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이 서출이 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섞일雜 끓일湯 (Others)

고전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서출이다. 바람을 부르고 귀신을 부리는 재주가 있었지만, 신분 사회의 벽에 부딪쳐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도적이 되었다. 왕후장상이 씨가 있던 시절에, 아무 잘못도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천한 인간으로 낙인찍힌 삶의 비애가 이 웅대한 이야기의 주요한 축이 된다.

이렇게 호부호형을 못 하는 길동의 상황은 우리가 잘 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하여 첩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예나 지금이나 교과서에 올라가 있는 부분은 홍길동이 태어난 바로 그 다음 장면부터이고, 어릴 때 본 동화판 홍길동전에도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 그런 운명을 갖게 되었는지 본 기억이 없다.

홍길동이 서자로 태어난 것은 물론 본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럼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오리지널본(완판본)에 따르면 놀랍게도 홍판서(아버지)의 정부인의 잘못이다. 원전 맨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거든. (현대어판은 원문 아래에.)


일일은 승상 난간에 기대어 잠깐 졸더니, 한 줄기 바람이 길을 인도하여 한 곳에 다다르니, 청산은 암암하고 녹수는 양양한데 세류 천만 가지 녹음이 파사하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춘흥을 희롱하여 양류간에 왕래하며 기화요초 만발한데, 청학백학이며 비취공작이 춘광을 자랑하거늘, 승상이 경물을 구경하며 점점 들어가니 만장절벽은 하늘에 닿았고 구비구비 벽계수는 골골이 폭포되어 오운이 어리었는데 길이 끊어져 갈 바를 모르더니, 문득 청룡이 물결을 헤치고 머리를 들어 고함하니 산학이 무너지는 듯하더니 그 용이 입을 벌리고 기운을 토하여 승상의 입으로 들어오거늘, 깨달으니 평생 대몽이라.

내념에 헤아리되 '필연 군자를 낳으리라' 하여 즉시 내당으로 들어가 시비를 물리치고 부인을 이끌어 취침코자 하니, 부인이 정색 왈, "승상은 국지재상이라. 체위 존중하시거늘 백주에 정실에 들어와 노류장화 같이 하시니 재상의 체면이 어디에 있나이까?"

승상이 생각한즉 말씀은 당연하오나 대몽을 허송할까 하여 몽사를 이르지 아니하고 연하여 간청하시니, 부인이 옷을 떨치고 밖으로 나가시니, 승상이 무료하신 중에 부인의 도도한 고집을 애달아 무수히 차탄하고 외당으로 나오시니, 마침 춘섬이 상을 드리거늘, 좌우 고요함을 인하여 춘섬을 이끌고 원앙지락을 이루니 적이 울화를 덜으나 심내에 못내 한탄하시더라.

춘섬이 비록 천인이나 재덕이 순직한지라, 불의에 승상의 위엄으로 친근하시니 감히 위령치 못하여 순종한 후로는 그 날부터 중문 밖에 나지 아니하고 행실을 닦으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십삭이 당하매 거처하는 방에 오색운무 영롱하며 향내 기이하더니, 혼미중에 해태하니 일개 기남자라. 삼일 후에 승상이 들어와 보시니 일변 기꺼우나 그 천생됨을 아까워하시더라. 이름을 길동이라 하니라.

이 아이 점점 자라매 기골이 비상하여 한 말을 들으면 열 말을 알고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더라. 일일은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내당에 들어가 부인을 대하여 탄식 왈, "이 아이 비록 영웅이나 천생이라 무엇에 쓰리요. 원통하도다, 부인의 고집이여. 후회막급이로소이다."

부인이 그 연고를 묻자오니, 승상이 양미를 빈축하여 왈, "부인이 전일에 내 말을 들으셨던들 이 아이 부인 복중에 낳을 것을 어찌 천생이 되리요."

인하여 몽사를 설화하시니 부인이 추연 왈, "차역천수오니 어찌 인력으로 하오리까."





(비교적 현대어) 하루는 승상이 난간에 기대어 잠깐 졸더니, 한 줄기 바람이 길을 인도하여 한 곳에 다다르니 청산은 높이 솟고 푸른 물은 넘칠 듯 가득 찼는데, 자잘한 숱한 녹음이 하늘하늘 나부끼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봄의 흥취를 희롱하여 버드나무 사이를 오가며, 옥 같은 풀에 구슬 같은 꽃 만발한데, 푸른 학 흰 학이며 아름다운 공작이 제 빛을 자랑하거늘, 승상이 경치를 구경하며 점점 들어가니, 1만 길 절벽은 하늘에 닿았고 구비구비 벽계수는 골골이 폭포되어 오색 구름이 어리었는데, 길이 끊어져 갈 바를 모르더니, 문득 청룡이 물결을 헤치고 머리를 들어 크게 소리를 지르니 산골이 다 무너지는 듯하더니, 그 용이 입을 벌리고 기운을 토하여 승상의 입으로 들어오거늘, 깨어나 생각하니 평생 꾸기 어려운 좋은 꿈이라.

마음 속으로 헤아리기를 '반드시 군자가 될 아이를 낳으리라' 하여, 즉시 부인이 있는 내당에 들어가 하인들을 물리치고 부인을 이끌어 취침코자 하니 부인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승상은 나라의 재상이어서 지위가 높고 귀중하시거늘, 대낮에 정실에 들어와 기생과 노시는 듯 하시니 재상의 체면이 어디에 있습니까?"

