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과 몸무게가 빠진 지원서, 반갑다 때時 일事 (Issues)

신입사원 채용에 ´스펙란´ 없앤 공공기관…어딜까?

좋은 소식, 좋은 기사에 낚시질 제목을 붙인 추태는 그냥 넘어가자.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신입사원을 뽑는데, 그 지원서에 어학 성적, 학력 따위 '스펙'을 쓰는 부분을 없애고 직무 수행 능력에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는 소식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월 말에, 학력이나 영어 점수 같은 '스펙란'을 없애고 직무 관련 경험에 초점을 맞춘 지원서를 보급할 예정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 첫 적용 사례라고 한다.

반가운 변화다. 진작에 그랬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미친듯이 불고 있는 영어 바람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신입 사원 채용 때 무조건 영어(성적)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채용 제도의 변화가 더 나아가 사회적 변화로까지 연결되기를 바란다.

첫 번째 기사에 보면 이번 산업인력공단 채용에는 또 한 가지 반가운 변화가 있다.


지원서에는 입사 지원을 위해 늘상 적어내야 했던 가족사항·키·몸무게 등 업무와 관련없는 항목들이 삭제됐다.


운동선수나 경호원을 뽑는 것도 아니면서 업무와 상관 없는 키나 몸무게까지 적어내라는 것은 비상식 이전에 인권 침해에 가깝다. 그래도 고용자, 이른바 갑이 내라고 하니 을인 지원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적어 내야 할 것이다. 나도 예전에 이런 서류를 내고 회사를 들어갔지만, 이런 항목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력서에 본적이 빠지는 등 내용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홍길동의 이력서들(본보기) 중 가장 앞에 뜬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들이 한국형 이력서의 특이 사항들이다. 모두 사진을 붙이도록 되어 있으며, 외국어 성적을 쓰는 난도 공통으로 들어 있다. 첫 번째에는 해외 연수 사항을 쓰는 난이 아예 따로 마련되어 있고, 두 번째에는 구체적인 가족 사항에 키, 몸무게, 시력, 종교까지 쓰도록 되어 있다. 세 번째 이력서에도 신체 특성과 종교를 적도록 되어 있다.

마침 어제 msn.com에는 취업과 경력 관리 전문가가 쓴 '(미국에서) 직장에 지원할 때 내야 하는 이력서에 절대 써서는 안 되는 것 5가지'라는 조언 기사가 실렸다. 그 중 4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4. 개인적 사항: 모델직처럼 외모가 중요한 일자리가 아닌 한, 이력서에 사진을 첨부하지 말라. 거의 모든 고용자는 당신의 외모에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법에 따르면 그래서도 안 된다. 그들은 단지 당신이 왜 그 자리에 적합한가만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키, 몸무게, 인종, 나이 같은 개인적 사항들도 마찬가지다.


이게 합리적인 사회의 채용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특이한 점은, 이 조언에서는 지원자가 그런 개인 특성을 이력서에 쓸까봐 걱정하며 도움말을 주는 데 비해, 한국의 경우 고용자가 그런 특성을 밝힐 것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밝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이렇게 거리가 있다. 정치 구호 차원이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하고 개선할 수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주변에 널려 있는 셈이다.

※ 이미지: 첫 번째는 원출처를 알 수 없어 링크 생략. 두 번째, 세 번째.


[덧붙임] 3월11일 11:45 pm

미국에서 고용주가 직원을 채용할 때 차별하거나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연방 기관인 평등고용기회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 EEOC)가 주관하는 법률로 정해져 있다. 이 위원회의 홈페이지에 설명된 법률 내용은 그야말로 금과옥조들이다.

EEOC가 강제하는 법률에 따르면, 취업 지원자나 직원을 그 사람의 인종, 피부색, 종교, 성(임신 포함), 출신국, 나이, 장애, 유전 정보 등에 의해 차별하는 일은 불법이다. 이런 규정은 사람을 채용할 때 내는 광고에서부터 시작해 직원으로 채용한 뒤의 회사 생활에 이르기까지 고용의 전과정에 걸쳐 강력하게 강제된다. 인종, 피부색, 종교... 등의 차별 요소는 이렇게 다양한 고용 상황을 거론할 때마다 계속 반복해 제시되는데, 이런 요소에 근거한 차별이 어떤 경우라도 허용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하겠다.

