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스의 한이 서린 곡물 퀴노아 섞일雜 끓일湯 (Others)



추석을 하루 앞둔 9월29일 토요일, 이곳의 해 지는 시각은 오후 6시42분, 달 뜨는 시각은 6시25분이었다. 한쪽에서 해가 넘어가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달이 떠올랐다. 산이 없는 도로를 달리다 보니, 오른쪽에는 지는 해 때문에 먼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왼쪽에서는 석양의 반사광 때문에 어린 은근한 붉은 기운 속에서 달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이 달, 그리고 하룻저녁의 모임을 빼면 추석이라고 별 거 없었다.

모임은 각자 적당한 음식을 준비해 오는 팟럭으로 했다. 한 동료가 퀴노아가 들어간 샐러드를 가지고 왔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여러 모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식품이다.

퀴노아는 남미 안데스 산맥 주변에서만 생산되는 곡물이다. 주 생산국은 페루와 볼리비아이고, 주변국인 에콰도르나 콜롬비아에서도 좀 난다. 곡물이라고 했지만 벼, 보리, 밀, 옥수수, 귀리 등을 포함하고 있는 벼과 식물이 아니라 비름과에 속한다.

내가 세상에 이런 곡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식품점 홀푸즈에서 포장된 채 팔리는 퀴노아를 본 뒤부터이다. 나중에 관련한 정보를 찾아보았는데, 남미 주민의 한이 서린 흥미로운 식량임을 알게 되었다.

남미에서 퀴노아를 먹기 시작한 것은 5천 년 전부터라고 한다. 척박한 안데스 산지의 황무지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곤궁한 삶을 사는 이 지역 주민에게 오랫동안 소중한 식량원이 되어 왔다. 안데스 지역 주민에게 퀴노아는 감자 다음으로 널리 섭취되는 식량이다. 볼리비아의 산간 마을 두 곳에서 벌인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주민의 40% 가까이가 바로 전날 다양한 방식으로 취사한 퀴노아를 먹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에게 쌀이 밥이듯, 이들에게는 퀴노아가 밥인 셈이다.




퀴노아가 자라는 땅은 사막이나 다름없는 척박한 곳이다. 이 식물은 물이 충분하지 않아도 잘 자라고 산지의 추운 기온도 잘 견딘다. 토지 속의 유기물이 1%에 지나지 않는 모래 사막에서도, 연중 60%의 날에 서리가 내리는 곳에서도 자라난다. 오랜 기간 메마른 토양에 적응해온 덕분이다. 여느 작물이 자라기 힘든 환경에서 쑥쑥 자라는 퀴노아가 있다는 것은 페루나 볼리비아 주민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혹한 날씨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것말고도 퀴노아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다른 곡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탁월한 영양소가 그것이다. 이 곡물은 아홉 가지 필수 아미노산이 포함된 단백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14%). 철분, 마그네슘, 포타슘, 칼슘 같은 무기질과 비타민도 풍부하며 섬유질도 양호하다. 건강한 식단에서 회피하려는 대상이 되는 글루텐과 콜레스테롤은 들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미국 과학아카데미는 퀴노아를 '세상에서 가장 영양이 뛰어난 곡물'로 부르기도 했으며,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오랫동안 지구를 떠나 있는 유인 우주선에서 사용할 식량으로 지정하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퀴노아가 엄마 몸에서 나오는 모유를 대체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바도 있다.

이 정도면 척박한 산지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남미 주민이 퀴노아를 주식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안데스가 허락한 축복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잉카 제국 시대에 퀴노아는 '모든 곡물의 어머니'로 불리며 신성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남미를 쳐들어와 잉카를 무너뜨린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이 곡물에 결부된 고유 문화를 제거하기 위해 퀴노아 재배를 억압하거나 금지하고 대신 밀을 재배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퀴노아는 단순히 영양이 뛰어난 곡물의 한 종류가 아니라, 남미의 정체성을 간직한 문화적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고된 여성 노동을 거쳐 생산되는 작물

이런 과거사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 정도만이었다면 '한이 서린 식량'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퀴노아에 대해 찾아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진 것은 두 가지 이유가 더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 곡물이 생산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 시대에 벌어진 제국주의적 침탈과 비슷한 일이 오늘날에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험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영양이 풍부한 곡물이지만, 그 생산 과정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아직까지 퀴노아는 산업화를 통한 대량 생산 방식이 성공하지 못한 작물이다. 이것은 퀴노아가 생산되는 곳이 대부분 가난한 산지 지역이고, 작물 자체가 매우 다양한 변종이 있어 수확 시기를 단일화하는 등 표준화하기 어려우며, 토양 등 환경적인 요소도 산업화하기에 곤란하기 때문이다. 산업화는커녕, 수천년 전에 채택된 노동 집약적인 생산 방식이 여전히 그대로 사용된다. 이 곡물을 들판에서 거두어 밥상에 올리는 과정에 투입되는 노동은 거의 모두 여성들의 몫이다. 엄마 젖과 같은 작물 퀴노아는 안데스 산지 여인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 있는 곡물인 것이다.

