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일 몸이 심히 번열하니 섞일雜 끓일湯 (Others)

<양산백전>은 중국 설화를 근간으로 한 국문 고전 소설로, 작자와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채 전해진다. 중국의 총명한 젊은 남녀(라고 하지만 실은 청소년) 양산백과 추영대가, 공부하라고 보내 놨더니 저희들끼리 좋아져서 사고를 치며 벌이는 이야기다. 애정 소설이지만 스케일이 엄청나다.

영대의 부모는 이 무남독녀 외동딸에게 남자애 옷을 입히고 아들처럼 길렀다. 영대는 절에 공부하러 가서 비슷한 연배인 산백을 만나 형제처럼 지냈는데, 이놈이 영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영대도 산백을 좋아하긴 하지만, 부모의 허락 없이 사사로이 정을 맺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백이 자꾸 덥치려고 하는 통에, 이러다가 큰일나지 싶어서 부모에게 허락을 받을 심산으로 산백에게 이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집에서 영대의 부모는 다른 좋은 집안 아들과 혼인을 내정해 두었다. 의리와 효도의 갈림길에서 진퇴양난에 처한 소녀 영대는 번민하고, 이 소식을 들은 산백은 영대를 잊지 못해 상사병이 들어 시름하다가, 영대가 시집으로 가는 길목에 묻어달라고 당부하고 죽는다. 영대가 산백의 무덤을 지날 때 무덤이 쩍 갈라지고, 그 속으로 영대가 뛰어들어 사라지며, 어이없는 제3의 피해자가 된 신랑은 기가 막혀서 이 두 시신을 떼어놓기 위해 기를 쓴다. 나중에 영대와 산백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다시 만나 사귀다가 하늘의 배려로 부활하여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코믹한 부분도 있고 애절한 부분도 있는데, 더운 여름날 슬슬 읽어보기에 괜찮다. 그 중 앞부분 일부를 옮겨 온다. <한국문학총서>에 실린 경판본이며, 어려운 옛말 중 일부는 지금말로 바꾸었다. (내가 초도 좀 쳤다(회색 괄호 부분).)


(전략)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 양산백의 나이가 10세(...)가 되니 기골이 준수하고 총명이 특이한지라. 하루는 아버지가 산백을 불러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서(詩書)를 모르면 담벼락을 향해 선 것과 같으니라. 내 듣자니 운향사란 절이 들어가 공부하기에 가장 유명하다 하니, 3년을 기한하여 그곳에 가서 공부하라."

하거늘, 산백이 아버지 명을 받들고 즉시 책보따리를 꾸려 운향사로 향하니라.

한편 평강 땅에 추이란 사람이 딸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이 양대라. 기질이 조용하고 그윽하며 지혜가 뛰어나고 슬기로와 부모가 지나치게 사랑하여 항상 남자애 옷을 입히고 시서를 가르치며 남자애들과 사귀도록 하였다. 하루는 (아들 같은) 딸 양대가 생각하되

'남녀를 가리지 않고 고금을 통달치 못하면 어리석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아버지께 고하여 가로되

"듣사온즉 운향사는 깊은 산속에 자리잡아 인적이 드물다 하오니 한번 구경하고 그곳에 머물러 공부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아버지가 딸의 말을 듣고 기특히 여겨 허락하고 당부하여 가로되

"공부를 착실히 하여 속히 돌아오라."

하니, 양대는 명을 받들고 즉시 행장을 꾸려 운향사로 향했는데, 이 때 양대의 나이는 꽃다운 13세(...)라.

시중드는 아이 하나만을 데리고 천천히 걸어 경치를 감상하며 절 문에 이르니, 문득 앞에 한 동자가 푸른 옷을 입고 손에는 흰 깃털이 달린 부채를 쥐고 유유히 오더라. 동자가 양대가 오는 것을 보고 크게 반겨 나아가 절하며 말하기를

"공자는 어디로 향하며 존명은 무엇이뇨?"

양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평강 땅 추상서의 아들 양대이어니와 그대는 뉘라 하느뇨?"

산백 왈

"나는 남양 땅 양상서의 아들 산백이노라."

하였다. 서로 오래 사귄 듯 정이 들고 친해져서 문답하며 절에 들어가, 후미진 방을 얻어 둘이 함께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어느 날 산백이 한담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연히 상봉하여 정이 지극하매, 종신토록 잊지 않음이 어떠하뇨?"

양대가 웃으며 가로되

"진실로 그러할진대 천지신명께 맹세하여 언약을 정함이 마땅하다."

하고, 두 사람이 부처님 앞에 분향축원하여 (의형제로) 사생결약한 뒤에 서로 옷을 바꿔 입으니, 이로부터 서로의 우애와 중히 여김이 비할 데 없더라.

