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모범적인 IT 글쓰기 섞일雜 끓일湯 (Others)

남의 나라 말을 다 커서 배워 쓰는 일은 참 어렵다. 뜻은 통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단어들이 가진 미묘한 차이 같은 것까지 구분해 가면서 말을 쓰기란 쉽지 않다.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실제로 쓰다 보면, 최종적으로는 단어 선택(word choice)의 벽을 만나게 된다. 비슷한 뜻을 가진 여러 말 중에서 문맥과 상황에 맞는 말을 골라 넣기의 어려움이다.

양적 분석을 토대로 한 학술 논문처럼, 쓰이는 단어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는 경우는 그나마 괜찮다. 조금 신중한 이메일을 쓰려 해도 어떤 말이 적당할지 몰라 골치를 썩이게 된다. 한국어로 글을 쓰면서 'OOO는...'과 'OOO가...'를 놓고 어느 편이 좋을까 생각할 때마다, 영어에서는 이런 식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에 문득 생각이 미쳐 조바심이 난다. 내가 이런 영역을 '마스터'하여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이 모국어로 그러는 것처럼 편안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의 영어 글은 박노자의 한국어 문장에 드러나는 어색함 같은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니까 이 말은 외국 출신 한국인 박노자의 한국어에 대한 찬사다). 다른 나라 말을 배울 때 문법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게 가장 쉬운 접근법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아래는 이렇게 영어 문장을 쓰고 읽는 데서 아직도 많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내가 보기에도 아주 잘 썼다는 생각이 든 글이다. <와이어드> 제휴 웹사이트인 'GeekDad'에 실린 '무인 자동차'에 관한 글이다. 잘 썼다는 느낌이 든 것은, 미문으로 화려하게 구성해 놓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글(특히 정보를 제공하는 실용문)에 요구/권장되는 형식의 엄격함을 교과서적으로 잘 따랐다. 겉멋을 부리지도 않았고, 어색한 유머를 섞지도 않았다. 마치 우직한 보이스카웃이 쓴 것 같다. 글의 구성은 주제에 대해 풀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을 하나하나 체크해 나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글을 읽는 사람을 잘 고려한 느낌이 난다. IT 영역의 글쓰기로서 모델이 될 만한 글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은 글의 구성과 형식에 대한 평가다. 이 기사에 실린 정보가 충분하고 설득력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글을 평가할 때 적용되는 몇 가지 기준을 떠올릴 수 있다: 내용은 얼마나 충실한지,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지, 그리고 그 내용과 주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 번째 부분이다.


글은 짤막한 서론, 여섯 가지 절로 구성한 본론, 그리고 짤막한 결론으로 되어 있다. 서론에서는 글의 주제가 무엇인지, 자신의 주장은 어떤 것인지를 간명하게 썼다.



본문 첫 번째 절은 '변화의 징후'이다. 무인 자동차의 실용화가 임박한 증거를 몇 가지 들었다. 무인 자동차와 관련한 법제화가 이루어진다는 점, 자동차 회사에서 생산을 예측한다는 점 등이 제시됐다.






어떤 기술이 무인 자동차를 가능케 할까. 이게 다음 절의 내용이다. 이미 48만km를 사고 없이 달린 구글의 '운전사 없는 자동차'에는 GPS, 레이더, 비디오 카메라, 레이저 레이더, 그리고 물론 컴퓨터가 실렸다. 이런 장비 때문에 아직 값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자동차가 다른 자동차와, 또 교통 관련 인프라 스트럭쳐와 소통하는 VCS도 곧 현실화할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체증을 최소화하는 교통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럼 무인 자동차가 좋은 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어서, 아예 항목으로 알기 쉽게 나열했다. 자동차 충돌 사고 감소, 교통 정체 감소, 운전 부담으로부터 해방, 주차장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이점, 자동차 공유 프로그램 활성화, 교통 안전 기구와 교통 경찰 감축 가능 등이 제시됐다.








무인 자동차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1980~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Millennials)는 기성 세대와는 다른 운전 태도를 가진다. 운전을 별로 하고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동차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무인 자동차 기술이 현실화하는 데 장애는 없을까. 가장 큰 문제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이다. 안전도 걱정거리다.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 차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보다 더 안전하지만, 소수의 무인 자동차 사고는 훨씬 더 크게 보도되어 부정적인 인식을 갖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사고를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인 자동차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동차 소프트웨어의 안정성도 걱정해야 할 요소다. 운영 체제와 각종 작동 프로그램들이 군사 장비 수준의 안정성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앞으로 무인 자동차가 대거 도입되면 어떤 변화가 벌어질까. 도로 체계가 재조정될 테고, 무인 자동차 전용 도로가 생긴다. 언젠가는 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금지될지 모른다. 더 나아가 무인 자동차는 더이상 '차'가 아닐 수도 있다. 차량의 개념을 넘어, 사람과 물자의 수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 이에 따라 직업군도 큰 변화가 생긴다. 운전사라는 직업은 사라지겠지만, 더 많은 직업이 생길 것이다. 그런 변천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 정리했다. 변화의 징후는 분명하고 기술은 이미 현실이 되며 비용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무인 자동차가 대거 도입되면 여행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이다, 라는 게 결론이다.


글을 통해 무인 자동차 기술과 관련한 오늘의 상황과 미래 펼쳐질 모습을 개략적으로 파악하기에 충분하기도 하지만(더 알고 싶으면 제공된 링크를 따라가면 된다), 그보다 글의 구성이 아주 간명하고 효과적이다. 그 형식미에서 기계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GeekDad'라는 제목을 가진 사이트에 실린 글인 데다, 내용도 기계 기술에 대한 것이니 오히려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 글을 예로 끌고 왔지만, 이와 같은 글 구성의 효율성은 한글 문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덧글

  • dhunter 2012/12/21 12:05 # 삭제 답글

    저는 인기있는 글 쓰기를 테마로 글을 써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다소 제목이 심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GeekDad에서는 저런 글도 읽힐(?)수 있는걸까요?
  • deulpul 2012/12/21 22:04 #

    이게 예컨대 한국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나가는 기사였다면 제목을 이렇게 했겠죠:

    '운전하다 손 놓고 무슨 짓... 경악'
    '차 안에 은밀한 장비 갖춘 목적은?'
    '차 안에서 딴짓하는 동안 자동차 움직여... 충격'
    '운전하면서 손 놓는 진짜 이유는?'
    '젊은 그녀, 운전하기 싫다면서 갑자기...'

    외국 언론은 한국에서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농담이고, 정말 제목이 건조하고도 명료하군요. 미니멀리즘의 냄새도 나고 무성의하다는 느낌도 들고... 간명해서 좋긴 합니다만, 제가 편집자라도 좀 바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2012/12/29 22:2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2/30 18: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2/30 18:4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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