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이 가장 좋아했던 시와 낱말 섞일雜 끓일湯 (Others)

학교 도서관에 동아시아 책들을 모아 둔 특별 서고가 있다. 동아시아 관련 학과가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운영된다. 20만 권 정도로 장서가 꽤 많은 편인데, 중국 책이 주류고(65%) 일본 책도 많지만(33%), 한국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2%).

장서가 인구 수에 비례하여 책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5 : 33 : 2] 의 비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나라 못지 않은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 한국의 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은 크게 아쉽다. 참고로 이 학교에 등록한 학생수로 따지면 중국어권(중국+대만), 일본, 한국의 비율은 [68 : 3 : 29] 이다. 중국은 장서 비율과 비슷한데, 한국과 일본이 뒤집혀 있다.

이 서가에서 귀한 책을 발견했다. 1956년에 나온 <이상전집(李箱全集)> 세 권이다. 도서관의 책은 1959년에 찍은 3판이다. 종이 색이 노랗게 바래고 잘못 만지면 상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첫 권은 표지를 새로 덧대었다. 이 책 이후로도 이상의 글을 모은 전집은 여러 차례 나왔는데, 그런 모음집의 효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한 부분에는 이상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시와 낱말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있다. 그가 꼽은 애송시는 8년 연상이던 시인 정지용의 '유리창'이다. 아들을 폐결핵으로 잃고 지었다는 바로 그 시다.


琉璃窓(유리창)

流璃(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寶石(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流璃를 닥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肺血管(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이상이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조선말로 꼽은 다섯 낱말은 다음과 같다. (원 이미지를 붙였으므로, 글은 지금말로 약간 바꾸었다.)


무관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걸핏하면 성천(평안남도)에를 가구 가구 했습니다. 거기서 서도인(西道人) 말이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쳤습니다.

들어 있는 여관 아이들이 손[客]을 가리켜 '나가네'라고 그러는 소리를 듣고 '좋은 말이구나' 했습니다. 나 같이 표표한 여객(旅客)이야말로 '나가네'란 말에 딱 필적하는 것 같이 회심의 음향이었습니다. 또 '누깔사탕'을 '댕구알'이라고들 그럽니다. '누깔사탕'의 깜쯕스럽고 무미한 어감에 비하여 '댕구알'이 풍기는 해학적인 여운이 여간 구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서 어서 하고 재촉할 제 '엉야-' 하고 콧소리를 내어서 좀 길게 끌어 잡아당기는 풍속이 있으니 그것이 젊은 여인네인 경우에 눈이 스르르 감길 듯이 매력적입니다.

그리고는 지용의 시 어느 구절엔가 '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 하는 '푸렁' 소리가 언제도 말했지만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말솜씨입니다.

불초 이상은 말끝마다 참 참 소리가 많아 늘 듣는 이들의 웃음을 사는데 제딴은 참 소리야 말로 참 아름다운 화술인줄 믿고 그러는 것이어늘 웃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평안도 아이들이 쓰는 '나가네(나그네)'와 '댕구알', 평안도 여성의 콧소리 '엉야~', 정지용 시에 나온 '푸렁(푸른)', 그리고 자신이 즐겨 쓰는 말 '참'을 꼽았다. 이 책이 출간될 당시 정지용은 월북한 뒤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름을 밝혀 쓰지 못하고 'X용'이라고 했다. (현재 정지용은 북한으로 이동 중에 소요산 부근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집을 편찬한 사람은 임종국, 온 생애를 친일파 연구에 바친 바로 그 임종국이다. 그가 오랫동안 자료를 찾고 수소문하여 집대성했다. 평생 자료를 끈질기게 파헤친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책 말미에 쓴 발문을 보면, 이상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1937년) 불과 20년 만에 자료들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있다. 광복과 전쟁의 극단적 혼란 시기였으므로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임종국과 <이상전집>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아래는 임종국의 발문이다.


발(跋)

이 전집은 '젊은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드리는 정성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책이 나의 - 백면서생의 손을 거쳐 출판된다는 것을, 나는 차라리 비극으로 생각한다. 발문을 쓰는 것은 그런 즐겁지 않은 마음의 소치일지도 모른다.

"형! 형은 그만 사학도가 되셨구먼요." 허물없는 R형이 어느날 내게 한 말이다. 단 한 항목의 약력을 확인하고저 어떤 경우에는 5, 6개소를 찾고 7, 8종 - 20여 권 - 의 문헌을 뒤적였으니, 그런 나를 '사학도'라 한 R형의 말에 조금도 과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도 일자 미상이 태반인 약전(略傳)밖에 쓸 수 없을 때, 참 20년이라는 세월의 무서움이 통감되었다. 출판을 위해서만 그 방대한 원고를 10독했음을 고백하며, 그 외의 일은, 속상하던 말과 고심담은, 차라리 잠자코 말기로 한다.

2년 동안에 시 2천 편을 썼다는 이상의 전작품을 수집함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대부분이 미발표인 이 작품들은, 오늘 확실한 근거로써 추산할 수 있는 잔고(殘稿)만 해도 수백은 훨씬 넘는다. 작자 자신이 소각해버린 것은 논외거니와, 소장자들의 성명까지를 알면서도 이를 수록할 수 없었음은, 오직 우리가 오늘 공통적으로 담지한 비극 그것으로 인함이었다. 따라서 완성된 것이 절대로 아닌 이 전집은, 그러나 그 분량만으로도 이상의 전모를 후세에 전하기는 충분하리라. 또 세대를 패익(稗益)함도 적지 않으리라. 남은 일은 강호제현의 협력을 얻어, 또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문학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그 점차적 완성을 기약하겠다.

