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箱)의 찻집 '69' 섞일雜 끓일湯 (Others)

예전에 한 신문이 트위터 분위기를 편향적으로 묘사하는 기사를 쓴 데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섹드립도 문제, 후배위도 문제'). 이 글을 쓴 이후 블로그에서 희한한 현상이 하나 벌어지기 시작했다. 검색을 통해 이 블로그를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 글이 나간 뒤에 '후배위'가 올타임 베스트 검색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금 저장한 모습인데, 매일 이 비슷한 꼴이다. 후배위를 열렬히 찾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검색 방문자는 이 블로그의 전체 방문자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이렇게 오시는 분들이 모쪼록 블로그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가시기를 바라지만, 어떤 경우는 도저히 그랬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검색어도 있다. 예컨대 본문에서 비유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검색에 걸려 찾아오신 분이라면, 원하는 정보를 속시원하게 찾으실 수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방문자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더불어 관심의 분산까지 초래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좀 하게 된다.

이렇게 검색어 방문은 나에게 약간의 부담을 준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검색어에 걸릴 것을 염두에 두고, 남들 다 아는 내용이라도 최대한 완결적인 모양을 갖추도록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오늘의 이슬점은 55도입니다' 같은 경우가 그렇다. 또 어떤 사항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방문 검색어에 자주 등장하는 경우, 애프터 서비스를 해야 할 부담감을 느끼기도 한다. 작년에 그래미 상을 휩쓴 아델의 노래에 대한 글 ''Someone Like You'의 감동 코드'도 'Someone Like You 코드'라는 검색어로 들어오시는 분이 많아서, 나중에 악보 코드를 찾아 추가해 두었다.

'후배위'도 마찬가지다. 해당 글은 문제의 기사가 트위터 로고를 후배위 모양으로 쓴 데 대해 비판한 부분이 있을 뿐, 후배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는 글이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검색 방문을 받고 있으니, 뜻하지 않게 헛걸음을 하게 만드는 죄를 저지른다는 점 때문에 난데없는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대체 누가 후배위 같은 것을 검색으로 찾는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론, 아마도 후배위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후배위가 뭔지 알려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또 검색으로 찾는 것이 정의(定義)라든가 how to 같은 것은 아닐 성싶다. 그래서, 이 올타임 1위 검색어에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별다른 애프터 서비스를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주기율표 포스터를 교재로 하여 몇 마디 더할 수도 있지만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검색 의도에 부합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후배위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는 집어치우고, 오늘은 희한한 숫자 69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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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어릴 때 내게는 이 숫자가 영 미스터리였다. 명랑 동영상에 통달한 친구놈들이 히히덕거리며 수군대는 말을 들을 때, 나는 이 불가해한 숫자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사칙연산으로 계산할 수도 없었고, 인수분해로 쪼갤 수도 없었다. 남녀 결합의 자세로서 어떻게 그런 그림이 나온단 말인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이 특이한 '상형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지하 경제를 활성화, 아니 지하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매니아들 사이에 통용되는 당대의 은어 정도로 인식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숫자가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의외로 아주 오래 전부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예전 사람들의 성적 상상력과 실행력을 너무 과소평가해 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시인 이상(李箱)은 그가 남긴 작품들만큼이나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상과는 한 살 차이로, 그와 동시대에 살며 막역한 사이로 교류했던 소설가 박태원이 쓴 '이상의 편모(片貌)'라는 글이 있다. 이상이라는 인간의 사람됨을 가까이서 이모저모 살펴보고 쓴 글이다. 박태원 개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어쨌든 이 글을 보고 나면 이상을 묘사하는데 괴이함이든 괴팍함이든 '괴'자 하나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든, 우리가 이상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위인과 생활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괴팍한 사람이다'라는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거니와 물론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었어도 역시 '괴팍'하다는 형용만은 그르지 않은 듯싶다.

일즉 <여성>지에서 나에게 '문단 기형 이상론(文壇畸形李箱論)'을 청탁하여 왔을 때, 그 문자가 물론 아모러한 그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것은 아닌 듯싶었으나 세상이 자기를 문단의 기형으로 대우하는 것에 스스로 크게 불만은 없었던 듯싶다.


