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일이 있었다. 일부 등산객이 전철 바닥에 둘러 앉아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을 본 많은 사람이 이 인간들의 무개념을 질타했다.

“같은 한국인인 게 창피” 등산객 경춘선 술판 사진 논란

블로거가 올린 사진을 보면 십여명의 등산복 차림을 한 중년 남녀가 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무리 중 일부는 바닥 한복판에 진을 치고 앉아 있고 다른 무리는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다른 승객들의 출입을 방해하고 있다

제 흥만 알고 다른 사람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이런 인간들의 무개념에 대해서는 따로 말을 더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사진에 나온 무개념 군상이 나이 지긋한 인간들이라는 데 관심이 갔던 모양이다. 위 기사에서 '중년 남녀'라고 한 부분이다.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자유 민주 부르짖던 386들이 이제 전철에 처앉아서 다른 사람 피해 주는 쓰레기들이 되었다'라는 식으로 비난했다. 민주화고 나발이고, 역시 늙으면 빨리빨리 죽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십여 일 뒤에 나온 한 기사는 마치 "그래? 느그들은 얼마나 잘하나 볼까?" 하는 듯하다.

[르포] 술판 벌어졌던 경춘선 다시 타보니… 주저앉고 떠드는 대학생들, 눈살 찌푸리게 해

사진찍기가 끝나자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출입문쪽 바닥에 주저 앉았다. 다른 학교 대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들은 입이 심심했던지 가져온 과자와 음료수, 오징어 등을 지하철 내에서 먹었다. 8명이나 되는 학생들은 마치 전세라도 낸 듯 큰 소리로 웃으며 음료수로 건배를 하고 과자를 서로 돌려가며 먹었다.

이런 무개념 대학생들에 대해서,

참다못한 중년의 남성이 "여기에 앉으면 어떡합니까 학생들, 전철인데 공공질서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한마디하자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일어나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라고 한다.

두 신문 기사가 마치 세대 대결 구조 같이 되어 버렸는데, 꼴통짓의 경중에서 사소한 차이는 발견할 수 있을지언정, 남 생각 못하는 도덕적 저능아들이라는 점은 노소가 똑같다. 세대의 장벽을 뛰어넘어 무개념으로 대동단결하는 조화와 화합의 가슴 벅찬 현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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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중년 술판 사진을 보고 386을 떠올리며 자유 민주 한번 씹고 가야 하는 인간들의 정신 세계는 참으로 독특하다. 자유, 민주 같은 말 들으면 두드러기부터 나는 민주화의 후유증, PDTSD(Post-Democratizational-Traumatic Stress Disorder) 탓임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증오만 갖고 그 증오를 합리화해 준다고 착각하는 증거만 찾으며 살아 갈 것이라는 게 딱하다.

1980~90년대 한국에서 민주화를 향한 역정은 시대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 독재와 그 흔적들이 여전히 개인과 사회의 근대적 자유를 얽어매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억압을 종식시키려 한 것은 개인의 바람이기 전에 시대의 요구고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개개인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자유 민주 부르짖던' 사람도 있고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삽시다' 하던 사람도 있고 '미친 놈들, 데모는 왜 해' 하던 사람도 있고 '선동꾼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던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그 때에도 당신이랑 똑같은 사람이 적지않게 있었다는 뜻이다. 대학생들만 따져도, 교정이나 거리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공방이 실전처럼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도, 도서관에서 면학에 열중하던 사람도 있었고 고시 학원에서 법서를 외우기 바쁜 사람도 있었고 당구장에서 내기 당구를 치는 사람도 있었고 자취방에 모여 포커를 치는 사람도 있었고 디스코장에서 썅썅 부르스를 추는 사람도 있었고 호텔 연회장을 빌려 카니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기와 이슈에 따라 좀 차이가 있겠지만, 개개인의 수효를 따지자면 자유 민주 부르짖으며 나대던 사람들은 오히려 소수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 경춘선 전철에서 술판을 벌이는 중년들을 20년, 혹은 30년 전으로 되돌리면, 이들은 자유 민주를 부르짖는 열혈 청년의 모습으로 복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도 자유민주는 개뿔 경춘선 완행열차에서 남 아랑곳하지 않고 술판을 벌이는 머리 더부룩한 20대로 복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386, 혹은 486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동시대의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보편적 세대 개념이라기보다 당시의 시대 의지에서 추출된 추상적 집단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우리는 20년, 혹은 30년 전에 있었던 모든 개개인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시대 의식을 긍정하는 것이다.

