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레 아쉬운 번역서의 오역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지난 겨울, 잠깐 서울을 갔을 때 종로를 지나다 영풍문고에 들어갔다.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서 정겨웠다. 관심 있는 서가들을 지나다, 내가 열심히 읽고 있던 책의 번역판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피도 있고 값도 비쌌지만,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 책을 샀다. 책 욕심에 더하여, 나에게 중요한 분야의 책이기도 했고, 하다못해 각종 개념의 번역 용어에 익숙해지기만 하더라도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책은 짐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 며칠 뒤에 원서를 펼쳐 서문 전체, 그리고 본문 몇 군데를 무작위로 골라 번역판과 대조해 보았다.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잠깐 보는데도 오역이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우리말' '매끄러운 문장'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원저에 실린 문장들이 명백하게 한국어로 잘못 옮겨진 사례가 여럿 나왔다.



예를 들어보자. 위 그림은 이 책의 원저자(편집자)가 쓴 서문을 옮긴 번역본 맨 앞 두 쪽이다. 오역이나 부적절한 옮김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의 부모는 잭을 잘못 키워온 것으로 판단했고 이 때문에 잭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부모가 자신을 잘못 키웠다고 하니, 그게 정신적 충격이 되었다는 말인가?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좀 기대하기 어려운 논리다. 원문을 보면 "Jack's parents decided they had raised him wrong and he was psychologically damaged"라고 되어 있다. 잭의 부모는 잭을 잘못 키웠으며 애가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잭은 부모의 결정에 대해 또래의 10대들이 웹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개인 저널(personal journal)에 감정을 쏟아냈다.

원문은 "Jack responded by doing something other teens have for years: He poured his emotions into a personal journal"이다. 10대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방식, 즉 자신의 느낌을 일기장에 털어놓는 방식으로 부모에 대응했다는 말이다. 웹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블로그가 주제인 것 때문에, 지레짐작하여 이렇게 번역한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옮기면, 그 뒤의 원문에서 "However, this journal was a blog on his MySpace.com website... (그러나 그의 일기가 마이스페이스닷컴 웹사이트에 개설된 블로그라는 게 문제였다...)"라고 서술한 것과 어울리지 않게 된다.

그는 부모에게 고통을 주려고 자살도 생각했고,

지독한 친구로구나. 자살을 함으로써 부모에게 고통을 주려 하다니. 하지만 남에게 고통을 줄 목적으로 죽으려는 것은, 없는 일은 아니더라도 좀 드물지 않겠는가. 원문은 "He raised the idea of suicide and of harming his parents..."다. 두 개의 of가 모두 독립적으로 the idea에 걸린다. 즉 죽을 생각도 했고 부모를 해칠 생각도 했다는 말이다. 그래도 끔찍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잭이 캠프로 떠나기 전에 올린 글은 웹을 통해 널리 알려져

원문은 "Within one day of Jacks last precamp post, his story began spreading through the blogosphere..."다. 마지막 글을 올린 지 하루만에 블로고스피어에 사연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사태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는 게 핵심 맥락이 되는 부분이므로 '하루만에'는 중요한 부분인데도, 별다른 이유 없이 누락됐다.

우선 마이스페이스를 이용하는 잭의 친구가 그의 글을 보고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에게 블로그로 이 사실을 알렸다.

블로그로 어떻게 알리나? 블로그에 뭘 쓰면 세상에 알리는 셈이 되긴 하지만, 누가 와서 보지 않는다면 말짱 꽝이고 게다가 특정 상대를 찍어서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원문은 "First, a fellow MySpace blogger from Jack's home state saw his blog, passed the information along to gay and lesbian activists there and wrote about Jack's situation on his own blog"다. 잭의 친구가 아니라, 마이스페이스를 쓰는 같은 주의 다른 블로거 누군가가 잭의 글을 보고 동성애 활동가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며, 블로그에 글도 썼다는 말이다. 분명히 다른 두 가지 행동을 하나로 묶어 버렸다.

결국 인도의 한 뉴스 웹사이트에도 등장했다.