이럭저럭 유월(양력으로는 7, 8월이겠지), 찌는 듯한 여름이 되어 날씨가 불을 때듯 더우매, 두 사람이 법당 뒤 종마루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며 글을 지어 긴 문답을 나누다가, 산백이 양대더러 왈

"금일 몸이 심히 번열하니(오늘 몸이 무척 뜨거우니) 봉한폭포에 가서 목욕함이 어떠하뇨?"

양대 왈

"나는 본디 병이 있어 목욕하지 못하니 형이나 홀로 감이 무방하도다."

산백이 웃으며 가로되

"그대는 장부가 아니로다. 우리 정이 태산 같으매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 하는 게 옳거늘, 어찌 형은 소홀히 말하느뇨."

하니 양대는 마지못해 함께 가긴 갔으되 다른 쪽 폭포에 가서 손발만 씻는지라. 산백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제가 만일 남자라면 어찌 함께 목욕하기를 꺼려하리오. 이는 가장 수상한 일이로다.'

하고, 목욕을 마치고 두 사람이 서당에 돌아와 글을 읽더니, 문득 까치가 소나무에 앉아 두 사람을 향해 울거늘, 산백이 가로되

"까치는 계집의 정령이라. 우리 두 사람을 상대하여 우짖노니 이것은 불길한 징조로다."

양대 왈

"내 뜻도 또한 그러하니 형은 얼른 돌을 던져 까치를 치라."

하거늘, 산백이 즉시 돌을 들어 한 번 던진즉 그 까치 맞아 땅에 떨어지는지라. 양대가 신기하게 여기는데, 또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거늘, 이번에는 양대가 돌을 던진즉 까치는 맞지 아니하고 달아나더라. 산백이 조심스럽게 보니, 양대가 돌 던지는 품이 남자의 거동이 아니거늘, 이때로부터 저절로 황홀하여 어쩔 줄 모르더니, 날이 뉘엿뉘엿 지자 양대에게 가로되

"내 그대를 아무리 보아도 여자의 태도가 많으니, 마땅히 오늘 밤에 인연을 맺어 백년 동락함이 어떠하뇨?"

양대가 크게 웃으며 가로되

"형이 어찌 나를 여자라 하느뇨. 내 본디 기질이 유약하므로 여자와 흡사하거니와, 그대 말이 가히 실성한 사람이로다."

산백이 미소지으며 가로되

"내 그런 줄도 모르고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

하였으나, 마음에 반신반의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리더니, 이윽고 양대가 깊이 잠들거늘 산백이 가만히 가서 가슴을 열어 만져본즉, 설부옥골(雪膚玉骨, 눈 같은 살결과 옥 같은 뼈)이 과연 여자 분명한지라. 산백이 크게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마음을 진정치 못하더니, 이윽고 산백이 자기 옷을 벗고 (아니 이 자식이) 침소에 나아가 양대를 깨워 가로되

"날씨가 심히 훈열하니 그대 옷을 벗고 나와 함께 잠이 좋을까 하노라."

양대 웃으며 가로되

"내가 평소에 옷을 벗지 아니하고 자는 줄을 형이 이미 아는 바이거늘, 금일 홀연히 뜻밖의 말을 하느뇨. 부질없는 말 말라."

한대, 산백이 생각하되

'내 마땅히 생각을 밝혀 너의 뜻을 살피리라.'

하고 가로되

"우리 두 사람은 하늘이 이미 정하신 바이어늘 (누구 맘대로), 그대 거절코자 하여 나를 자꾸 배척하려 하니 당초 언약한 뜻이 어디 있느뇨." (그런 뜻으로 언약한 게 아니잖아)

양대가 길게 탄식하며 말하되

"내 그대를 저버릴 뜻이 없거늘, 그대 이렇듯 함은 필시 나를 업신여김이로다."

하며 매우 불쾌한 기색을 짓는지라. 산백 왈

"내 그대를 위하여 언약을 배반치 아니하고자 함이어늘, 도리어 그대 나를 질책하니 애닯기 그지없도다."

한대, 양대는 대답하지 아니하고 일어나 글을 읽더니, 이윽고 밤이 깊어지니 두 사람은 각기 잠이 들더라.

산백이 아무 생각없이 곯아 떨어져 깊은 잠이 들자 양대는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생각하기를

'내 이제 무단히 집으로 돌아가면 의롭지 못한 일이 될 것이요, 가지 말자 한즉 이렇듯 나를 핍박하려 하니 진퇴양난이라. 만일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가 나를 생각하여 병이 들고 죽을 것이니 (얘도 좀 이상해...) 나로 말미암아 장부에게 액운을 끼친다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지라. 그러하나 여자의 몸이 되어 사사로이 남자를 좇으면 후세에 꾸지람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차라리 돌아가 부모님께 이 사연을 고하여 승락을 얻고 인연을 맺음이 옳다.'

하고 이에 벌떡 일어나 책가지 등을 챙겨 심야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이별시를 지어 벽에 쓰고 나오니라.