앞으로 20년이 흐른 뒤, 당신 연배의 사람 일부가 어찌 하다 꼴통짓을 하게 되었는데, 누군가가 과거 신문에 묘사된 극단적 사례만을 전설처럼 기억하며 "하루에 게임 20시간 하던 인간들이 결국 이렇게 쓰레기가 되었다"라고 평했다고 해 보자. 옳은가?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루에 게임 20시간씩 했는지는 둘째치고, 게임 20시간과 꼴통짓 사이에 20년 시간을 뛰어넘는 아무런 연관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중년배들의 무개념 행위를 놓고 386 시기의 민주화를 폄하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다.

늙으나 젊으나 무개념은 무개념일 뿐이다. 불행히도 무개념 인간은 어떤 집단에서든 일정한 정도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이것은 시대나 세대의 특징이라기보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생각 없이 사는 인간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란 것이 학력을 의미하지 않음은 당연한 이야기다.

 

덧글

  • 구독자 2012/03/13 07:56 # 삭제 답글

    아주 가끔 댓글 남기는 사람인데요...오늘도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책 한권 내세요. 블로그로 묵혀두기(?) 아까운 글들이 너무 많네요.
  • deulpul 2012/03/13 10:53 #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언젠가 중고책 파는 행사에서 다큐멘터리 만드는 마이클 무어가 쓴 책을 서너 권 발견하고 기쁘게 훑어 본 적이 있습니다. 책값이 1~2달러였는데, 잠깐 훑어보고 나니 그런 푼돈을 주고도 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 꼴 날까봐... 하하.
  • 2012/03/13 14:2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3/13 15:53 #

    저도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산이 높았으니 골이 깊은 건가 싶기도 하고요... 일부 사람이 보여주는 언행 불일치의 모습에서 도덕적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 그런 데에 배신감을 느끼고 질타할 정도로 본인들이 일관된 도덕적 태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말씀하신 조건반사에 가까운 증오는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폭넓게 말씀드려서, 저는 예전에 이러한 현상의 뿌리를 1) 인터넷 2) 포스트모더니즘 3) 이데올로기의 종언 등으로 생각하여 본 적이 있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자세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10대로까지 내려가는군요...
  • 민노씨 2012/03/14 03:29 # 삭제 답글

    앞서 '구독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들풀 님 블로그엔 묵혀두기 아까운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 )

    "우리가 흔히 386, 혹은 486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동시대의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보편적 세대 개념이라기보다 당시의 시대 의지에서 추출된 추상적 집단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우리는 20년, 혹은 30년 전에 있었던 모든 개개인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시대 의식을 긍정하는 것이다."

    아주 적절한 지적이세요.
  • deulpul 2012/03/14 10:58 #

    사실은 전에 '자선(自選) 포스팅' 같은 리스트를 보여드리면 어떨까 잠깐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생각나는 게 모두 '전쟁 중독 미국' '와드 처칠' 같은 남의 글들이어서 쉽게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선 댓글'은 지금도 진지하게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믹 장르로서요...
  • 2012/03/14 06:5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3/14 11:16 #

    20대를 놓고 극단적으로 씹었다가 극단적으로 추켜 주었다가 하는 인사들 말은 믿지 않으며, 이러한 불필요한 증오를 더 부채질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링크하신 내용들을 보면 정말 말씀처럼 그냥 오락처럼 즐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명철한 인식에서 나온 비판이 아닌 것 같고요... 가슴 아픈 것은 역시 당시 세대를 모두 같은 종류로 단일화해서 본다는 것과 그 단일화한 모습이 '그들은 데모해도 취직 잘 했지만 우리는 아니다' 같은 오해로 이어진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당시 젊은이들이 가졌던 다양하고 많은 어려움과 고민들을 모두 제거하거나 잊고 오로지 민주화 성취의 영광스런 장막으로 그 시기를 덮어버린 386 세대들의 잘못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386 시기의 진면목은 우리 역사에서 괄호로 빠져 있는 듯 싶습니다. 너무 큰 담론이 마빡에 걸려 있어서, 그 뒷면에서 어떤 삶과 고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던가는 해당 세대와 후세대 모두에게 잘 기억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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