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의 미덕 섞일雜 끓일湯 (Others)

사방팔방 막힘 없이 트이고 산이 거의 없는 곳에 살다보니, 귀하고 아쉬운 게 두 가지 있다. 등산과 스키다. 스키는 한국에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여기서도 하고 싶어 안달이 날 만큼 몸에 붙이지 않아서 큰 상관은 없다. 산을 오를 수 없다는 점은 영 아쉽다.

한국에서 혼자서, 혹은 마음 맞는 사람들과 산을 다닌 것은 큰 낙이었다. 덕분에 이름 있는 산은 이럭저럭 한 번씩 올라봤다. 감사한 일이다.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 대신 물이 있지만, 물은 보기는 좋아도 몸으로 어우르며 뭘 하기에는 마땅치 않다. 호숫가에서 명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평온함에서 나오는 생각은, 바위와 나무를 안돌이 지돌이 해가며 몸뚱이를 비탈길 위로 힘겹게 끌고 나갈 때, 모든 사유가 사치스럽고 공허한 것처럼 여겨지는 그 순간에 구슬땀처럼 삐져나오는 생각과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를 것 같다.

그나마 등산 기분을 낼 수 있는 곳이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이곳도 호수 주변이다. 호수와의 표고차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변 지역이 높아져서 산처럼 되었다. 차 세우고 물병만 달랑달랑 들고 가는 길이라서 땀 날 정도도 되지 않는다. 지리산을 사나흘 다니다 보면, 소금이 말라붙어 윗도리가 하얗게 변한다. 그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큰 특권이요 호사였다. 그에 비하면 한없이 아쉽지만, 그래도 이 달랑달랑 두 시간은 높낮이가 꽤 있어서 등산 기분을 낼 수는 있다. 날씨가 괜찮으면 자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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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대개 좋다. 착하고 수줍다.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한나절 등산 말고, 높은 산, 오르는 데 땀이 많이 나는 산일수록 그렇다. 뒤에서 보면 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배낭을 메고 혼자 다니는 여자분들도 있다. 걸음도 빨라서, 비실비실하는 나 같은 아마추어를 휙휙 가볍게 지나친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분들도 보면 착하고 수줍어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게 등산이 좋은 이유 중 하나다. 혼자 다니는 여자들이 있어서라는 말이 아니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이 대개 좋아서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걸 좀 속되게 말해 '산에는 성질 더러운 놈은 오지 못한다'고 표현한다. 성질 더러운 사람은 몸의 뼈다귀와 근육을 끈질기게 움직여서 길을 한 치씩 꾸준히 밀어내야 하는 일을 참아내지 못한다. 지나친 일반화일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나의 경험으로는 발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는 능선길에서나 대피소, 야영장에서 성질 더러운 사람은 못 봤다.

오해 마시길 바란다. 등산을 싫어하시는 분들이 성격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부분집합 관계를 생각하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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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끄적이는 글들은 대개 길다. 지금 이것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심지어 이메일 같은 것조차 그렇다. 이것은 나쁜 습관이다. 분량 제한 없는 온라인 글쓰기에서 나온 습관인 듯싶다.

글은 짧게 쓰기가 훨씬 어렵다. 글감에 대해 잘 알면 글이 짧아진다. 주장이 명징할수록 글은 단촐해진다. 글이 길어지는 까닭은 잘 모르거나 게으르거나 아니면 군더더기 수다 때문이다. 짧게 쓰면서 잘 쓰기는 더 어렵기 때문에, 이런 능력이라고는 원래 없는 나는 애초에 그런 일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변명거리가 하나 더 있다. 이것 역시 온라인 글쓰기를 하면서 체험한 데서 생긴 변명이다. 이 체험은 등산을 하면서 얻은 경험과 비슷하다. 성질 더러운 이들은 높은 산을 오지 않듯이, 성질 더러운 이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해 마시길 바란다. 긴 글을 읽지 않는 분들이 성격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역시 부분집합 관계를 생각하시면 된다.

성질 더러운 이들은 긴 글을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는다. 등산에서 성질 더러운 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로서도 좀 모호하지만, 글을 읽는 일에서 성질 더러운 이들이라면 대충 그림 나온다. 마치 귀신들린 듯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 초면에 욕지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사람, 정파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사람, 세상에는 종북과 반북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편을 비판하면 무조건 적이라고 믿는 사람, 상대방의 정서를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저 자신이 얻어들어서 믿고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는 사람... 다양하다.

