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조종자들: 멀쩡한 사람을 속이는 게으른 번역자들의 잔존 섞일雜 끓일湯 (Others)



이 글의 제목은 저 책의 표지에 들어 있는 문구에서 따왔다.

일라이 패리저가 2011년에 펴낸 <필터 버블: 인터넷은 우리에게 무엇을 감추는가(The Filter Bubble: What the Internet Is Hiding from You)>는 인터넷 회사들이 개개인의 웹 활동으로부터 온갖 정보를 추출해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극단적인 양상과 이런 결과로 초래되는 인식 왜곡과 공공 가치의 붕괴 가능성을 짚어 본 좋은 책이다. 2012년에 나온 페이퍼백 판은 <필터 버블: 개인화된 웹이 우리의 읽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가(The Filter Bubble: How the New Personalized Web Is Changing What We Read and How We Think)>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책을 보다가, 혹시 한국 독자들에게도 소개되었나 싶어 찾아보았다. 있다.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온라인 서점 YES24가 제공하는 번역본의 미리보기 페이지를 열어봤다. 본문 첫 쪽을 보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대신, 이런 좋은 책을 날림 번역본으로 봐야 하는 한국 독자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야 했으며, 자기 이름을 걸고 이런 번역을 내 놓은 사람들의 용맹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번역은 어렵다. 같은 내용이라도 옮기는 방식에 대해 번역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또 실제로 얼마든지 다르게 한국어로 바꿀 수도 있다. 번역이 문제되는 경우는 이렇게 용인될 수 있는 번역상의 허용 범위를 넘어, 뜻을 왜곡하거나 내용을 누락하면서 옮길 때이다. 실수로 그래도 큰 일이지만, 더구나 반복되어 나타날 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한국어 번역본은 우선 저자 이름부터 틀렸다. 원서의 저자는 일라이 패리저(Eli Pariser)이다. 번역서에는 '엘리 프레이저'라고 되어 있다. 외국놈들 이름을 한국어로 적기가 쉽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엘리'는 그렇다치고 '프레이저'는 나올 수가 없는 표기다. 프레이저로 표기되는 영어 이름은 Fraser, Frasier, Frazer, Frazier 등이다. 우리가 아는 권투 선수 조 프레이저는 Joe Frazier고, 미국 텔레비전 시트콤 <프레이저>의 주인공은 Frasier Crane이다. 저자 이름 Pariser가 어떻게 생겼나를 잘 들여다보면 '프레이저' 같은 명명은 나올 수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발음을 짐작하기가 어려우니까 틀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니까 확인을 해야 한다. 몇 분이면 찾아볼 수 있다. 1년 반 전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안 했다.

'알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 본문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다(빨간펜은 내가).



1. 맨 앞에 마크 저커버그가 한 말을 인용했다. "문 앞에 죽어 있는 쥐 한 마리가 아프리카의 죽어가는 사람보다 당신에게 더 관련 깊다." 원문은 이렇다: "A squirrel dying in front of your house may be more relevant to your interests right now than people dying in Africa." 집 앞에서 죽어가는 다람쥐가 문 앞에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로 바뀌었다. 다람쥐와 쥐는 다른 동물이다. 죽어가는 것과 이미 죽어 있는 것도 다른 상황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흥미와 관련이 있는 정도'에 직결되기 때문이며, 바로 그 점을 저커버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성이 없더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다람쥐를 깎아내어 쥐를 만든 이유는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더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유보적 뜻을 무시하고 '관련 깊다'라고 과감하게 단정한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2. "공지 사항 하나를 띄웠을 때"라는 말은 "the post that appeared on Google's corporate blog"를 옮긴 것이다. 구글의 기업 블로그를 통해 발표된 공지라는 사실이 사라졌다.

3. "멋 부린 문구도 전혀 아니었고, 그저 다른 안내문 사이에 슬쩍 끼워져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의 원문은 이렇다: "It didn't beg for attention - no sweeping pronouncements, no Silicon Valey hype, just a few paragraphs of text sandwiched between a weekly roundup of top search terms and an update about Google's finance software." 거창한 발표(sweeping pronouncements)와 실리콘 밸리 식의 홍보(Silicon Valey hype)라는 입체적인 말들이 '멋부린 문구'라는 단순한 말로 압착되었다. 또 공지문이 두세 단락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구글이 인기 검색어를 정리해 매주 발표한다는 점도 모두 과감하게 빼버렸다.

4. "search engine blogger"를 "검색엔진 전문가"라고 했다. 왜 블로거라는 말을 전문가라고 고쳤나. 모든 블로거는 다 전문가인가? 아니면 블로거는 전문가가 될 수 없나? '검색 엔진 전문 블로거' 정도였으면 이해할 만하다.

