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국회의원 이상규 때時 일事 (Issues)

우연히도 나는 서울 관악 을구 주민이다. 지금 몸은 다른 곳에 살고 있지만, 나의 주소지는 틀림없이 그렇게 되어 있고, 주민등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또 우연히도 나는 한국 전화번호를 갖고 있다. 인터넷 전화 070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가끔 한밤중에 잘못 걸려온 전화가 태평양을 건너오기도 한다. 이럴 경우는 한참 잠을 못 잔다. 단잠을 깨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 통신 인프라의 엄청난 스케일이 새삼 아연하기도 하고, 문득 찾아온 낯선 한국어 목소리에서 내가 살던 곳에 대한 그리움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4.11 총선을 코 앞에 둔 어느 날에도 낯선 목소리가 전화를 걸어 왔다. 이번엔 사람이 아니라 녹음된 목소리다. 선거와 관련한 여론 조사 전화였다. 조사 주체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처음 들어 보는 조사 회사나 단체 이름을 댄 것 같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내가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자가 누구인지 고르라며 이름들을 불러주었는데, 정확히 관악 을에 나온 후보자들이었다.

태연하게 출마 후보를 하나하나 불러주는 녹음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전화번호와 내가 사는 주거지 정보는 개나새나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개 자료가 아니다. 한국 어느 회사에 고객으로 등록하거나 웹사이트에 가입하면서 주소와 이 전화번호를 함께 적어 넣은 경우는 전혀 없다. 이 정보는 전화번호를 관리하는 070 회사에서만 알 수 있는 정보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설문 조사 주체는 내가 관악 을 주민이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듯 알고 있었다. 전화 속의 녹음녀는 대체 어디까지 나의 신상을 알고 있을까.

나는 지지 후보를 고르지 않았다. '모름/아직 정하지 않았음/지지 후보가 없음' 같은 항목으로 할당된 번호를 눌렀다. 나는 관악 을에 나온 후보자들을 잘 모르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내가 표를 줄 사람은 없었다.

4.11 총선 때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표를 포기하지 않고 투표장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지금껏 살면서, 할 수 있는데 투표를 하지 않은 적은 없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마침 한국에 있어서, 바로 이 관악 을의 한 투표장에서 투표를 했다. 그러나 4월11일에 투표장을 찾아갔더라도, 국회의원 후보자를 고르는 부분은 공란으로 놓아 두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똑같은 이유 때문이다. 정당을 고르는 부분에만 기표를 하고 접어서 투표함에 넣었을 것이다.

전화 설문 조사는 지지 정당 부분에서 특정 정당을 네 개까지만 불러주었다. 나머지는 모조리 '기타 정당'이 되어 5번 단추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5번을 눌렀다. 결국, 멀리 태평양을 건너 나에게 걸려 온 설문 조사는 후보자나 정당 모두에서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숫자로 기록된 셈이었다.


--- ** --- ** ---


선거 하루 전에 한국에서 같은 주소지에 있는 분과 전화를 하는데, 이렇게 물어왔다. 누구 찍어야 되냐. 나는 딱 부러지게 내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지지 후보가 없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민주주의 하자고 하는 선거에서 비민주적인 일이 천연덕스럽게 벌어진 탓에, 관악 을은 이미 개판이 되어 있었다. 염증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를 걸어 오신 분은 한숨을 쉬며, 그래도 누군가는 찍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선거 뒤에 그는 야권이 대안으로 내세운 이상규를 찍었다고 전해 주었다.

내가 100% 자신하건대, 이상규가 얼마 전에 '생방송 100분 토론'에 나와 보여 준 모습을 미리 그대로 보여주었더라면 이 분은 절대 그를 찍지 않았을 것이다.

후보자를 잘 알지 못하고 표를 행사한 유권자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보여주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선거 때는 물론이고 당장 국회에 들어가 국사를 다루게 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정치인은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정치꾼이라고 욕을 먹어도 싸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정치가란 대체 뭐 하는 존재란 말인가.