사람 키만큼 자란 퀴노아에서 씨앗을 솎아내는 일부터 사람 손으로 이루어진다. 탈곡한 퀴노아는 키질을 통해 불필요한 부분을 털어낸다. 다음 단계는 겨를 벗겨내는 정미 과정인데, 껍질을 벗겨내는 이유가 벼나 밀과는 조금 다르다. 퀴노아의 껍질에는 사포닌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그 맛이 매우 쓰다고 한다. 따라서 껍질째 먹을 수가 없다. 이 껍질을 벗기기 위해 철판에 올린 뒤 불을 지펴 약하게 굽는다. 알곡이 뜨거워지면 절구처럼 생긴 돌확에 넣고, 맨발로 올라서서 밟는다. 아주 적당한 정도의 힘을 가해야 껍질과 알곡이 분리되기 때문에, 기구를 쓰지 못하고 발로 밟아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처리한 퀴노아는 바람이 부는 날 멍석을 깔고 반복해 바람을 쐬어 껍질이 날아가게 한다. 정제된 곡식은 두어 차례 물로 씻은 뒤 햇볕에 말려 건조시킨다. 이제야 조리할 수 있는 상태의 퀴노아가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퀴노아를 12kg 정도 생산하는 데 6시간의 뼈빠지는 노동력이 소모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기계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데, 한 보고에 따르면 간이 기계를 적용했더니 6시간의 작업을 7분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지역 주민의 소득이 매우 낮아서 이런 기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작업 대부분은 실외에서 이루어지며, 퀴노아가 수확된 뒤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추운 날씨 속에 진행된다. 퀴노아 처리에 필요한 고된 노동은 안데스 지역 여인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관절염, 허리 통증, 발의 물집 등의 주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고된 생산 과정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것이라고 위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퀴노아를 주식으로 하던 남미 주민은 수천 년 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안데스의 축복, 모든 곡물의 어머니를 서구 국가에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식민지 시대처럼 총칼로 위협하고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총칼만큼, 혹은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경제 논리가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안데스의 축복' 팔고 정크 푸드를 먹는 현지인

퀴노아가 주요한 식량원으로 서구에 소개된 것은 30여 년 전이다. 하지만 이 곡물에 대한 서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최근 10여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유기농과 웰빙 바람을 타고, 영양학적으로 탁월한 곡물 퀴노아에 대한 서구의 관심과 수요는 급속히 치솟았다. 이 기간에 퀴노아의 값은 7배나 뛰었다.

퀴노아의 수요가 늘고 국제 거래 가격이 올랐다는 것은 생산자인 남미 주민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정작 이 곡물을 생산하는 당사자는 이를 섭취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퀴노아 생산이 돈벌이가 되면서부터 남미 국가는 자국이 생산한 퀴노아를 서구에 수출하는 데 주력해 왔다. 현재 남미의 퀴노아 대부분은 선진국으로 수출된다. 볼리비아의 경우 생산한 퀴노아의 90%를 미국 등에 수출한다. 자국 내 퀴노아 물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가격 상승을 의미한다. 또 자유 무역 시스템이 강화되면서 선진국에서의 퀴노아 값은 생산국에서의 그것이나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생산국 주민의 소득으로는 이러한 값을 감당할 수가 없다.

또 돈벌이를 위해 퀴노아 생산량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온가족이 퀴노아 생산에 매달린다. 노동 강도는 강화되었고, 예전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전통적인 식사를 준비할 여유가 없어졌다. 대신 서구의 거대 음식 기업으로부터 들여온 가공 식품을 사 먹는다. 패스트푸드 소비도 늘고 있다. 남미의 젊은 세대는 거친 퀴노아 밥보다 입에 착착 붙는 햄버거에 길들여지고 있다. 완전 식품인 퀴노아를 팔아 번 돈으로 값싼 저질 식품을 사먹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국제 경제 논리는 수천 년 동안 퀴노아를 주식으로 해 왔던 볼리비아나 페루 주민의 식생활을 바꾸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볼리비아의 퀴노아 소비는 34%나 줄어들었으며, 외국에서 들어온 저영양 고칼로리 식품이 보급되면서 비만이 급격히 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페루와 볼리비아 정부는 퀴노아를 전략 식품으로 지정하는 등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뒤늦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러한 경제 논리를 제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서구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들은 총 대신 햄버거를 들고 들어가 현지의 소중한 식량 자원을 빼내 오는 셈이다. 경제력과 과학 기술이 앞선 서구에서 퀴노아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방안을 개발하여 남미 주민에게 보급한다면 많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될 수 있겠지만, 경제 논리는 이러한 일을 허용하지 않거나, 시급한 일로 삼아 관심을 두지는 않을 듯싶다.