5. "이 막무가내 돌격대장 구글이 어디로 나아갈지 알려주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은 원문과 큰 차이가 있다. 원문은 이렇다: "Danny Sullivan pores over the items on Google's blog looking for clues about where the monolith is headed next, and to him, the post was big deal." 즉 이 공지 사항으로 인해 구글이 나아가는 방향을 찾은 게 아니라, 구글이 나아가는 방향을 잡기 위해 늘 구글의 블로그 포스팅들을 세심하게 관찰해왔으며, 그런 그에게 이 공지는 큰 의미가 있었다는 말이다.

6. 번역본은 "그는 그 공지 사항의 행간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개별적 검색'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라고 옮겼다. 원문은 "For Danny, the headline said it all: "Personalized search for everyone""이다. 해당 구글 공지의 제목인 'Personalized...'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다 말해준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행간'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제목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말해준다는 의미이므로 오히려 반대의 뜻으로 옮긴 셈이다. 해당 구글 공지를 확인해 봤으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었다. 뜻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 이 정도 확인하는 것은 번역자의 기본 의무다.

가장 신경을 쓰게 마련인 앞부분이 이러니, 다음은 어떨지 익히 짐작이 된다. 번역이 어렵다는 뜻으로 흔히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원서의 디테일을 무시하고 실제로 창작하는 것을 번역이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가 싶을 지경이다.

패리저의 책이 영어로 출간된 것은 2011년 5월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같은 해 8월에 나왔다. 석 달 남짓한 시차가 있다. 영어 책이 처음 나오고, 유명해지고, 번역판 발행 결정이 이루어지고, 번역 계약이 진행되고, 번역본이 편집되어 인쇄되는 등의 일을 고려하면, 실제 번역에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을지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둘이 나눠서 번역을 했다.

결국 서둘러 책을 내려는 통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같은 솔깃한 타이틀들이 그런 욕구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출판사도 그렇지만, 번역자들도 그렇다. 아무리 번역 환경이 개판이라도, 자기 이름 석 자 걸고 하는 일을 이렇게 해도 되나 싶다.

정작 하려고 했던 이 책의 내용 검토는 다음에.

※ 이미지: 예스24 해당 책 페이지(본문에 링크).

 

덧글

  • 긁적 2013/03/18 16:50 # 답글

    -_-.........
    그냥 저를 시키지. 제 잉여스러운 영어실력으로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음....
  • deulpul 2013/03/18 20:27 #

    저 정도로 하여 출판을 하면 안 된다니까요. 하하. (농담임)
  • 하얀그림자 2013/03/18 17:19 # 답글

    최근에 봤던 책중 최악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번역 탓이었군요..
  • deulpul 2013/03/18 20:28 #

    패리저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할 수는 있을 텐데, 최악이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굉장히 많이 배웠습니다.
  • dudadadaV 2013/03/18 18:18 # 답글

    같은 맥락에서 다른 나라와 동시상영되는 영화의 자막도 개판이라고 합니다.. ;;
  • deulpul 2013/03/19 08:04 #

    속도전은 항상 비슷한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할까요...
  • 여기에서 2013/03/19 14:59 # 답글

    최근에 읽었던 '언씽킹'도 번역이 개판이라 안타까웠는데 그런 책이 또 있다니 안타깝습니다. 분명 재미나고 매력있는 책일텐데 시원찮은 번역으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니 아깝습니다.
  • deulpul 2013/03/19 21:38 #

    그러게요. 일단 번역권 확보했으면 조금 더 여유를 두고 공을 들여서 잘 만들고 많이 파는 편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경우들을 보면 번역투라든가 외국 문체라든가 하는 비판은 사치라고 생각할 지경입니다.
  • 차누 2013/03/20 17:32 # 삭제

    언씽킹 읽고 좌절한 분이 또 계시군요. 그냥 지나가려다가 반가운(?) 마음에 한 줄 보탭니다. 번역이 망하는 경우는 실력이 안 되는 경우, 배경 지식이 없는 경우, 성의가 없는 경우 등으로 나뉠 듯한데 언씽킹은 두번째 같더군요. 읽으면서 번역자가 경영 분야에 대한 지식이 얕다는 것, 그리고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지 미국 문화에 관련, 글이 제시하는 정서와 함의를 계속 놓치고 있다는 점이 느껴져서 불편했습니다.
  • 새알밭 2013/03/21 01:50 # 삭제 답글

    Information Diet를 번역할 때 마침 저 책 이야기가 나와서 혹시 한국에도 번역본이 있다면 그 내용을 소개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들여다보다가 저자 이름부터 틀린 걸 알고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저렇게 딱한 수준의 번역 아닌 번역 실력을 정작 본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심난한 1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하기 전에 본문의 뜻을 먼저 제대로 파악하는 게 중요할텐데, 저기에 인용하신 내용을 보면 거의 구글 번역기에 대고 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맥락이 맞지 않는군요. 출판사나 번역자들이나...
  • deulpul 2013/03/22 13:12 #

