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패배' 다음날의 오바마 미국美 나라國 (USA)

어젯밤(10월3일)의 미국 대통령 선거 토론은 분명히 공화당 후보 밋 롬니의 승리였다. 그는 자신에 차 있었고 적당히 온화했으며 시선은 당당했고 발언은 명확했다. 그런 발언의 내용은 논외로 하고 말이다. 반면 오바마는 대체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공연히 수줍어하거나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말을 부드럽게 이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토론이 끝난 직후 두 사람이 무대에서 가족과 조우하는 장면에서, 롬니는 식솔을 줄줄이 끌어올려 환갑 잔치집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오바마는 마누라 한 명만 달랑 불러올려서 외톨이 독거 노인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더니 왁자지껄하는 롬니네한테 가서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건 그가 현직 대통령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이 장면은 공식 토론이 끝난 직후의 모습이지만, 나로서는 이날 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상징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까지의 롬니가 없었고 이 토론회에 등장한 롬니가 정말 롬니라면, 정치 성향을 떠나 나라도 그를 매력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잘했다. 오바마는 오늘, 토론회에서 과거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인 롬니를 빗대어 '롬니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롬니는 어젯밤, 그리고 앞으로 두 차례 더 벌어지는 토론회를 앞두고 피나는 연습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9월 한 달 중 여드레를 토론회를 준비하는 데 썼다. 9월4일에는 한 참모의 시골 집에 처박혀 사흘 동안 토론회 준비만 했다. 최고 참모들을 모두 불러들인 것은 물론이다. 선거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황금 같은 기간인데도, 선거 운동 일정을 줄여가면서 토론회 준비와 연습에 몰두한 것이다. 첫 토론회 이틀 전인 10월1일에 나온 AP 기사 '롬니, 토론에 대비한 강행군'은 "공화당 후보 밋 롬니가 수요일에 벌어질 대선 후보 토론에서 버벅댄다면, 그건 준비가 부족해서는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1960년, 상원의원 존 F 케네디와 부통령 리처드 닉슨이 맞붙은 대선에서 처음 도입된 텔레비전 토론은 유권자가 후보자들의 정책뿐 아니라 인간됨을 자세히 지켜볼 수 있는 기회로 간주된다.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실제로 표의 향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롬니가 토론회 준비에 매달린 것은, 근소한 차이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바마와의 공개 토론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바마도 토론회에 대비한 연습을 했다. 오바마의 스파링 상대역을 맡은 사람은 2004년 대선에 나왔다가 조지 부시에게 패배한 상원의원 존 케리였다고 한다. 케리는 당시 대선 토론에서 부시를 곤죽을 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결과가 신통치 않은 것을 보니, 임기 4년의 공과를 짊어지고 토론에 나서는 현직 대통령은, 달려드는 도전자를 맞아 수세적인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는 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환상 깨진 뒤 더 값진 지지"

CNN은 토론 하루 뒤인 오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동원해 첫 대선 토론과 그 영향을 분석했다. 화면 밑에 박힌 시리즈 제목은 'Obama's Debate Hangover'였다. 오바마에게는(그보다는 오바마 지지자에게는) 악몽 같은 밤이었을 테니, 다음날 속이 쓰리는 숙취를 겪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숙취를 겪는다면 좋은 해장국집을 찾아 속을 푸는 게 최고다. 그래서 오늘 오바마는 내가 사는 곳에 속을 풀러 왔다. 이곳이 왜 좋은 해장국집이냐 하면, 2004년 선거에서 이 도시의 투표자 80%가 오바마에게 몰표를 준 곳이기 때문이다. 오바마하고는 아무런 연고도 없고 흑인은 7%밖에 안 되는 곳인데도 그랬다. 2008년 선거 때 이 도시의 대학은 오바마를 지지하는 학생 조직 'Students for Barack Obama'의 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였다. 상처 입고 힘들 때는 자신을 잘 챙겨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찾아가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공화당 소속 주지사는 "오바마는 토론이 끝나자마자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곳 중 하나로 쪼르르 달려가서 토론을 망친 것을 만회하려 한다"라고 말했다나. 물론 오바마의 방문은 어젯밤의 토론 이전에 결정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되었다고 하겠다.

오바마는 이곳에 2년 전에도 왔었다. 그 때는 줄만 서고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오늘은 작심하고 입장 시간보다 세 시간 먼저 행사지에 도착했다. 기다리면서 들고 간 책 한 권 다 읽었다. 덕분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연설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모두 합쳐 일곱 시간을 서 있었는데, 오바마의 연설은 30분 남짓이었다. 이것은 너무 손해보는 장사가 아닌가. 하지만, 온몸이 아파서 몸을 뒤틀면서도 즐거워하는 주변의 남녀노소를 보면서, 정치인이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유권자,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정책을 통해 살 만하다는 희망을, 도덕성을 통해 믿을 만하다는 희망을 말이다.