이 규정 중에서, 위에서 논의한 입사 지원과 관련한 부분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밑줄은 내가):


고용 이전의 조사(일반)

일반 규정으로서, 고용 이전(지원) 과정에서 요구되거나 얻어지는 정보는 그 지원자가 해당 직무에 적합한가를 결정하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인종, 성, 출신국, 나이, 종교와 관련한 정보는 이러한 결정 요소로 볼 수 없다.

고용자가 지원 과정에서 장애와 관련한 조사를 하는 일은 특히 금지된다. 인종, 피부색, 성, 출신국, 종교, 나이와 관련한 조사를 하거나 이런 기준으로 지원자를 걸러내는 것은, 평등 고용과 관련한 연방법 및 주법이 이를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금하고 있지는 않지만, 업무 목적에 의거해 이를 정당화할 수 없을 경우 고용자가 지원자를 차별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지원자의 인종, 성, 출신국, 장애 상태, 나이, 종교, 피부색, 조상 등을 알아낼 수 있는 단체, 클럽, 조직 등의 가입 여부를 묻는 일은 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고용자는 지원자의 사진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본인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경우는, 채용이 결정되고 지원자가 이를 받아들인 뒤에야 사진을 요구할 수 있다.


이 정도만으로도 우리가 이력서를 쓰면서 당연한 듯 적어 내는 내용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채용 공고와 관련한 아래의 고용 평등 규정은, '19OO년 이후 출생자' '20OO년 이후 대학 졸업자' 따위로 지원자의 제한을 두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채용 문화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잘 보여준다.


구인 광고

고용주가 인종, 피부색, 종교, 성(임신 포함), 출신국, 나이, 장애, 유전 정보 등에 의거해 특정한 사람들을 선호하거나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 구인 광고는 불법이다. 예컨대 '여성'이나 '최근 대학 졸업자'를 뽑는다는 광고는 남성이나 고령자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기 때문에 위법이 된다.


 

덧글

  • .. 2013/03/11 11:22 # 삭제 답글

    이력서 양식을 메일로 보내주는 회사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의 직업,나이,학력, 집이 자가나 전월세냐 입력하는 칸이 아직도 있더군요. 기입안해도 뭐라고 하지는 않더군요.
  • deulpul 2013/03/11 14:47 #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서류전형에서 탈락시킨다... 는 농담이고(그렇기를 바랍니다), 고용측에서도 이런 정보가 뭔 쓸모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쓸모가 없다는 인식에서 더 나아가, 그런 정보는 차별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묻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티니 2013/03/11 15:51 # 답글

    개인적으로 미국에서 구직활동을 해 봤었고 귀국해서도 구직활동을 하면서 이력서 쓰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좀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체 사진은 왜 필수로 붙이라는 것이며 키, 몸무게, 종교, 가족사항 등... 주민등록번호를 안 썼다며 탈락된 곳도 있는데 대체 왜 아직 채용도 안 한 사람의 주민번호가 필요한 건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친구한테 주로 분풀이? 겸 납득이 안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2호선 안의 대학을 나왔고 경력도 많은 남자친구는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이유로 서류전형에서 많이 탈락했었다고 하더군요. 대체 왜 내 신상에 외모에 주민번호에 가족 신상까지 털리며 구직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deulpul 2013/03/11 21:52 #

    본문에 언급할까 하다가 지나쳤습니다만, 한국의 경우 주민등록번호라는 요물이 있고, 더구나 누구나 이걸 요구하고 챙겨가도 괜찮은 것 같은 인식이 퍼져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기재란이 견고하게 붙어 있는 한국형 지원서는 말씀처럼 근본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번호를 통해 노출되는 정보는 양보한다 쳐도, 말씀하신 다른 경우들은 정말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차별로 연결되는 개인 사항은 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웅변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도 손해 아니겠어요? 일 잘해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채용하려는 거지, 얼굴 반반하고 유복한 집안 출신들을 뽑아 전시하려고 사원 뽑는 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 dhunter 2013/03/11 16:50 # 삭제 답글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던게 '출신도' 입니다.