이상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 생계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 다방 '제비'를 개업했다. 이상이 다방을 경영한 것은 '제비'뿐만이 아니다. 박태원의 말에 따르면 도저히 개선할 수 없는 게으름 때문에, 이상은 가게 여럿을 개업했다가 망해 남에게 넘겨주는 일을 반복했다. '제비'만 해도, 건물주와 마찰이 생겨 집주인이 가게를 비워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을 때, "(법원에) 출두하라는 오전 9시에 대어 일어나는 재주가 없어 가장 불리한 결석 판결을 받고 그래 좀 더 가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박태원은 계속하여 쓴다:


현재 '보스턴'의 전신 '69' '식스나인-'을 오직 시작하였을 뿐으로 남에게 넘겨버리고 '제비'에 또한 실패한 이상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명치정(明治町, 지금의 서울 명동)에다 '무기(むぎ)'라는 다방을 또 만들어 놓았다.


무기는 일본말로 보리를 뜻한다. 다방 이름으로 고상하고 전원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하지만 박태원은 그 안에 걸린 그림이며 분위기가 악취미에 가까운 이상의 괴팍한 취향을 반영하여 괴이쩍기 짝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럼 '69'는 뭔가?


'악취미'로 말하면 '69'와 같은 온건치 않은 문구를 공연하게 다점의 옥호로 사용한 이상(以上)의 것은 없을 것으로, 그 주석을 나는 이 자리에서 하지 않거니와 모르는 사람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69? 육구? 육구라... 하하, 육구리(ゆっくり, '느긋하게'의 뜻) 놀다 가란 말인 게로군."

이라고라도 하면 그는 경우에 따라 냉소도 하고 홍소도 하였다. 그렇기로 말하면 그에게는 변태적인 곳이 적지 아니 있었다. 그것은 그의 취미에 있어서나 성행(性行)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관, 도덕관, 결혼관, 그러한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보통 상식인과의 사이에 적지 않은 현격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박태원은 이상이 붙인 다방 이름 69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온건치 않은 문구' '변태적인' 같은 말을 쓰고 최악의 악취미로 꼽았으며 그 의미조차 차마 밝혀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 69를 뜻하는 것 같다. 또 이상이 손님의 반응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박태원이 이상과 막역한 사이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것은 그가 그저 추정한 것이 아니라 이상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뜻으로 붙였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박태원이 이 글을 쓴 것은 1937년이다. 말하자면, 숫자 69를 그런 뜻으로 쓴 것은 한국 문학사(혹은 한국 엽기행각사)에서 적어도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상형숫자는 국제 공통이다. 이 말을 먼저 쓰기 시작한 사람들은 프랑스인인 것 같다. 이 말의 연원을 프랑스어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어원사전에 따르면, 영어에서 69(sixty-nine)이라는 숫자가 성적인 의미로 처음 쓰인 것은 1888년이며, 프랑스어 'faire soixante neuf(69를 하다)'를 옮긴 것이라고 한다.

이상 당대에 이 말이 어떤 경로로 조선에 흘러들어와 얼마나 널리 회자되었는가, 혹은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는가는 알기 어렵거니와, 여하튼 자기 가게에 이런 이름을 떡하니 붙이는, 지금 하래도 하기 어려운 일을 천연덕스럽게 한 이상은 그의 시만큼이나 특이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한편 박태원의 이 글 '이상의 편모'는 이상이 동경에서 사망한 지 두 달 만에 발표한 것으로, 추모 회고글 같은 성격이다. 절친한 문우(文友)의 요절을 놓고 공허한 공치사로 고인을 포장하기보다, 괴팍한 인간임을 드러내며 시대와의 불화를 환기한 구보 역시 '괴팍한' 까지는 아니더라도 범상한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덧글

  • gina 2013/02/18 17:33 # 답글

    이 글로 인해 들풀님 블로그에 또 하나의 주요 유입키워드가 생기겠네요! 애프터서비스 기대할게요.
  • deulpul 2013/02/18 20:00 #

    구글에서는 숫자만으로는 외국 사이트들이 뜨게 되고, 네이버에서 원하는 결과를 보려면 성인 인증을 받아야 하도록 되어 있어서, 이 검색어로는 거의 들어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략 안심이지요-.
  • 2013/02/19 02:0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3/02/19 08:08 #

    말씀해주신 노래는 별로 주목하지 못하던 것인데, 참 좋네요. 말씀대로 차분한 분위기가 더할 수 없이 좋은데, 사연은 마음이 좀 아픕니다. 남 이야기할 게 아니다 싶기도 하지만요. 이상과 노래를 부른 가수가 모두 일찍 죽은 사람들임에 생각이 미치면서, 이상이 말년까지 살아 있었다면 이와 같은 특이함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을까, 가수는 그 맑고 청량한 목소리를 늙어서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서 숙제를 해야 할 텐데!
  • 2013/02/19 02: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19 06:2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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