이런 사람들은 긴 글을 읽어내지 못한다. 할 수 있더라도 안 한다.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글을 다 읽어내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 중 그래도 그나마 양심적인 축은, 글을 다 읽지 않았으니 뭔가 심사가 틀려도 그냥 넘어간다. 긴 글의 첫 번째 미덕이다. 양심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은 제 성질에 안 맞으니 뭐라고 서너 줄 댓글로 쓴다. 하지만 글을 읽지 않았거나 편견의 필터로 거르고 보았기 때문에, 그런 화풀이는 헛다리짚기가 대부분이다. 그에 대한 대응은 대개 아주 쉽다. 지적하는 부분은 틀림없이 본문 어딘가에 있다. 하다못해 쯧쯧 혀만 차며 넘어갈 수 있다. 긴 글의 두 번째 미덕이다. 합쳐서 말하자면, 겉으로는 토론이니 논쟁이니 그럴 듯한 포장을 씌웠어도 실제로는 별 의미도 가치도 없이 서로의 약점을 찾아 말꼬리나 잡으며 늘어지는 치졸한 아귀다툼 대거리를 벌일 가능성을 대폭 줄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글을 제대로 읽고 생각을 하여 본 뒤에 제기하는 질문이나 반론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끔 '글을 제대로 읽었는지 조바심이 나지만' 하는 전제를 달며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은 대개 글을 제대로 읽었으며, 따라서 거꾸로 내가 제대로 썼는지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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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에 있었던 통합진보당 내부 분규 당시에 찍혀 화제와 논란이 되었던 '머리채 잡는 여성' 사진에 관련된 글을 얼마 전에 <슬로우뉴스>에 썼다. <슬로우뉴스>는 독립 매체이면서도 <미디어오늘>에 기사 제공 협약을 맺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미디어오늘>에도 실렸다.

<미디어오늘>이 머리꼭지로 올리고 네이버 뉴스캐스트에도 보내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읽은 모양이다. 이정환 국장은 이 글을 40만 명이 읽었다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노출 탓이겠지만, 여러 사람이 <미디어오늘> 기사 밑에 댓글을 달았다. 가관이다. 이건, 돈 주고도 못 보는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댓글 중 하나의 말처럼, "소 귀에 경 읽기 ㅋㅋㅋ" 였다. 나는 그 댓글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누가 내 옆에 있었더라면 "어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입을 헤벌쭉 벌리고 말야..." 했을 것이다.

그 글도 분량이 길었다. 댓글을 단 사람 대부분은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것이 분명했다. 기사의 내용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미디어 심리학 같은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보다는 그 밑에 댓글란에서 벌어지는 일로부터 훨씬 큰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별로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말이다.

본문: "초상권 침해가 아니다."

"문자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기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요."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양상을 흔히 색안경을 끼고 본다고 한다. 색안경을 끼면 색깔은 제대로 안 보이더라도 형체는 그럭저럭 보인다. 댓글란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보면, 색안경을 끼고가 아니라 눈을 감고 글을 읽는 것 같다. 색깔도, 형체도 구분해 내지 못한다. 시각장애인이 보통 책을 점자 읽듯이 손으로 더듬어 읽으려 하는 모양이라고 할까.

이들이 글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갖다대는 기준은 '어떤 매체에 실렸는가'인 듯하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들의 글(기사) 읽기란 소속 매체 확인 > 제목 확인 > 앞의 서너 줄 확인 쯤에서 그친다. 바쁘다. 이해는 한다.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 세상이니까.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런 노력에서 나온 인식을 갖고 댓글에 뭘 쓰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많고 한가한 사람들인지, 시간이 많으면서 본문은 왜 읽지 않는지, 내용이야 어떻든 남들이 특정 매체나 특정 경향성의 글에 포섭될까봐 걱정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순진무구한 독자가 세뇌되는 것을 막는 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그래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창피함을 무릅쓰고라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인지, 참 궁금하다.

