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원세훈, 편견의 노예들 때時 일事 (Issues)

2005년 11월에 조지 W. 부시가 중국 북경을 방문했을 때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과 문답을 나눈 부시는 회견을 마무리하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무대 옆의 육중한 문으로 다가가서 문을 밀었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잡아당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바보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른 쪽 문을 밀고 당겨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낙심한 얼굴로 기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정면을 잠시 주시했다. 이윽고 참모 하나가 뒷쪽의 출구를 가르쳐 주었고, 부시는 "이거, 탈출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하고 멋적은 농담을 하며 빠져나갔다.

부시가 열려고 했던 육중한 문은 사실은 장식용으로 만든 가짜 문이었으며, 출입구는 뒷쪽으로 나 있었다. 회견을 시작할 때 부시는 바로 그 출입구를 통해 회견장으로 걸어나왔다. 자기가 나왔던 곳을 잊고 애먼 데 가서 문을 열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국가 원수가 벌인 사소한 에피소드다. 그 자체로만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부시의 멍청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간주할 수도 있었고, 더 나아가 진퇴양난의 대외 정책 상황에 빠져 있던 그에게 '탈출구가 없다'거나 그 자신의 말대로 '아무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라는 부정적 함의(connotation)를 덧붙이는 사례로 삼을 수도 있었다.

이 장면의 사진을 찍고 배포한 것은 AP다. AP의 부회장이자 사진 책임자인 산티아고 리옹은 이 사진이 실수를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상황을 잘 처리하는 부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의 (부정적인) 인간 됨됨이를 재확인해주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 다음날인 11월21일자 신문에서, 부시가 가짜 문을 잡아당기는 실수를 하고 바보스런 표정을 짓는 상황을 AP 사진 네 장을 연결하여 1면에 실었다. 이러한 사진과 편집은 부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뉴욕 타임스>의 기자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에서 가르치고 있는 알렉스 존스는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판을 들었다. "이런 사진을 1면에 싣다니, 지독한 편견이군. 이건 <뉴욕 타임스>가 편견을 갖고 부시에 대해 보도한다는 증거란 말일세."



신문 사진이 어두워서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실린 것은 다음의 네 컷이다:



신문이 부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이런 사진을 실었다는 비판에 대해 존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차분하게 따져 본다:

<뉴욕 타임스>가 사설에서 부시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또 부시 행정부를 화나거나 창피하게 만드는 기사를 실어왔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진이 신문의 편견을 보여주는 예가 될까. 그럴지도 모른다. 편집자는 대통령의 불운한 실수를 비웃으며, 이게 그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런 편집 결정은 편견, 혹은 적어도 정치적 편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우선 부시의 중국 방문은 초단위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부시의 실수 장면은 그의 중국 방문을 통틀어 사전에 기획되지 않은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은 국가 원수가 연단 앞에서 근엄하게 서 있는 모습 같은 데서는 발견할 수 없는 현실적인 모습을 드러내 준다.

이런 편집이 부시에 반대하는 편견에 따른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더 강력한 주장이 있다. <뉴욕 타임스>는 문제의 사진에 찍힌 대통령이 클린턴이었더라도 이 사진을 내보냈을까? 앨 고어라면? 오바마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여기에 어떤 편견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벌인 모든 대통령에 대한 편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에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대통령이 벌이는 우스꽝스럽고 인간적이며 당혹스러운 장면은 대박인 순간인데, 그것은 소속 정당 때문이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진을 싣는 편집 태도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에 관계없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공정하기는 하다. 뉴스 판단에 문제가 있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편견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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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전 국정원장 원세훈의 불법 내정 개입 지시와 관련한 글을 썼다. 다음은 댓글에서 이게 무슨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내가 붙인 답글 중 일부다.

[ 김대중의 국정원, 혹은 노무현의 국정원, 혹은 (문재인이 당선되었더라면) 문재인의 국정원 원장이 다음과 같이 지령하였다:

- 햇볕 정책 등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우파 단체들이 많은데, 보다 정공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음. 우리 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과 정부 정책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할 것.
- 심리전단이 보고한 <젊은층 좌경화를 위한 심리전 강화방안>은 내용 자체가 바로 우리 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명심할 것.
- 아직도 일부 국민들은 강경한 대북 압박을 통해 북한의 위협을 막는 것이 낫다는 잘못된 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는 안보교육이 절실함.
- 수구 세력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선전 선동하며 국정 운영을 방해. 좌시해서는 안 됨.
- 일부 언론의 편향된 정부 비판, 극우파 옹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함
- 외부의 적보다 더 다루기 힘든 문제가 수구 보수파들이므로 어버이연합, 일베, 뉴라이트연합 등 국내 내부의 적에 확실히 대처하도록 만전을 기하기 바람. ]

이렇게 지령하였다. 자, 니는 뭐라고 말할래?

저는 뭐라고 말할까? 위의 내용과 똑같이 썼을 겁니다.

