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의 (한정적인) 긍정성 섞일雜 끓일湯 (Others)

<뉴스위크> 국제판 편집장을 지내고 지금은 <타임>에 있는 파리드 자카리아가 지난 5월24일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축사 중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통념과는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발전된 시대임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들을 들고 나서) 제가 여러분께 우리가 번영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지금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태평성대라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아니죠. 우리는 지난 세기에 수많은 끔찍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대공황, 두 차례의 세계 전쟁, 냉전, 기타 수십 가지 크고 작은 도전들. 그러나 이 각각의 도전이 벌어질 때마다 그에 대한 대응이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성과를 통해 끔찍한 문제들에 대처해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성공을 잊습니다. 2009년에 멕시코에서 H1N1(신종 플루) 바이러스가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바이러스가 어떻게 퍼졌나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57년이나 1968년의 아시아 플루는 4백만 명을 희생시키며 퍼져나갔는데, 신종 플루 역시 비슷한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멕시코 보건 당국은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였으며, 이러한 발견을 WHO와 공유하고 최선의 신속한 조처를 찾아서 바이러스가 발생한 지역에 대처했습니다. 감염된 사람은 격리시키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면역 주사를 처방했습니다. 멕시코는 전면 비상 상황에 돌입했습니다. 가톨릭 국가임에도 사람들은 3주 동안이나 교회에 갈 수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일이겠지만, 축구 경기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바이러스는 (효과적으로) 통제되었습니다. 3개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대체 왜 그렇게 쓸데없이 난리를 피웠나 하는 의문을 제기했으며, 우리가 모두 과잉 대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과잉 대응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대응한 것이며, 제대로 대처한 것이며, 그로써 문제를 풀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새겨 볼 만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가 벌어지면 대응을 해야 한다. 도전이 있으면 응전이 있어야 한다. 도전이 강할수록, 혹은 도전이 잠재한 위험이 클수록 대응의 수준도 높아져야 한다. 그런데 간혹 이러한 대응은 비합리적 수준에서 과도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혹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패닉론이다.

해당 시기에 논란의 한 가운데를 지나며 보자면, 여러 부정확한 정보가 횡행하면서 사람을 미혹시키고 지나친 두려움을 촉발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개의 대응 양상을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더라도, 큰 그림으로 보면 인간의 응전은 대개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이렇게 합리적으로 흘러가 귀결되는 데에는 쿨한 냉철함 못지 않게 뜨거운 반응 역시 기여하는 바가 있다. 긴 안목에서 볼 때,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테제에 대해 안티 테제를 제공하여 사회적 토론을 촉발하고 결과적으로 신테제를 성립시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점은, 도전에 대한 응전이 실제 정책으로 구현될 때는 한정된 자원을 투자하는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로 표현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정책 집행상의 관성을 깨고 새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과도한 반응 탓에 과도한 투자를 하게 되었다면 자원의 낭비 정도에서 그치겠지만, 만일 적절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대응을 하다 문제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과도한 투자 때보다 훨씬 심각하다.

극장에서 불이 났을 때, 모두가 불이야! 하고 외치면서 서로 먼저 탈출하려고 다투면 혼란이 벌어지고 희생자는 더욱 늘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불은 탄소 성분이 급속하게 산소와 결합하는 산화 반응입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아는 거죠" 하면서 점잖게 앉아 있다가는 그 산화 반응으로 나오는 일산화탄소에 모두 질식하여 숨질 것이다. '적절한 패닉'이란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극장에 앉아 있는 연소 전문가들의 쿨한 안이함에 균형을 맞춰 줄 적절한 경각이 있어야, 벌어진 상황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추동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싶다. 차량이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종 동력 전달 장치와 조향 장치가 제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하지만, 동력을 만드는 출발점은 내연기관 안에서 전개되는 원시적 폭발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이것은 우리가 사는 시기가 비이성적 카오스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덕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세 흑사병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문가들과 매체와 소통 채널의 덕분에, 패닉은 원자로에서 그 화력이 조절되는 핵반응 같은 것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근거 없거나 잘못된 사실이 번져 나가서 불필요한 공포를 자극하는 일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이 같은 잘못된 담론의 생명력과 독립성은 예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약해졌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요즘 세상에서 잘못된 담론은 그에 대한 보정과 함께 퍼져 나간다.

어떠한 도전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해 놀라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지극히 정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서부터 응전의 모색이 시작된다. 패닉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또 하나의 패닉이 아닌가 싶다.

 

덧글

  • 2012/06/28 23:3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6/29 02:54 #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했네요. 아마 그 시기 활약이 크게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몇 년 전 겨울에 벌였던 일 비슷한 걸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은데, 너무 멀리 계셔서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네요. 모쪼록 건강하시길 빕니다.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