유엔은 내년(2013년)을 퀴노아의 해로 지정했다. 영양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까지 고려한 결정임을 읽을 수 있다. 이런 국제 관심이 퀴노아의 생산지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 안데스 산록의 곤궁한 주민들은 당장의 어려운 살림으로부터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잉카의 선조들이 물려 준 고귀한 식량 자원을 뉴욕과 파리의 부유한 이웃에게 실어보낼 수밖에 없을 듯하다.

※ 퀴노아 사진: <포린 폴리시> 1, 2. 퀴노아 생산 과정 사진: Case Study.

 

덧글

  • 2012/10/02 02: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02 08:3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2 22:3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3 14:3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3 22: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5 22:4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5 23:2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6 00: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6 00:3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10 08:4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11 04: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긁적 2012/10/02 03:56 # 답글

    허어. 참. 정말 요즘 세상에서는 돈이 사람을 잡네요. 참 쉽지 않은 문제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deulpul 2012/10/02 08:46 #

    여러 모로 곰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례였습니다. 본문 밑에 링크한 글 중에는 볼리비아에서 퀴노아 경작지를 둘러싸고 지역 공동체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도 있는데,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라는 설명이 있는 것을 보고 세상은 이렇게도 연관되는구나 싶었습니다.
  • 2012/10/02 11:24 # 삭제 답글

    항상 좋은글 감사드려요 별생각없이 종종 사먹었던 퀴노아샐러드에 이런 스토리가 있을줄이야 ..
  • deulpul 2012/10/03 14:18 #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 댕글댕글파파 2012/10/04 11:20 # 삭제 답글

    퀴노아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제 주위에도 우리나라 농부들의 자유경쟁을 바라면서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아 농사를 짓는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며 그런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분이 계십니다.
    미래엔 식량전쟁이라 농업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해도....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짓지 않으면 미국에서 싼 농작물을 사먹으면 된다는 논리를 가지신...
    안타까운 현실이네요.
  • deulpul 2012/10/05 22:46 #

    농업 부문의 보조금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고, 세계적인 농업 국가인 미국도 이 분야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만, 여하튼 식량 문제는 앞으로도 갈수록 중요해질 수밖에 없을 듯해서(온난화 등에 따른 기상 이변은 나의 저녁 밥상에도 알게모르게 다양한 방식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뒤늦은 말씀입니다만 글자체 문제가 해결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뉴욕에서 2012/10/05 03:34 # 삭제 답글

    귀한 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매일 밥에 넣어 해 먹기에 너무 비싸다고 투덜거리기만 했는데, 앞으로 생각날 때 마다 안데스 여인들을 떠올려야겠습니다.
  • deulpul 2012/10/05 22:46 #

    사실 비싸긴 꽤 비싸죠. 제가 사는 주에는 인삼이 많이 생산되고 생산자협회까지 조직되어 있는데, 이처럼 다른 지역에서 현지화하여 생산하는 방식은 연구되고 있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아직 수요가 그 정도는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 소금인형 2012/10/05 18:14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페북에 링크 걸어도 될까요?
  • deulpul 2012/10/05 22:51 #

    네, 물론입니다.
  • afaf 2012/10/07 03:03 # 삭제 답글

    이런 일에도 어떤 분들은 기회와 경쟁, 대가를 말하면서 정당한 현상이라 하겠죠.
  • deulpul 2012/10/10 08:51 #

    세상엔 어차피 서로 다른 아이디어들이 존재하게 마련이겠지만, 그 아이디어들의 뿌리에는 세상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자세에서 서로 다른 시각과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땐 잘못되었다, 틀렸다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안됐다, 딱하다 하고 생각합니다.
  • stonehinge 2012/10/19 09:41 # 삭제 답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deulpul 2012/10/26 14:19 #

    고맙습니다.
  • 꿈동이 2013/06/07 17:48 # 삭제 답글

    내용이 참 감동적입니다.
    제가 쓰는 글에 이 내용 중 객관적인 부분 일부 사용했으면 합니다.
    사진도요.
    고맙습니다.
  • deulpul 2013/06/08 19:39 #

    네, 사진은 저도 끌어와 쓴 것이니 상관없고, 내용은 전재가 아니면 괜찮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