원세훈은 국민의 일부를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민주적 권리를 침해하도록 사주하였으며, 선거 등 민감한 시기에 여론을 조작하여 정부 여당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도록 부추겼으며, 국가 안보를 위해 써야 할 인력과 자원을 4대강 사업 홍보 같은 정권 치적을 만드는 데 유용했다. 이게 그가 국정원장으로서 한 일이다. 애초에 그는 국가 안보나 정보는 관여해 본 적이 없는 비전문가며, 국정원 안에서도 '원주사'(주사는 6급 공무원 직급이다)라고 불렸다고 할 정도로 국가 안보 기관 총수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은 좌파나 야당뿐만 아니라 우파와 여당에서도 통탄해 마지않아야 할 일이다. 애먼 일 하느라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국정원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일을 용인하기로 하면, 정권이 바뀌어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원세훈 사건에 별로 적극적인 보도를 보이지 않았던 보수 언론들이 이 문제를 짚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의 한 기사는 내가 썼던 것과 거의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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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은 아전인수나 이중기준을 벗어나야만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게 된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기 때문에, 우리 편에 관대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인지상정의 유혹과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면, 작게는 하는 말이 남 귀에 닿지 않을 것이며, 크게는 사회와 나라를 아우르는 공통의 가치 같은 것은 사라지고 그저 갈리고 나뉘어 벌이는 팍팍한 싸움판만 존재하게 된다.

이중기준을 벗어나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이쪽과 저쪽을 바꾸어 대입해 보는 것이다. 이게 우리 편이 벌인 일일 때도 나는 똑같이 비판할 수 있는가. 혹은 이게 상대편이 벌인 일일 때도 나는 똑같이 칭찬할 수 있는가. 부시가 아니라 오바마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똑같은 사진을 올릴 수 있겠는가. 고은태가 아니라 강용석이 그 위치에 있었더라도 옹호할 수 있겠는가. 글 쓰고 말 할 때 이런 상대적 대입법을 생활화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잘못은 잘못이라서 비판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한 잘못이라서 비판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결국 사회의 가치를 혼란시키고 무너뜨린다.

상대편을 씹는 만큼 우리 편을 씹어라. 애초에 우리 편은 왜 우리 편이 되었는가? 내가 동의하고 지향하는 가치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편이 된 게 아닌가? 그런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지면 같은 편에서부터 신랄하게 씹어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 편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 편이 우리 편다운 우리 편이 되려면 안에서부터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필요하면 팔을 반대로 꺾어서라도 씹어라.

편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으나, 그러한 인식만으로 세상 모든 일과 사람을 판단하는 편견의 노예들만이 우글거리는 세상은 살기에 너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든다. 양쪽 다 마찬가지다. 원세훈이 저 짓 한게 뭐가 잘못이냐고 말하는 사람과 이명박 까자는데 과장이면 어떻고 소문이면 어떻냐고 말하는 사람은 맞모금 양쪽에 존재하는 완전한 대칭상이다. 원세훈 비판하면 대뜸 종북 딱지부터 들고 나오는 인간과 이명박이 대통령 되고 나니 산삼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인간은 각각 양쪽 노예 집단의 엑기스쯤 될 것이다.

지금은 원세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일만 말해보자. 맨 위에 쓴 알렉스 존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원세훈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새누리당 정부의 국정원장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국정원장이어서다. 다시 말해 어느 당 정부에서든 국정원장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원세훈의 불법 행위의 문제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분들은 그런 식의 생각과 발언이 자신의 편견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말고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당신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대신 나는 반대쪽 정부의 국정원장이 비슷한 일을 벌였을 때 똑같이 삐삐 삐삐라는 비판의 글을 쓸 것을 약속드린다.

 

덧글

  • eg35 2013/03/26 15:39 # 답글

    우와, 그동안의 들풀님은 지나치게 '저널리스트'라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딱딱했는데 이런 강한 어투는 처음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깊이있고 동시에 유머가 있지만 인간미가 조금 느껴지지 않는달까요? 그래도 제일 좋아하고 닮고 싶은 글 중 하나입니다.
    원세훈 출국금지는 됐다는데 제대로 심판이 가능할지.. 민주당은 글렀고, 안철수가 국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삼아주길 기대합니다
    분야가 다르지만 보안 전문가잖아요? 방송사 해킹같은거보다 몇만배는 중요한 문제죠
  • deulpul 2013/03/29 10:02 #

    원래 하고 싶은 이야기 맘껏 하자고 만든 공간이라서 이런 모드가 정상인데, 어느 새 점잔 빼는 꼴이 되어 왔네요. 그래도 마지막에 거친 어투는 다시 보면서 순화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여러 모로 꽤 시급한 일이라서 4월 말이나 5월까지 기다리면 안 될 것 같고, 사실 저는 안철수에게 별다른 기대가 없습니다. 그가 이런 상식과 원칙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다면 좋긴 하겠습니다만...
  • 타츠야 2013/03/26 16:36 # 삭제 답글

    당연하죠. 정치인 원세훈씨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국가 공무원 원세훈씨를 비판하는 것인데 그걸 곡해하는 사람들이라니.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들플님 글에 비판할 부분이 있으면 저도 앞으로 계속 :-) )
  • deulpul 2013/03/29 10:04 #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자란 부분은 언제든 깨우쳐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살살 다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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