    역시 이 책을 거쳐가셨군요. 바로 위에 차누님이 잘 정리하신 것에 따르면 번역이 망하는 이유로 1) 능력의 문제 2) 배경 지식의 문제 3) 성의의 문제 등이 있겠고, 하나 더 보태자면 4) 상업성의 문제까지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가장 지적하고 싶은 것은 3)과 4)입니다. 실력과 관계없이, 충분히 확인하고 점검할 수 있는 내용들을 그냥 넘기거나 푹푹 빠뜨리는 번역은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고, 이건 변명의 여지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4), 즉 대충 저렴하게 빨리 만들어 팔고 치우는 번역 출판 문화라는 생각도 들고요. 3)도 결국 1)에 포함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 지나가는이 2013/03/21 02:16 # 삭제 답글

    혹시요, 번역할 때 문장을 통채로 누락시키며 하는 번역은 뭐라고 평해야할까요?
    그 책이 두껍긴 한 건데... 단락내에서 상당부분을 누락시켜가며 번역을 해서 출판사에 문의했더니, 오래전일이라 책임자가 없긴한데, 자기 추측으로는 책 자체가 두껍다 보니 완역하지 못한채 임의로 번역해 내지 않았겠냐고, 미안하다고는 하던데요... 앞으로 그 번역자 책은 사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네요. 번역한 부분은 그럭저럭 읽을만해서 재밌게 읽었다가 영어 원서를 뒤늦게 사서 보니, 번역의 심각성을 알게 되더군요...
  • deulpul 2013/03/22 13:12 #

    어떤 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한심한 일을 겪으셨네요. 번역자가 편집자 역할까지 하면서 책의 내용을 옮길 때 편역이라고 하긴 하는데, 말씀하신 경우는 여기에도 해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날림 번역을 합리화하는 핑계로 쓰일 수도 없는 말이고요. 출판사와 책을 밝히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지나가는이 2013/03/23 23:45 # 삭제 답글

    원저자와 원출판사에게 얼마나 터무니없이 번역이 되었는지 알려준다면 해당 출판사와 역자에게 다시는 일을 안 맡기지 않을까요?
  • deulpul 2013/03/24 13:56 #

    그런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이 일일이 그런 수고를 들이기에는 품이 너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방안을 확장하여, 황당한 번역서 사례들을 모은 '벙역 위키' 같은 것을 만들고 여기서 일정한 성과가 나온(=좀더 객관화된 근거를 확보한) 사례들에 대해 원저자에게 전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말하자면 정형화된 문제 제기 방식)을 제안할 수 있겠습니다. 강력한 소비자 운동이 될 수 있고, 잘 진행되면 번역계의 문제를 일정 부분 바로잡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라 망신이라는 점에서 좀 꺼림칙하긴 합니다만...
  • 지나가는이 2013/03/27 01:03 # 삭제 답글

    말씀들 감사합니다. 저는 3/21에 댓글 단 '지나가는이'입니다.
    언급했던 책은 '권력의 조건'입니다. 21세기북스에서 07년에 번역본 초판이, 그리고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제가 영어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다른 책도 봐야해서 킨들 이북을 사두고는 더 이상 쭉쭉 진도를 못뺐지만 전반부 몇 부분들에서 문장이 통으로 빠지는 건 확실하네요.
    초판을 07년에 샀는데, 제 책을 보고 뒤늦게 아쉽기도 했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이번에 개정판이라고 새로 나왔는데 변화가 없다는 점입니다.
    개정판이 바뀌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책 목차를 대조해보니 변화가 없던데, 초반 누락된 부분만 제대로 채워넣어도 책 페이지는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북스에서 당시 편집을 담당했던 분은 퇴사하셨다 하니 당시 번역 실상을 알기에는 번역가 이수연씨에게 연락해봐야겠지만... 개인적으로 바빠 거기까지는 못해봤습니다.

    공개적인 곳에 이렇게 글 쓴 이유는, 혹시라도 그 책을 사실 분이라면 번역본도 좋긴 하지만, 그 책이 완역본이 아님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남겨봅니다.

    혹 문제된다면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deulpul 2013/03/30 10:00 #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 듣고 2012년 9월에 21세기북스에서 나온 책(http://www.yes24.com/24/Goods/8570028?Acode=101)의 앞부분을 잠깐 훑어봤는데, 한국에서 번역을 한다는 사람들의 자세가 원래 이런 건가 싶어 절망적인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중요한 의미가 담긴 말들을 다 빼먹었고, 문맥을 못 잡고 그냥 뜻만 대충 통하게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단락들을 통째로 뭉텅뭉텅 빼먹었네요. 하버드 박사 출신이고 그 대학에서 가르친 적도 있는 저자의 책이 청소년용 교양서 같은 꼴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한국 독자들이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 지나가는이 2013/03/30 09:28 # 삭제 답글

    피드백 감사합니다. 누락된 부분이 계속 나오네요. 전부 대조해서 빠진 원문들만 따로 정리해도 꽤 나오겠습니다만(번역한 부분의 질은 논외로 하고라도)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deulpul 2013/04/02 15:32 #

    집중적인 글읽기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오역의 미덕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오역 요정설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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