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리우스와 인종 차별 섞일雜 끓일湯 (Others)

인종차별

우연히 보게 된 글이다. 한국인의 인종 차별이 상당하다는 신문 기사에 대한 해설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일부가 옮겨져 있는데, 그 맥락이 조금 낯설다. 이 글에서 아우렐리우스는 인종 차별에 반대하거나 이를 경계하는 것 같은 맥락으로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해당 부분은 인종 차별과는 직접적인 상관없이, 인간의 본성에 신성의 일부가 담겨 있으므로 나쁜 놈들이라고 해도 미워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아우렐리우스적인 것으로 새겨야 옳을 것 같다.

해당 부분은 제2권의 첫 번째 대목이다. 한글 번역본이 없어서 영문 번역본 세 개를 비교해 보았다. 내용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거의 유사하다.


아침 일찍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오늘 나는 꼬치꼬치 캐묻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 폭력적인 자, 기만하는 자, 시기하는 자, 야박한 자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이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진정한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성이 옳다는 것과 악의 본성이 그르다는 것을 알며,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의 본성 자체는 나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핏줄이나 종족이어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신성의 일부를 나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잘못에 빠뜨지리 않으므로 나는 그들로부터 해를 입을 수 없으며, 나는 나와 유사한 사람에 대해 화를 내거나 미워할 수도 없다. 우리는 두 발, 두 손, 두 눈꺼풀, 위 아래의 이[齒]처럼 함께 일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반하여 일하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며, 타인에 대해 화를 내거나 그를 거부하는 것은 적대감이 되는 것이다. (A. S. L. Farquharson 역, 옥스포드, 1989)





매일 아침 가장 처음 할 일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참견꾼, 은혜를 모르는 자, 난폭한 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천박한 자들을 만날 것이다. 선악에 대한 무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선이 본성적으로 아름다우며 악이 추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나는 이렇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이 본질적으로 나의 형제들임을 알고 있다. 핏줄이나 혈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와 비슷하게 이성을 물려받고 신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다. 누구도 내가 내 의지를 거슬러 나쁜 일을 하도록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나는 내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미워할 수 없다. 우리는 두 발, 두 손, 두 눈꺼풀, 위 아래의 이처럼 함께 일하도록 이 세상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타인에 반하여 일하는 것은 본성에 어긋난다. 타인을 미워하거나 유기하는 것보다 더 타인에 반하여 일하는 것이 있겠는가. (C. Scot Hicks와 David V. Hicks 역, 스크라이브너, 2002)





하루를 시작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오늘도) 참견꾼, 은혜를 모르는 자, 난폭한 자, 사기꾼, 시기하는 자, 무뚝뚝한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갖게 된 것은 선악을 구별할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옳음을 알며, 악의 본성도 인식하고 그것이 그름을 알며, 잘못을 저지르는 자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의 본성이 나의 그것과 비슷함을 안다. 그가 나와 핏줄이나 종족이 같아서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신성의 일부를 그들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로부터 해를 입을 수 없으며, 나와 유사한 사람으로 인하여 분노할 수도 없으며, 그를 미워할 수도 없다. 우리는 마치 두 발, 두 손, 두 눈꺼풀, 위 아랫의 이처럼 함께 일하도록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반하여 일하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며, 타인에 대해 화를 내고 그를 거부하는 것은 그에 반하여 일하는 것이 된다. (Robin Hard 역, 옥스포드, 2011)


여기서 같은 핏줄이나 종족을 거론하는 것은, 핏줄이나 종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을 똑같이 대하라는 의미라기보다, 핏줄이나 종족이 같더라도 사유함에 있어서는 그런 육체적인 측면보다 신성을 가진 본성을 공유한다는 측면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인 듯싶다.

이것은 철학적 군주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민족을 넘어서서는 때로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벤저민 아이작이 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인종주의 시발(The Invention of Racism in Classical Antiquity)>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대규모 학살이 도덕적 이슈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어떤 지도자가 다른 지도자보다 유달리 살육에 더 흥미를 가질 수는 있지만, 한 지도자가 점잖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한 민족을 멸종시키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사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마르쿠스는 아이지게스 족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멸종시키기를 원했다고 한다(71.13). 그들을 완벽히(utterly) 멸종시키기를 원했으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왕권 찬탈 기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함을 후회했다는 것이다.

또 쿠아디 족에 대해서는 군대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동시에 그들이 자기네 땅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디오는 "이런 조처를 취함으로써 황제는 그들의 땅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고통을 주려 했다"라고 썼다. 이민족을 이런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앞서 살펴 본 아르디아에이 족의 멸종 사례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또한 자신의 강력한 적을 인간적으로 다루곤 했다는 기록도 있다. 카시우스 디오도 그렇게 썼다(71.14). 그러나 그런 사례로 제시된 것을 볼 때, 이는 적의 지도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우렐리우스 시기에 만들어진 기둥에 조각된 게르만 족(쿠아디) 참수 장면.
아우렐리우스가 직접 지휘하고 있는 장면도 있다.


이것은 전쟁과 침탈이 일상이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고려해야겠지만, 여하튼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로마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측면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볼 때, 아우렐리우스는 인종 차별에 반대한 사람이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들여다보려 했던 '로마인'이라고 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 이미지: 벤저민 아이작의 책 중에서.

 

덧글

  • 초록불 2013/05/19 12:05 # 답글

    옳은 말씀입니다. 제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고대에도 이런 보편적 인식이 있었다는 정도의 이야기죠.
  • deulpul 2013/05/19 12:32 #

    주제넘게 참견을 하여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는 '참견꾼' 같은 모양이 되어버렸네요. 말씀대로 그러한 인식, 더 나아가 그런 구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로서 값지다고 하겠습니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아우렐리우스를 잠깐이나마 훑어보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 Jane 2013/05/19 14:41 # 삭제 답글

    제가 잘 이해한건지 모르겠지만..공감해요.
    백인들의 동양인 차별에 불같이 화를내면서도
    차에 있다가 흑인들이 무리지어 지나가면 오토락버튼으로 문을 잠그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웬지 차별이라는건 종이한장 차이 아닐까 생각했었답니다.
  • deulpul 2013/05/20 14:07 #

    그렇지요. 한국(인)도 다른 민족/인종에 대한 편견에서는 남 못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한 도시를 지나는데, 분명 도시 가운데를 꿰뚫고 지나면 거리도 짧고 시간도 적게 걸리는데 구글 맵이 도시 밖을 빙 둘러가라고 찍어준 적이 있습니다. 갈 때는 구글 맵을 따라 갔고 올 때는 무시하고 가운데로 질러 왔는데, 시간은 훨씬 적게 걸렸습니다만 온통 흑인 천지였습니다. 나중에 구글 맵이 그런 점까지 고려해 경로를 찍어준 것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잠깐 하다가, 제 안에 요요히 살아 있는 편견을 발견하고 스스로 창피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제 자동차의 매뉴얼에는 차 타면 출발하기 전에 문을 잠그라는 말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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