나는 이들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글을 다 읽고도 오해를 할 수는 있다. 이들은 이해를 할 의사가 처음부터 없다. 이들은 글을 읽지 않는다. 그저 편견과 까막눈과 뭔지 모를 사명감에 의존해 댓글을 쓸 뿐이다. 이것은 기사에 대한 비평 행위가 아니다. 그저 정치 행위일 뿐이다. 제 살을 깎아먹고 제 얼굴에 먹칠하면서 한다는 점에서 아주 불우한 정치 행위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글이라는 대상을 놓고도 그와 직접 상관없는 정치 행위를 하러 달려드는 이들은 긴 글을 읽지 않거나 못한다. 그래서 오늘도 내 글은 길어진다.

하지만 진지한 독자들의 귀한 시간을 뺏는 일은 언제나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덧글

  • thyade 2012/07/16 01:43 # 답글

    통진당 사건 보도와 관련하여 언론이 기여한 공로는, 흔히들 쓰는 '머리끄댕이'가 '머리끄덩이'라고 일러준 데 있을 것 같기도요.
  • deulpul 2012/07/16 02:19 #

    바라건대, '난쟁이'처럼 작은 '애먼' 자기 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던 '소장수'처럼 '덩치' 큰 당원이 '명예훼손'으로 고발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얼른 벌어져야 할 텐데요.
  • 히요 2012/07/16 08:43 # 답글

    제목과 등산 얘기가 연결이 안 되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전개가 이런가 하며 읽다가, 성질 더러운 이는 긴 글을 안 읽는다! 란 문장에서 크게 웃음터졌습니다. 정말 그렇죠. 긴 글도 읽고, 그것도 큰 오독없이 읽고 누가 무어라 대답해주면 글쓴이도 고맙게 느끼고 들을 귀도 더 잘 열리고 그럽니다. 글 쓰는 이로서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글을 압축하려 노력하고는 있습니다만, 이런 효과를 감안하면 '압축된 긴 글' 을 쓰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ㅋㅋㅋ

    그나저나 트위터를 보니 긴 글 쓰기로 유명한 한윤형기자는 거진 늘 '제대로 안 읽고 까는 이들'에게 시달리는 모양이더군요. 공을 들여 읽을 수고는 안 하면서도 굳이 달려들어 까는 사람들의 심리는 꽤 연구거리가 됩니다. 왜 그러지-_-;;;?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알고 싶어져요.
  • deulpul 2012/07/18 09:15 #

    아마 "당신들 말이 다 옳아!"를 길게 써도 달려들어 깔 것입니다! 하하하... 글은 말씀대로 압축하여 짤막하게 쓰는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저도 반성하는 측면입니다.
  • 江湖人 2012/07/16 11:37 # 삭제 답글

    캡처하여 보여주신 글의 추천한 사람과 비추천한 사람의 비율을 보고 더 놀라고 있습니다.
  • deulpul 2012/07/18 09:17 #

    댓글이 '대(對)한 글'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경향성과 같고 다름을 더듬이로 찍어내는 정치행위일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 2012/07/16 15: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18 09:1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18 15: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17 00: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18 09:2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이정환 2012/07/17 14:51 # 삭제 답글

    지금 확인해 보니 50만명이 넘었더라고요. 길지만 잘 읽히는 글이었습니다. 좋은 글 게재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deulpul 2012/07/19 14:15 #

    천만의 말씀을요... 제가 고맙습니다. 이참에, 해당 글을 쓰라고 글감을 내어주시고 고무해주신 <슬로우뉴스> 동료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rock bogard 2012/07/20 19:30 # 답글

    쓰신 글이 그리 어려운 글은 아니건만....
  • deulpul 2012/07/29 15:51 #

    내용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겠지요.
  • 민노씨 2012/07/25 01:23 # 삭제 답글

    블로그에서도 긴 글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는데, 그게 참 아쉽습니다.
    deulpul 님의 자유롭고, 사색적이며, 격조있는 블로깅이 저에게 많은 위로와 영감을 주는데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추.
    이런 취지로 댓글에 대해 그런 코멘트를 주셨던 것이었군요. : )
    deulpul 님 글은 더 길어져도 길어지는 만큼 생각할 거리가 있으니 좋습니다. ㅎㅎ
  • deulpul 2012/07/29 15:54 #

    하지만, 역시 긴 글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남에게 읽히기를 바란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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