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부족증 만연 시대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지역 신문에 독자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 주는 짤막한 칼럼이 실린다. 이 신문의 제작진 중 한 명이 쓰는 것 같지만, 필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익명 칼럼이다. 여기에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3주째 꼬리를 물고 있다.

맨 처음은 한 독자가 '왜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냉담할까요?' 하는 고민을 보낸 데서 시작됐다. 다음은 요약.

독자 1: 저는 사람을 판단하는 안목이 있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요즘 이를 좀 의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인간 관계가 영 엉망이 되고 있거든요.

저는 누구랑 사귈지 까다롭게 고르는 편입니다. 그래서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점심이나 함께 하자고 어렵게 말하죠. 이렇게 딱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그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 또 나를 알리기 위해 달려들게 됩니다.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면서 친밀도가 깊어지고요. 이렇게 다른 동료 인간을 만나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깊은 관계가 흔들리고 있어요. 제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몇몇이 은근히 냉담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한 사람은 내가 보내는 이메일의 절반 정도에만 답장을 하는데, 이거 정말 가슴 아파요. 또 다른 사람은 저도 잘 아는 친구들과 파티를 하면서 나를 부르지도 않았어요. 저는 이 그룹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도 말이지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니, 제가 제대로 판단을 하는 사람인지 의심이 듭니다. 저는 저랑 친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도록 아주 조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조차 나에게 실망을 주게 되니, 저는 제가 생각하는 만큼 사람들의 속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던가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당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매우 높은 기대를 걸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자신을 재앙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준비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당신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누군가와 함께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추구한다면, 번번이 실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봐야죠. 게다가 당신이 관계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그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온건하게 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는지 제가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좀 필요해요. 언제 점심이나 함께 할까요?

인간 관계, 참 어렵지. 1차 방정식이라 할 수 있는 '혼자 세상 살기'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이라는 미지수가 하나 더 개입되면 갑자기 2차, 아니 3차, 4차 방정식으로 꼬이기 시작하여, 그 해법의 난이도가 몇 배로 올라가게 된다.

이런 문답이 실린 다음주에 다른 독자가 칼럼니스트의 답변에 대해 항의를 해 왔다.

독자 2: 지난주 친구 관계를 놓고 고민하는 독자에게 당신이 준 답변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독자는 '다른 인간을 만나 깊은 관계를 갖는 것'에 가치를 두었고, 하지만 친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은근히 외면하는 데 대해 고민하고 있었잖아요.

당신은 그 독자가 인간 관계에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비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은 진정한 친구를 갈구하지만 동시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기를 두려워합니다. 당신은 답변에서, 질문자가 친구 부족증에 시달리면서도 친구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한다고 비난했군요. 창피한 줄 아세요! 아마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친구들에 늘 둘러쌓여 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다 그런 건 아니라구요.

저는 친구가 없다거나 별로 멋진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서 가면을 쓰고 살아요.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할머니가 되어 죽을 때, 침대에서 "그동안 점잖게 인간 관계를 풀어와서 다행이야" 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좀더 적극적이고 멋진 사람으로 살아 왔더라면 좋았을 걸" 하게 될 것 같아요.

답변: 지난주의 독자에게 좀더 온건하게 인간 관계에 접근하라고 조언하면서 똑똑한 칼럼니스트인 척 하려고 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가 인간 관계에 너무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이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그게 올바른 대답인 것으로 생각되었죠.

이제 당신이 저 개인에 대해 지적을 했기 때문에, 저 자신도 다른 누구나처럼 친구 부족증에 시달리는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게다가 말이죠. 이렇게 익명으로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는 친구를 사귀기가 도통 쉽지 않단 말이에요. 이를테면 저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더라도, 당신에게 제가 누구인지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솔직한 마음가짐을 갖고 세상에 나아가 수많은 좋은 친구를 사귀어 보라고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 보고 제게 또 편지를 써 주세요. 그러면 저는 최소한 당신 경험을 통해 대리만족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신이 필요한 만큼 친구가 많은 사람이 어디 그렇게 흔하랴. 독자도, 칼럼니스트도 모두 친구 부족증이다. 그러니 정답은 역시 적극적인 태도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늘 남에게 다가서려다 외면당할 일을 먼저 두려워하고, 그래서 다가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관계에 소극적이면 죽을 때 후회한다. 내가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럴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독자 2의 deathbed(임종) 상상은 설득력이 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으로 무슨 짓을 하면,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나도 조금은 안다. 그래도 그런 짓을, 회사가 시켜서든 제가 좋아서든 하는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3주차에는 이 주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짤막한 문답이 실렸다.

독자 3: 당신은 지난주에, 익명으로 신문에 칼럼을 쓰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 사귀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적이 있죠? 저처럼 익명으로 친해지고 친구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언제 한번 만날까요?

답변: 저도 당신을 만나고 싶지만, 제게 가장 이상적인 익명의 만남은 이메일을 통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aaa@bbb.com 으로 이메일을 보내 내 귀에 속삭이는 게 어때요?