이때 자빠져 자고 있던 산백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노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양공자는 무슨 잠을 자느뇨. 하늘이 맺어 준 그대의 배필이 지금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도다."

하고 문득 간 데가 없거늘, 놀라 깨어나니 그저 꿈이라. 급히 일어나 양대 (누나)가 누웠던 자리를 살펴본즉 과연 사람 그림자가 없는지라 정신이 혼미하여 떠돌며 생각하되

'지난 밤 내가 핍박하였기 때문에 가버렸도다.'

하고 책상에 기대어 보니, 벽에 그전에는 없던 글이 붙어 있거늘, 황급히 나아가 살펴보니 양대의 필적이라. 정신이 더욱 혼미해져 자리에 누워 심사를 다스리지 못하더라. (후략)


누나를 꼬시려던 장면은 여기서 끝나고, 세월이 흘러 이듬해 봄이 되도록 양대는 소식이 없고, 산백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겨우 살아가다가 이윽고 꿈에서 계시를 받고 양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산백의 앞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후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니, 궁금하신 분들은 이 더운 여름, 몸이 심히 번열하여 불면으로 전전반측하지 마시고 직접 읽어보시되 되도록 원본에 가까운 글을 택하여 국한문 혼용체의 그윽한 맛을 향유하시라.

 

덧글

  • hopi 2012/07/18 15:53 # 답글

    제가 예전에 중국에서 월극으로 보았을 때는... 수려한 양산백에게 반한 축영대가 자기가 여자인 것을 계속 암시하는데도 불구하고 눈치없는 양산백이 전혀 알아채지를 못했었어요. 그래서 몸이 달은 축영대가 막 연못가로 데려가 물을 들여다 보면서 사형, 저 물 안에 아름다운 여인이 보이지 않습니까... 막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려 결국 양산백의 마음을 얻어낸 다음, 부모의 허락을 받겠다고 튕기고 고향으로 갔었거든요. 결국 양산백이 시름 시름 앓다 죽는 장면에서 저와 동행이 "어쩌다 그런 어장관리녀에게 걸려서..."하고 한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판본이 달라서 내용이 조금 다른가봐요.
    올리신 부분이 나름 감칠맛이 있네요. 한 번 구해 읽어봐야겠습니다. ^^
  • deulpul 2012/07/19 03:42 #

    중국 설화를 소재로 하여서 그런지, 중국에서 극으로도 공연되고 있었군요. 보신 월극판 내용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고전 소설판에서도 영대가 연애와 결혼을 대하는 부분에서 옛 여성으로는 파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식을 보입니다만, 월극에서는 좀더 노골적이군요... 한편 "사형, 저 물 안에 아름다운 여인이 보이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들은 산백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하기로 결심하는데...
  • 2012/07/19 20:3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20 09:5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29 08:2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29 16: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29 16:3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29 17: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29 18:4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편도 2012/07/20 14:56 # 답글

    포스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무덤을 열고 나와서 데려가는 모티프는 비극적인데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가 포스팅으로 보니 왜 이리 재밌는지 모르겠네요. 함께 공부하던 남장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여성인 것을 눈치채는 이야기는 아직도 흥미진진하게 활용되는 것 같아요.

    제주도 신화 자청비 이야기도 남장여자 모티프+연애담까지는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다만 남편이 다른 여자랑 결혼할 뻔하자 숯불 위에 올라간다든지 생명꽃을 가져온다던지 하는 고생을 치르고 결혼하고요(물론 화가 나서 중간에 남편 눈을 바늘로 찌릅니다 -_-;;).

    농담입니다만, 여자건 남자건 결혼을 힘들게 하면 신이 되나 봐요(...).
  • deulpul 2012/07/20 18:11 #

    저도 재미있게 보면서, 현대극으로 발전시켜도 아주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귀신과 헤어지지 못하는 애달픈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흡사한 영화 <사랑과 영혼>이 공전의 히트를 하였지만, 그보다 훨씬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대가 친구(남친?)에 대한 신의와 부모에 대한 효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좀 거창하게 말하면 안티고네의 갈등에 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주도 신화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네요.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물론 화가 나서 중간에 남편 눈을...'이라고 쓰신 부분에서 '물론'이 아주 의미심장하군요... 하하.
  • 민노씨 2012/07/25 01:39 # 삭제 답글

    "국한문 혼용체의 그윽한 맛" ㅎㅎ
    읽을까 말까 하다가 deulpul 님 글이라 믿고 읽었는데, 정말 재밌네요.

    "우리가 우연히 상봉하여 정이 지극하매, 종신토록 잊지 않음이 어떠하뇨?"
    이런 표현들은 정말 감칠맛이 있네요.

  • deulpul 2012/07/29 16:18 #

    저건 도입부고 진국은 이제부터인데, 이 글 쓰고 나서 인터넷 서점들을 찾아보니 원문으로 된 책이나 원문을 병기한 책은 별로 없는 것 같네요.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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