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의 뺑소니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택가에 좁은 도로가 있다. 좁더라도 차 두 대가 비껴 가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정도의 길이다. 하지만 세 대가 통과하기에는 어려운 구간들이 있다. 간혹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차가 있으므로 조금 조심해야 한다. 도로 양쪽의 집들은 비교적 크고 잘 사는 집들인데, 그래서 차가 많아서인지 가끔 이렇게 길가에 세워 둘 때가 있다.

두어 달 전의 어느 날 밤에 집에 돌아오는데, 마침 이렇게 주차된 차 옆을 지나게 됐다. 반대편에서도 차 하나가 오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한 쪽이 잠깐 속도를 늦춰 기다려 주어, 주차된 차에 먼저 다가온 차를 통과시키게 마련이다. 보니 맞은편에서 오는 차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나는 망설임 없이 주차된 차 옆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마주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순식간에 내쪽으로 확 달려들었다. 이 길은 20마일 속도 제한 구역이다. 달려오는 차는 적어도 40마일 이상의 속도였을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퍽,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났다. 내 차의 사이드 미러가 깨져 나가는 소리였다. 달려오는 차와는 다행히 부딪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비껴 갔다. 이 차는 나를 지나쳐서 그대로 휭하니 사라져 버렸다. 어두운 밤이라서 어떤 종류의 차량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려서 보니 오른쪽 사이드 미러가 완전히 박살나 나뒹굴었고, 주차되어 있던 미니밴은 옆이 쭈욱 긁히고 상처도 났다. 내가 미국 와 살면서 14만 마일 정도 운전을 하는 동안 처음 낸 자동차 사고다.

잠깐 서서 어느 집 차인가를 가늠해 봤는데, 한밤중이라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와장창 하는 소리가 꽤 크게 났는데도 불이 켜지는 집도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무엇을 적어 남길 것도 없었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므로 일단 집으로 가고, 내일 아침에 찾아오기로 했다. 물론 이것은 뺑소니다. 어쨌든 사고 현장을 떠난 것이니까. 하지만 심야에 근처 집들을 모두 불러 깨울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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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내내 나는 굉장히 불안했다. 만일 내가 떠나고 난 뒤 자동차 주인이 깨어 일어나서 차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내 차의 깨진 부속품들은 모두 현장에 남아 있으므로, 차량의 색깔은 물론이고 종류를 알아내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 근처를 지나다니는 차량의 거주지는 대체로 정해져 있으므로, 경찰차가 한 바퀴 둘러보기만 했더라도 사이드 미러가 깨져 있는 차를 발견하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죄 짓고는 못 살지 싶었다.

다음날 자전거를 타고 현장을 찾아가서 보니, 사고가 난 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비교적 낡은 미니밴이었는데,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듯, 옆으로 긁힌 자국들이 있었고, 그 위에 나 때문에 새로 생긴 길쭉한 상처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집들의 위치로 보아 자동차의 임자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 집에 가서 문을 한참 두들겼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집 안을 들여다보니 흰색 레트리버 강아지 한 마리가 개장에 갖혀 있다가 소리에 응답을 하고, 사람 기척은 전혀 없었다.

길 건너편 집에서 한 남자가 아들과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 집으로 가서, 저 차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모른다고 했고 아들은 아무개네 차라고 말했다. 내가 문을 두들긴 바로 그 집이었다. 내 짐작이지만, 남자가 모른다고 한 것은 진짜 몰라서가 아니라, 어떤 일에도 연루되고 싶어 하지 않는 잘 사는 사람 특유의 응대 같은 느낌이 났다. 하지만 순진한 아이는 자신이 아는 대로 말했을 것이다. 여차저차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남자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럼 펜과 종이를 갖다 줄테니 메모를 써 두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펜을 건네주며, 그 집의 패밀리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아무개 패밀리 귀하, 어젯밤에 네 차를 긁는 사고가 났다, 미안하다, 이 전화번호로 연락해라 하고 메모를 써서 미니밴의 와이퍼에 끼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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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은 닷새나 뒤에 왔다. 전화를 해온 아무개 패밀리의 남자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가 제일 처음 한 말은 메모를 남겨 주어 고맙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간단히 설명하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어쨌든 차를 긁어서 미안하다고 다시 사과했다. 그는 길이 좁아 원래 그런 긁힘 사고가 많이 난다며, 최대한 싸게 견적을 내 줄 것임을 몇 번 강조했다.

인건비가 비싼 이곳에서는 차를 새로 색칠만 하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게 나올 것이다. 나는 보험 처리를 하면 되지만, 그럼 보험료가 좀 올라갈지도 모른다.

아무개 패밀리가 자동차 수리 비용을 알려온 것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였다. 2천100달러 나왔다. 너무 많이 나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견적서를 보여주는데, 부품 비용은 40달러도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인건비였다. 작업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가히 살인적인 노동 비용이라 할 만했다. 그래도 너무 많다. 하지만 피해자가 낸 견적이라서, 바가지라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 보험 정보를 알려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보험사 홈페이지에서 사고 신고를 했다. 사고 내용과 시간, 상대편 연락처를 간략히 적도록 되어 있었다. 두어 시간 뒤에 보험사에서 전화가 왔다. 신고 사실을 확인하고 다친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 왔다. 사고에 대해 다시 설명하려 했더니, 홈페이지에 적은 것으로 다 됐다며, 나머지는 자신들이 다 알아서 하니까 신경 끄세요 한다. 그 뒤로 나는 정말 신경을 껐다. 보험사는 내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피해자측과만 연락을 주고받으며 사후 처리를 했을 것이다.

내 차의 박살난 사이드 미러는 내가 고쳤다. 이베이에서 대만산 부품을 아주 싸게 주문하였고, 유튭의 영상을 참고하여 별로 어렵지 않게 교체할 수 있었다. 사고를 치고 어쨌든 돈까지 들었는데도, 오히려 돈을 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덧글

  • 2012/05/25 06: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5/25 13:05 #

    고맙습니다. 조삼모사가 원래 그렇죠... 요즘 겪으시는 일은 축하를 드려야 할지 위로를 드려야 할지 도통 판단하기 어려운 일들이네요.
  • 2012/05/25 15:0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5/25 19:49 #

    공부가 짧아서, 말씀하신 책이 어떤 점을 시사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씩은 조용한 한국 도서관에 일주일만 처박혀서 푹 썩다가 나왔으면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는 대개 반성과 염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아서, 저는 그런 변화를 열렬히 응원합니다. 게다가!... 행복함이 오래오래 지속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요.
  • 2012/05/26 00: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5/26 16:24 #

    아, 말씀만 들어도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럼 전 풍성한 녹색으로 보답을 해 드려야겠네요. 그렇죠, 직접 해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대답이고 복수겠지요. 지금까지 잘해 오셨듯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활짝 웃는 돼지머리라도 하나 보내드려야 인사일텐데... 마음으로만 대신합니다.
  • 민노씨 2012/05/29 04:09 # 삭제 답글

    이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래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앞으론 이런 사고는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네요. ^ ^
  • deulpul 2012/06/01 12:14 #

    고맙습니다. 사실 사고라고 하기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수리비를 보면 또 장난이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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