4년 전에는 기대가 매우 높았고, 이제 실망하는 사람도 많지만, 오바마는 여전히 '47%'의 흔들림 없는 지지를 받고 있다. 실망에 대해 말하자면, 이번주에 <타임>에 실린 한 칼럼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4년 전의 지지가 '초인 오바마'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기대였다면, 지금의 지지는 실패하기도 하는 인간 오바마에 대한 지지라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는 것이다.

"만일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이 4년 전의 상원의원 오바마를 맞아 선거전을 치른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당시의 오바마는 초인과 같았다. 오늘날 그는 그저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 그가 수퍼 히어로에 거는 것과 같은 기대를 받았음을 상기해 보면, 지지자 중 일부가 실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그러나 초인에서 유한한 인간으로 내려오고 여러 실패를 했음에도 여전히 48% 정도의 유권자가 그를 지지하고 있다. ... 이제 미국인은 신비하지 않은 흑인 대통령을 보듬어 안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기대가 오바마를 다시 집권하게 할지는 조금만 기다리면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4년 전의 오바마는 수퍼 히어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젊고 쌩쌩했다. 불과 4년 만에 반백이 되었다. 몇 주 전의 <타임>은 미국 대통령직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를 이들의 머리를 들어 보여준 적이 있다. 사진도 그렇지만 옆에 붙은 간단한 제목들도 무릎을 치게 만든다.



※ 대통령 흰머리 이미지: <타임>

 

덧글

  • 긁적 2012/10/05 17:00 # 답글

    허얼. 황상께옵서 재선에 실패하시나요;; 좋지 않은데.
  • deulpul 2012/10/05 23:57 #

    당장 그런 판도 변화가 눈에 띄게 생긴 것 같지는 않죠? 그랬다 하더라도 다시 두 차례 토론이 남아 있기도 하고요.
  • 버머 2012/10/05 23:42 # 삭제 답글

    저도 입장 3시간전에 갔다가 오바마 등장 2시간전에 결국 화장실땜에 좋은 자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고문이 따로 없더군요... 쩝... Go Obama!!
  • deulpul 2012/10/06 00:02 #

    정말 고문 맞습니다. 저는 거창하게 말해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점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편이라 화장실 가고 싶은 것을 꾹 참을 수 있었... 좋은 자리는 아쉽게 놓치셨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분위기를 지켜보신 것도 훌륭한 경험이 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윤희형 2012/10/06 00:46 # 삭제 답글

    "정치인이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유권자,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정책을 통해 살 만하다는 희망을, 도덕성을 통해 믿을 만하다는 희망을 말이다." 긴 시간동안 수고 많으셨네요 ㅎ 잘 봤습니다.
  • deulpul 2012/10/10 10:01 #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2/10/06 13:5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10 10:0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11 18: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06 22:0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10 10: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11 03: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bluestate 2012/10/07 13:49 # 삭제 답글

    늘 사회/정치적 공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지금 사는 주(state)에 다소 만족하며 살긴하지만, 이럴땐 좀 battleground state에 있는 공기 좋은 곳에 살고싶네요. 암튼 수고하셨슴다.
  • deulpul 2012/10/10 10:04 #

    사회정치적 공기는 오래 사는 데에 맑은 공기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열 받아서 요절하지 않게 해주니까요... 어떤 신분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를 포함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긴 하지만, 그래도 남의 나라 일이라서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판을 보는 것보다는 마음이 덜 조급합니다.
  • dhunter 2012/10/08 00:50 # 삭제 답글

    이번 포스팅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네요. 음...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마지막 사진을 보다가 문득 아래에 칸을 만들고 "PSY"를 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 deulpul 2012/10/10 10:04 #

    싸이의 경우는 '늙었다'의 컨셉이 아니라 '떴다'가 되겠죠? 육체적으로도 변화가 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민노씨 2012/10/09 02:32 # 삭제 답글

    인용하신 타임의 칼럼이 인상적이네요.
    니체의 '위대한 복수'가 연상되기도 하고요.
    ( http://minoci.net/1354 )
  • deulpul 2012/10/10 10:07 #

    그렇게 복수를 당해 진면목 다 까발려진 뒤에도, 멘토라는 엄청난 이름을 달고 대선 후보 캠프에 들어가는군요. 이런 사람(들)이 '시민 멘토'면, 누가 누구한테 뭘 배우겠다는 것인지 대체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아주 값싼 싸구려 취급을 받는 '멘토'가 다 불쌍해지네요.
  • 로잘리 2012/10/12 15:07 # 답글

    오... 오늘 이글루스 가입했는데 너무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 자주 들러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 deulpul 2012/10/26 14:02 #

    요즘 좀 뜸해지는 추세라, 헛걸음하실 가능성이 높아서 미리 죄송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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