이 문답은 이렇게 뭔가 고삘스러운 양상으로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다. 그런데 하긴 청소년 때만큼 친구 관계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거나 속상해 하는 때도 없는 것 같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혹은 졸업 직후에 받은 편지들(보낸 건 나에게 없으니까)을 뒤적여 보면, 나와 나의 친구들도 서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안타까워했음을 잘 알 수 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또 누구나 어른이 되면 친구 관계, 인간 관계에 대한 집착 대신 돈을 벌거나 성공하는 데 대한 집착으로 살게 되거나, 혹은 그렇게 돈을 벌거나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친구 관계에 집착하며 살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성인임이 분명한 위 칼럼의 질문자들이 인간 관계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게 나이랑 상관없이 여전히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게다가 혼자 일하고 혼자 노는 세상이 되어 가면서, 좋은 친구 만나 함께 울고웃고 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임시직이나 비정규직 형태의 고용 일반화로 직장 동료끼리의 유대감도 약해지고, 노동조합에서처럼 끈끈한 피로 뭉친 동지감도 슬며시 희석되어 간다. 세상은 당분간 좀더 외로워지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친구 부족증 만연 시대. 수백 명, 수천 명의 '페친' '트친'이, 화나면 쥐어박고 기쁘면 얼싸안을 수 있는 피와 살이 있는 실제 3D 친구를 대신해 줄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저 칼럼니스트가 마지막에 쓴 이메일 주소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이 칼럼에 투고할 수 있도록 제공된 회사 이메일이다. 구태여 저렇게 밝히지 않아도 늘 앞에 걸려 있는 것. 농담을 섞어 유머러스하게 마무리를 한 것이지만, 만나자는 사람을 놓고 익명으로 우물쭈물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그것이나 진배없을 듯싶다.

 

덧글

  • 차우진 2012/08/29 12:01 # 삭제 답글

    세상은 당분간 좀더 외로워지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 구절 마음에 드네요 ㅎㅎ
  • deulpul 2012/08/29 13:44 #

    하지만 그 내용은 영 섭섭하기 짝이 없지요...
  • lump3n 2012/08/29 14:28 # 삭제

    저도요~
  • mesafalcon 2012/08/29 18:03 # 삭제 답글

    글을 읽으면서 질문이 하나 떠오르는구요. 진정한 친구란 무엇일까요?
  • deulpul 2012/09/04 07:11 #

    글쎄요, 그건 참 말로 설명하기 곤란하고, 뭐라고 쓸 수는 있겠지만 상투적인 말밖에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 난난 2012/08/29 22:34 # 답글

    저도 요 몇 년 간 친구란 게 뭔가, 친구 사이에 올릴 수 있는 화제란 건 뭔가 고민해 와서 포스팅 내용이 절실하게 와 닿네요. 첫번째 칼럼의 질문자는 정말 저 같아요. 저도 친구를 어렵게 고르고 높은 기대치를 가졌다가 그애들이 떨어져나가는(...) 경험을 했거든요... 나름 부담줄까 봐 제가 그애들을 좋아한다는 티도 얼마 안 냈는데도 말이지요. 이쯤 되면 너무 좋아하는 티를 안 내서 떨어져나간건지 본문처럼 부담돼서 떨어져나간건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해지고, 그래서 다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하는데, 이렇게 여유 없는 사람들이 남이 자신에게 기대오는 건 또 달가울 기력이 없고, 서로 그런 걸 또 아니 아예 입을 다물고.. 그래서 점점 친구 만들기 힘겨워지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어렸을 적에는 '어른이 되면' 안정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죽을 때까지 그게 쭉 갈 줄 알았어요. 순진했었죠 ㅎㅎ
  • deulpul 2012/09/04 07:11 #

    참 답이 없죠. 너무 좋아하면 부담스럽다고 하고, 티를 안 내면 좋아하는 줄 몰라서 떨어져 나가고... 이건 본인의 성격과 상대방의 성격에 따라 아주 다양한 조합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서, 보편적인 답이 존재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경우는 저보다 나이 많은 쪽으로 친구가 된 사람들은 저를 잘 챙겨준 분들이고, 저보다 나이 적은 쪽으로 친구가 된 사람들은 저에게 잘 엉겨붙은 사람들인데요. 보시다시피 모순된 행태를 가지면서 좋은 분들을 만나 왔습니다. 엉겨붙는 사람들을 좋은 친구로 사귀면서, 저 자신은 엉겨붙지 못하는 식의... 여하튼 어떤 방식으로든 올인하는 태도는 일단 좀 경계해야 하지 않은가 싶기는 합니다. 하지만 역시 정답은 없군요.
  • 2012/08/30 00: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9/04 07: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9/04 07: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9/08 07:2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9/08 07:4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아저씨 2012/10/05 13:20 # 삭제 답글

    저의 유치원다니는 딸의 요즈음 고민을 어른들도 똑같이 하고 있군요.
  • deulpul 2012/10/05 23:34 #

    위에선 고등학생이라고 썼지만, 말씀대로 친구 관계로 걱정하거나 속상해 하는 일은 훨씬 더 어릴 때로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초등생 명랑 소년도 그랬다는 설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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