이것은 미국 한 구석에서 벌어진 일이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점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원문은 "and it appeared, among other places, on a news website in India"다.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뉴스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번역문은 인도에만 한정함으로써, 세계 여러 곳에서 뉴스가 되었다는 원필자의 취지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활동가 그룹의 시위로까지 조직화된 것에는 불편해했고,

원문은 "unhappy about being co-opted as a "cause" by activist groups"다. (자신이) 활동가 그룹들의 시위거리로 끌어들여진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혼란스러운 반응과 함께 일부 공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에는 격한 감정을 나타냈다.

'격한 감정'이란 느낌의 내용이 아니라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격하게 기뻐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다. 원문에는 "He is angry about the whole experience"라고 하여, 이러한 '격한 감정'이 분노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런 명확한 부분을 모호하게 하여 번역한 것은 옳지 않다. 그 앞부분도 "He was upset about the media coverage but, to some degree, sympathetic"이라고 되어 있다. upset은 혼란스러운 것보다 훨씬 더 느낌이 강한 말로, 화나거나 속상하다는 뜻이다. 언론 보도에 속이 상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는 말이다.

이상의 사례 중에는 트집을 잡기 위해 잡아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글을 옮길 때, 더구나 독자에게 돈을 받고 팔 책으로 옮길 때 원문의 뜻이 보존되도록 엄밀성을 기해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번역을 흔히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사실 창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 --- ** ---


번역서의 오역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만 갖고 나무라는 것은 좀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을 정하고 서둘러 내는 베스트셀러들은 그렇다치고, 이건 논문들을 묶은 학술 서적 성격의 책이다. 번역자는 해당 분야 전공자이며 현직 교수다. 문학 작품이라고 대충 번역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전문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 서적은 번역에 더욱 공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번역이 사회적 평가로나 금전적 보상으로나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데 근본 문제가 있을 것이다. 번역이란 남의 글을 펌질해서 긁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더라. 번역은 지식과 문화의 민주성과 관련되는 문제다.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제대로 된 번역이 폭넓은 분야에 존재해야 일반 시민이 외국어로 된 지식과 문화를 제대로 향유할 수 있게 되고, 전체적인 문화적 에너지도 증대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학문과 문화 활동이 꽃피기 위해서는 한국어로 잘 옮겨진 번역물이 있어야 한다. 번역판이 없으면 한국인 대부분에게 그런 책이나 사상이나 학문적 성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번역자가 잘못 번역해 두면 한국인 모두가 그렇게 잘못 알게 된다.

번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크게 달라져야 하겠지만, 번역자들도 전문 번역가든 일시적으로 번역에 참여하는 사람이든 좀더 장인정신을 가졌으면 싶다. 출판사들은 대충 날림으로 책만 만들어 돈 벌 생각을 하기보다, 제대로 된 번역가를 키워내는 방안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번역할 때 기억해 두면 좋은 말이 있다. 문장은 생각을 풀어내는 도구다. 나라와 언어에 따라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생각이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게 글과 문장이라는 사실은 대체로 동일하다. 퍼즐 같고 미로 같은 원문 문장들도 분명히 생각의 논리적 구조 위에서 쓰인 것들이다. 우리말로 옮겨 놓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거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면, 원문의 논리를 제대로 쫓지 못한 것이다. 결국 어딘가 분명히 틀린 번역이 되는 것이다. 또 번역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단어만 한국말로 바꿔 늘어놓아도 마찬가지다.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옮긴 것을 독자가 이해할 리 없다. 번역자는 옮기기 앞서 먼저 이해하여야 하고, 그래서 번역이 어려운 것이다.

 

덧글

  • ckins 2012/07/30 12:29 # 삭제 답글

    원생들 시킨 모양이군요. ;-) (어쩜 학부생일지도)
  • deulpul 2012/07/31 14:09 #

    예전엔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저 책이 그랬다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 2012/07/31 03:2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31 14: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31 16: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8/02 03: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8/02 07: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8/03 14:2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8/04 04:1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8/06 15:3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7/31 06:2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2/07/31 14:22 #

    세상은 좁디좁아서, 틀림없이 책을 알아채는 분이 있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상까지 받은 책이었군요... 하지만 오역이 일부 있더라도 번역판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문학 작품이 아닌 전문 서적은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네요.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