승상이 생각하니 부인의 말은 맞지만, 좋은 꿈을 날려버릴까 하여 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계속하여 간청하였으나, 부인이 옷을 여미고 밖으로 나가니, 승상이 무안해 하면서도 부인의 도도한 고집을 안타까워 하여 무수히 탄식하고 외당으로 나오는데, 마침 종 춘섬이가 상을 갖고 올라오거늘, 주변이 고요한 것을 확인하고 춘섬을 이끌고 원앙지락을 이루니, 나름 울화를 덜긴 하였으나 마음 속으로 못내 한탄하더라.

춘섬이는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재능과 덕이 순박하고 곧은지라, 뜻하지 않게 승상의 위엄으로 친히 가까이하시니 감히 그 뜻을 거역치 못하여 순종한 뒤로, 그 날부터 중문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행실을 닦으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열 달이 되매 거처하는 방에 오색 운무 영롱하며 기이한 향내가 나더니, 혼미 중에 아이를 낳으니 총명한 아들이라. 사흘 뒤에 승상이 들어와 보고, 한편 기쁘하면서도 한편 천하게 태어난 것을 아까워하더라. 아이의 이름을 길동이라 지으니라.

이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기골이 비상하여, 한 마디를 들으면 열 마디를 알고,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더라. 하루는 승상이 길동이를 데리고 내당에 들어가 부인을 대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비록 영웅의 기질을 타고 났으나, 천한 출신이라 무엇에 쓰겠소. 원통하구려. 부인이 고집을 피운 탓이요. 후회가 막급이구려."

부인이 그렇게 한탄하는 까닭을 묻자, 승상은 두 눈썹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부인이 그 때 내 말을 들었다면 이 아이는 부인의 뱃속에서 나왔을 테니 어찌 천한 출생이 되었겠소."

하면서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부인이 실망하여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니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하오리까" 하였다.


그러니까 수퍼메가톤급 길몽을 꾸고 급히 아이를 만들기 위해 정부인을 찾았으나, 부인이 대낮부터 웬 수작이냐고 지청구를 놓는 바람에 쫑코를 먹고, 얼떨결에 지나가던 여종과 관계를 한 것이 홍길동이 태어난 연원이 되었다. 부인의 행실은 정숙한 여인의 높은 도덕성이라고 하려니와, 마음이 급한(꿈 이루기를 말함) 사내의 눈에 보이기는 도도한 고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이 고집을 피운 탓이요!" 이 고집이 길동의 비극, 더 나아가 조선 사회를 뒤흔드는 싹을 잉태한 셈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당시의 가족 제도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층위의 제도적 폭력성이 읽히긴 하지만, 이 역시 홍판서를 비롯한 개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시대의 모순일 것이다. 길동은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장관까지 되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오늘의 교훈은 로또 1등 꿈을 태몽으로 착각하지 말 것?

※ 비슷한 놈들:

갑돌이와 갑순이는 어떻게 될까
금일 몸이 심히 번열하니

 

덧글

  • 피그말리온 2013/01/15 17:38 # 답글

    진묵대사인가...예전에 비슷한 취지의 얘기를 본 적이 있는거 같기도 한...
    여튼 중요한건 타이밍(?)이군요...
  • deulpul 2013/01/15 17:49 #

    그, 그렇죠. 기회는 찬스다...
  • 2013/01/16 06:4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3/01/17 16:40 #

    심심할 새가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바쁜 겨울입니다. 제 경우 잉여 생산력은 바쁠수록 높아진다는... 비공개님도 건강 조심하시고요.
  • unreal 2013/01/16 18:10 # 답글

    밤까지 기다리면 안 되는 것이었느냐고 수줍게 홍판서님께 여쭤 보고 싶습니다만.....
    역시 중요한 건 타이밍이네요(2).
    하지만 나중에 길동도 율도국에서 처를 두 명 들이는 바람에 너무하다며 저는 울부짖었습니다.
  • deulpul 2013/01/17 17:12 #

    정말 그렇군요. 이민... 을 가서 세 여인을 구하고 그중 하나를 부인으로, 둘을 첩으로 삼았는데, 이 인간이... 마지막 부분에 보면 삼자이녀를 두었다고 했습니다만, 적서 구별은 나오지 않네요. 아마도 자신이 만든 세상은 차별이 없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축첩을 하지 않았나 좋게 해석해 봅니다. 한편 늘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기도 한데, 꿈(길몽)의 유효기간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인지...
  • Silverwood 2013/01/16 23:40 # 답글

    상관 없는 글이지만 정도전의 아버지가 대단한듯 하네요. 서자의 설움을 알아서 서자인걸 비밀로 했다던데 그 정부인도 대단하고. 만약 서자로 자랐다면 조선을 세우지도 못했을꺼고그렇다면 지금의 한국도 몇십년이나 몇백년 후에나 가능했을지도 모르잖아요ㅎ
  • deulpul 2013/01/17 17:24 #

    저도 잘 몰랐던 것이지만, 조선 초까지는 서얼의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도전까지가 거기 포함되는 것인가는 모르겠습니다. 조선을 세우지 못했다면 지금의 한국이 훨씬 전에 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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