국가와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인 공무 담당자에게 국가와 사회에 중요한 이슈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는 것은 사상 검증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호도한다면,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 선거에 나선 후보자에 대해, 공공 이슈와 관련 있는 신념과 가치관을 두고 쏟아지는 서릿발 같은 질문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북한이 매우 중요한 이슈고 문제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국가의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한 언어로 밝히고 국민의 판단을 구하여야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정확한 의견을 표현하지 않은 채 정책을 다루러 나선다면 위장 전술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선거 전에 이러한 검증 절차들이 대개 다 생략되고 그저 '이명박 심판'이라는 무기력한 주술에 휩쓸려 넘어갔다는 점이다.

만일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 벌어졌다면, 해당 의원 사무실은 전화 폭탄을 떠안게 되었을 것이다. 지역구 주민들이 항의 전화를 걸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자기가 찍었든 아니든, 자기 지역구 의원을 '나의 상원(하원)의원'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주민의 뜻을 대표하는 게 핵심 임무인 이 '내 의원'이 정작 제대로 내 뜻을 대표하도록 추동하는 데 게으르지 않다. 안 울면 떡 안 준다. 표현하는 의사만이 의미 있는 의사인 것이다. 주민의 지지가 존재 근거인 지역 정치인들은 이 같은 주민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여담이지만, 100분 토론 파문 이후 나온 한 인터뷰를 보니 이상규는 스스로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나는 자신을 1인칭 대명사가 아니라 이름 석 자로 부르며 남과 구획하는 이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덧글

  • 민노씨 2012/05/29 04:20 # 삭제 답글

    "국가와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인 공무 담당자에게 국가와 사회에 중요한 이슈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는 것은 사상 검증이 아니다." 아주 공감하고, 또 동의합니다.

    오랜만에 대학동기 녀석한테 전화가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는 보지 않은, <100분토론> 이야기가 나와서 한참 떠들던게 며칠 전이었는데요. 지난 3대 세습에 대한 이정희 전대표의 처신도 그렇고, 최근의 통진당 사태는 말할 것도 없고.... 참 입맛이 쓰네요.

    민노씨를 포함해서 평범한 국민이 바란 '진보'의 모습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말이죠....(중앙일보 인터뷰 패러딥니다...ㅡ.ㅡ;)
  • deulpul 2012/06/01 12:45 #

    '평범한 국민'이 아니라 조중동의 프레임에 갖힌 국민입니다...
  • mesfalcon 2012/05/29 14:58 # 삭제 답글

    100분토론은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국회위원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른 판단을 유권자들에게 숨기다니요.
  • deulpul 2012/06/01 12:49 #

    그러게 말입니다. 토론 맥락상 적당하지 않은 주제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오히려 할 말 있으면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상 검증이라는 건 억지랄 수밖에요.
  • 헐렁한 바지 2012/07/07 12:38 # 삭제 답글


    과연~!
    이상규는 북한에가서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이나 행위를 할 수 있을까~??
    그럼 어덯게 될까~!? 총살~!? 아오지 탄광~!?? 정치범 수용소~!?? 이중에 하나겠지!!
    이곳이 싫으면 가면될것 아닌가~!? 왜~! 이곳에 살면서 이곳을 싫어하며 비판할까~!??
    우리 국민들은 싥어한다, 증오한다, 이상규, 이석기, 김재연, 임수경이를~~~~!!
    빨갱이 국회의원들 이북가서 대남활동하면 훈장주고 영웅칭호 받을텐데~! 왜 ~ 안가지!?
    우리 국민내는 세금으로 당신들을 먹여 살린다는것에 정말 증오한다!!!!!!!!
  • deulpul 2012/07/09 08:42 #

    님이 지금 하는 말은,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면 총살되거나 수용소 가는 세상을 한국에서 만들자고 하시는 거요. 나원... 자신이 뭔 소리 하는지도 모르고...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