    호적 (... 사실 요즘 행정기관의 공식 명칭은 가족관계 등록지던가) 도 아니고 대놓고 출신도를 물어보는 경북소재 중소기업을 본 뒤로 저는 정치적 포지셔닝을 스스로 다시 할 수 밖에 없더군요. 이게 2010년의 일입니다...
  • deulpul 2013/03/11 21:58 #

    아, 정말 황당하군요. 생각해 보면 그런 사례가 꽤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내 회사에서 내가 부릴 사람 뽑는 거 내 기준으로 정하겠다는데 님이 뭔 상관?' 같은 식의 마인드를 가진 계층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정함과 공평함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무디고, 그 연장선이겠지만 제도적 규제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 때문에 나오는 우울한 사례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 타츠야 2013/03/11 17:26 # 삭제 답글

    한국에서 최고의 글로벌 회사라는 S전자의 경력 지원서도 아직 본문의 수준과 거의 다름 없어서 정부나 민간 기업 모두 갈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deulpul 2013/03/11 22:04 #

    그렇네요. 사실 고용자의 덩치가 클수록, 말하자면 많은 사람을 추려 뽑아 소팅해야 하는 집단일수록 관행화된 방식에 더욱 기대게 된다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 하지만 지원서는 그냥 놔둬... 오히려 가볍고 앞선 소규모 회사들에서부터 변화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게 더 빠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갈 길이 멉니다.
  • Silverwood 2013/03/11 21:48 # 답글

    전에 S병원에 입사지원서를 쓸때 총 재산과 현재 주거형태 자기 자산은 물론 현금 보유액까지 쓰는 란이 있었어요. 꼭 써야 되냐고 인사지원팀에 전화했었는데 정말 충격적이게도 거짓으로 쓰면 면접시 불이익이 따르니 솔직하게 써서 내라고 했었는데..물론 그 병원은 떨어지고 다른 병원에서 근무했는데 그 병원 들어간 사람이 스타시티에 사는 사람이라 해서 기염을 토한 씁쓸한 추억이 있네요..ㅋㅋㅋㅋ
  • deulpul 2013/03/11 22:13 #

    진실되게 써도 불이익을 당하는군요... 예전에는 기업의 서무 관리처럼 금전 출납을 담당하는 직원을 뽑을 때는 재산 상황을 기입케 한다고 했죠. 공금 들고 튀면 받아내기 위해서. 또 사관학교 생도 지원서에도 집안 재산 상황을 쓰게 한 게, 가난한 집 출신이면 나중에 장교나 장성 되어서 뇌물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뭐 이랬습니다. 이런 건 모두 사회 제도(유사시 변제나 청렴과 관련한)가 적절히 뒷받침되지 않은 당나라 때 이야기가 되어야 마땅할 텐데, 여전히 비슷한 관행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차별하려는, 적어도 차별의 여지를 두고 이를 합리화하려는 모습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 남자 2013/03/11 22:55 # 삭제 답글

    공공기관 계약직으로 다니다가 짤리고 거의 30개월째 백수로 지내고 있는데요. 이력서에 처음에는 가족사항을 왜 쓰래나 싶어서(그냥 형식이라 생각하고) 아예 채워 넣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서류 광탈을 하다 보니 요즘 들어서는 문득 가족사항이 가장 중요한 스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 하는 거죠. 위의 댓글들을 보니 설마했던 게 진짜였구나 싶기도 하네요...
  • deulpul 2013/03/12 00:03 #

    진실이 어떤 것인지를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고실업률 상태이고 일자리에 구직자가 몰리는 탓에 채용하는 사람의 뜻이 일방적으로 반영되는 buyer's market 상황임을 고려하면 그런 의심도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쓰시지 않고 공란으로 두셨다는 점이 먼저 걸립니다만, 마찬가지 말이 되겠지요. 지각 있는 고용주를 만나셔서 좋은 직장을 속히 갖게 되시기를 빕니다.
  • 이름... 2013/03/13 04:16 # 삭제 답글

    이력서 관련해서 한가지 씁쓸했던 얘기.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던때입니다. 아무리 이력서를 여기저기 보내도 전화한통 안오더군요. 그러던중 한 리크루트잡지에서 본 글에 인터내셔날 구직자들이 하도 많아 회사 HR에서 이력서를 보고 이름을 한번에 발음하지 못하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서양식 이름을 써서 이력서를 다시 돌렸더니 거짓말같이 전화가 여기저기서 오더군요. 결국 면접에 성공해서 현재도 그 직장에서 서양식 이름으로 불리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 잡지의 글이 사실이 아니길 바랍니다만 좀 씁쓸....
  • deulpul 2013/03/14 00:05 #

    저도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또 입증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고용 평등과 관련하여 위와 같은 법적 규제가 있긴 하지만, 실제 채용 과정에서 고용자의 필요나 선호에 따라 다양한 스크리닝이 가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만일 저런 방침이나 관행을 가진 회사가 있다면 쉽게 말해 앵글로색슨, 더 나아가 유럽계 미국인 위주로만 뽑겠다는 것인데, 인력 풀을 좁힌다는 점에서 회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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