본서 출판 계약을 며칠 앞두고 고인의 유족 - 자당(慈堂)과 영매(令妹) - 을 뵈올 수 있어 도움된 바 적지 않았다. 서신으로 그 거처를 가르쳐 주신 전 고대강사 안효정 선생님께 치하드리며, 이 전집을 성원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예를 올린다.

진통의 계절도 다아 갔구나! 이제 이 책이 주인을 찾아가는 날이면 나는 작은 행장을 들고 바다 구경을 하러 떠나야겠다.

단기 4289년(1956년) 5월26일
제1권 교정을 시작하면서
임종국


발문 내용 중 짐작은 되지만 정확히 모를 게 또 하나 있다. '오늘 우리가 공통적으로 담지한 비극' 때문에 소장자를 알면서도 작품을 수록할 수 없었다는 부분이다. 전후(戰後), 혹은 분단 상황과 관련이 있는 말일 듯 싶다. 책을 낼 당시는 이렇게 쓰면 누구나 다 행간의 뜻을 알아들었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니 그 시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상전집>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책 맨 뒤에 찍힌 다음의 구절이다.



이것은 50년대 출판된 모든 책의 맨 뒤에 의무적으로 찍어야 하는 구절이었다. 70, 80년대 음반 뒤에 정부가 지정한 '건전 가요'를 무조건 붙여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맹세'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혁명 공약'으로 대치되어, 달달 암기하도록 강요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나 싶다.

※ '세대(世代)를 패익(稗益)함도 적지 않으리라'는 '세상에 이익이 되는 바도 적지 않으리라' 정도의 뜻이다. 이 말은 원래 무슨 뜻이었는지 잘 몰랐으나, 댓글에서 음영님과 편도님이 자세히 알려 주셔서 알게 되었다.

 

덧글

  • 민노씨 2012/07/15 04:58 # 삭제 답글

    '이상'의 시는 이승훈(당시 한양대, 국문과, 지금도 재직중인지는 모르겠네요)의 하드커버본으로 처음 읽었습니다. '처음'이라고 썼지만, 날개 등의 소설을 읽은 것 외에 따로 이상의 시를 다시 읽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암튼 제가 읽은 시집은 이승훈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국문학자들의 해설이 각 시마다 각주 형태로 붙어 있는 것이었는데, 회색톤의 하드커버였죠. 꽤 탐독했던, 아주 오래된 리스트에 속하는 책이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알 길 없네요. 본가에 있을 것도 같지만, 저는 제가 읽은 좋은 책들은 친구들에게 종종 넘겨주고 나중에 다시 사야지, 하는 편이라서...;;; 문득 그 오래된 시집이 읽어싶어지는 새벽입니다.

    그나저나 자연스럽게 deulpul 님께서 좋아하는 시와 낱말이 궁금해지네요.
    하나 따로 글로 써주시죠(이미 쓰셨다면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 )
  • deulpul 2012/07/15 05:32 #

    아끼고 손때 묻은 책들이 사라진다는 건 참 아쉽죠. 나에게서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영영 종적을 감춰버리게 되면, 나의 과거나 추억 하나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저는 글자로 이루어진 뭘 잘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라, 중고등학교 때 쓰던 교과서는 물론이고 공책과 연습장까지 모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다 버렸는데, 잘못했다는 생각이 두고두고 듭니다. 말씀하신 책이 본가에 잘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제가 좋아하는 시는 몇 개 금방 떠오르는데, 낱말은 한참 생각해야 하겠네요. 말씀대로, 언제 잘 정리해봐야겠습니다.
  • 민노씨 2012/07/15 05:52 # 삭제 답글

    deulpul 님 좋아하는 시와 낱말 정말 궁금합니다. 꼭 써주세요. : )
    저는 deulpul님 이 글 덕분에 지금 흘러가는 상념들을 붙잡아봤습니다.
    소박한 단상에 불과하지만요. ㅎㅎ
    서로 서로의 상념을 징검다리 삼던 블로그의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 deulpul 2012/07/15 13:40 #

    트랙백은 좋은 기능인데도 이상하게 활성화가 잘 안되고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죠. 문화적인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전 지금도 '블로그 시절'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전인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 dhunter 2012/07/15 11:24 # 삭제 답글

    좋은 도서관이네요. 한국 대학도서관이면 저렇게 오래된 책은 마이크로필름화 되거나 폐기되었을텐데...
  • deulpul 2012/07/15 13:37 #

    책이 많지 않고 새 책이 잘 들어오지 않는 탓도 있겠지요. 비교적 새 책들을 보면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기증했다는 마크가 찍혀 있는데, 언젠가 예산 사정으로 해외 지원 사업을 축소했다는 보도를 본 기억이 납니다.
  • 민노씨 2012/07/15 20:33 # 삭제 답글

    저 역시 블로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deulpul 님 같은 블로거가 계시는 한은 더욱 그럴거라고 믿고요. :)
  • deulpul 2012/07/18 15:30 #

    반사- 입니다.
  • 음영 2012/07/18 12:02 # 삭제 답글

    패(稗)자에 '작다'라는 뜻이 있다고 하네요. 구글에서 찾아봤더니 패익(稗益)은 중국에서 benefit 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고요. 대충 세대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를 겸손하게 쓴 것 아닐까요?
  • deulpul 2012/07/18 15:38 #

    아, 그렇게 보니 잘 이해가 됩니다. '세대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쓴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겠군요. 일단 본문의 '패일'은 '패익'으로 바꾸어 두었습니다. 도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는 대로 좀더 찾아보겠습니다.
  • 2012/07/20 14:5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20 18:1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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