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지젝, 월 스트리트 저널 섞일雜 끓일湯 (Others)

노엄 촘스키와 슬라보예 지젝이 서로를 비난하며 말싸움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촘스키는 지젝에게 무의미한 말장난이나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했고, 지젝은 촘스키가 자기가 좋아하는 실증적인 근거들도 챙기지 못한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출처는 <월 스트리트 저널>이다. 해당 기사(아래 번역)를 보면, 이 글을 쓴 사람은 좌파의 두 학자가 서로를 비난하며 싸우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이 신문의 정체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각각 자본주의와 미국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평생 비판해 온 두 사람이 서로를 할퀴며 꺼내보이는 상처가 얼마나 재미있을지 짐작이 된다.

참고로, 촘스키가 지젝을 비판했다는 언급은 작년 12월에 나온 것으로 인용되었지만, 그가 '공허한 이론'을 비판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정리해 봤으면 좋겠다. (정리하겠다도 아니고 정리해 봤으면?)


촘스키 대 '엘비스', 좌파 둥지 안의 다툼
잦은 실수와 공허한 이론. 둘 다 맞는 것 같다.

By Sorab Ahmari

좌파 학계의 두 스타가 충돌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팝콘을 끌어안고 편안히 앉아서 구경하면 된다. 이 교수님들은 서로 사기라고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시끌벅적한 가족간 싸움을 벌이고 있다.

다툼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언어학자이자 좌파의 아이콘인 노엄 촘스키가 인문학계에 널리 퍼진, 프랑스 학계의 영향을 받고 난해한 말로 가득 찬 문화연구를 비난하면서 시작되었다.

촘스키는 지난 12월의 한 인터뷰에서 "나는 다음절(多音節)로 된 화려한 용어를 동원하면서, 이론 같은 것은 전혀 없으면서도 뭔가 이론을 가진 척하는 가식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런 것에는 아무런 이론이 없다. 과학이나 기타 진지한 분야에 속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의미에서의 이론 말이다."

그리고 나서 칼을 꺼내 들었다. "지젝은 그러한 풍조의 극단적인 예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것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촘스키가 말하는 사람은 학계에서 유명인 대접을 받는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다. 마르크스나 프로이드 등으로부터 끌어온 통찰과 대중 문화 소재를 연결하는 지젝의 재주('<쥐라기 공원>은 부성(父性)의 트라우마에 관한 드라마이다'라는 식)는 지난 20년 동안 대학가에서 컬트적인 추종자들을 만들어 왔다.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은 지젝을 '문화 이론의 엘비스'에 비유했으며, 그의 사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학술지인 <International Journal of Žižek Studies>도 있을 정도다.

촘스키의 발언은 얼마 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블로거들이 이를 발견하면서 널리 회자되었다. 이달(7월) 초에 지젝은 반격을 날렸다. 그는 런던 대학의 한 토론자에게 "촘스키는 늘 실증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데, 글쎄, 그보다 더 자주 실증적으로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독자들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둘 중 한 사람을 응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두 교수 말이 다 옳다.

지젝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번역자는 아래 제시된 세 가지 사례의 번역에 최선을 다하였음.)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우리는 편집증적인 전쟁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거기에서 가장 큰 과제는 적이 누군지, 그의 무기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편집증적인 편재(遍在)의 정반대가 그 탈실체화가 아닌가?"

히틀러에 대해: "히틀러의 문제는 그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의 폭력은 충분한 정도로 '본질적'이지 않았다. 히틀러는 실제로 작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행동은 근본적으로 반작용(반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도록 행동하였으며, 유사 혁명의 거대한 장관을 연출함으로써 자본주의 질서가 생존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대해: "앵글로-색슨의 화장실은 프랑스와 독일 화장실과의 차별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그와 같이 다양한 형식의 화장실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각각의 화장실이 채택하려고 하는 트라우마적인 과잉이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종종 실증적인 잘못을 범한다."

예컨대 1977년에 잡지 <네이션>에 쓴 악명 높은 에세이가 있다. 이 글은 폴 포트 정권의 학살이 기승을 부릴 때, 촘스키가 경제학자 에드워드 허먼과 함께 쓴 글이다. 여기서 필자들은 캄보디아에서 벌어지는 크메르 루즈의 잔학 행위를 '주장'이라고 폄하하고, "그런 처형은 기껏해야 수천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나 "크메르 루즈의 영향력이 닿거나 빈농들이 격렬히 항거하는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라는 주장에 더 신뢰를 두었다. (크메르 루즈의 학살로 희생된 캄보디아인은 170만 명에 이른다.)

또 철의 장막 뒤의 삶에 대한 촘스키의 주장: "미국의 폭압과 폭력에 의해 초래된 상태에 비하면, 러시아 통치 아래의 동유럽은 실질적으로 천국이었다."

진주만에 대해: "미국, 영국, 네덜란드의 식민 영토에 대한 일본의 공격은 어떤 점에서 볼 때 아시아 사람들에게 매우 유리한 일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9/11에 대해: "오바마는 '9/11 공격이 알 카에다에 의해 수행된 것이라는 점을 신속하게 파악했다'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 때 이후 어떠한 신뢰할 만한 것도 파악된 바 없다. 빈 라덴의 '고백'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내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정도의 일이다."

촘스키-지젝 싸움이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7월21일에 촘스키는, 지젝이 최근 (자신에 대해) 한 말은 단순한 환상이라고 지적하며 반격을 가했다. 한 블로거는 이 말을 보고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좌파는 제발 서로를 공격하며 제살 깎아먹는 일을 중지할 수 없는가?" 뭐라고? 재미있는 판에 찬물 끼얹지 말라고.


[덧붙임] 7월30일 9:30 am

<한겨레>의 관련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라인 블로그 등을 통해 촘스키의 발언이 회자되자 지제크가 반년 만에 반격에 나섰다. ... 그(지젝)는 폴포트가 살육전을 벌이며 날뛰던 1977년에 촘스키는 <네이션> 잡지에 쓴 글에서 크메르루즈의 학살에 대해 ‘주장일 뿐’이라고 콧방귀를 뀌었는데, 후에 170만명이 학살됐다고 비꼬았다. 또 러시아에 의한 동유럽 지배가 미국의 폭압에 견주면 낙원에 가깝다고 한 촘스키의 발언 등을 문제 삼았다.

이것은 지젝이 한 말이 아니다. 지젝이 촘스키를 비판하며 크메르 루즈를 예로 든 적이 있지만, 위의 내용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한겨레> 기사가 "(지젝이) ... 됐다고 비꼬았다. ... 등을 문제 삼았다"라고 한 부분은 <월 스트리트 저널>에 나온 내용이며, 비꼬거나 문제 삼은 사람은 지젝이 아니라 월 스트리트 기자다. 위 번역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덧글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3/07/29 18:11 # 답글

    그 글쓴이 한번 띨띨하네요 인간들은 그 누구도 한편인적은 없는데?
  • deulpul 2013/07/29 18:38 #

    대부분 그렇지만, 조금 더 범위를 좁히면 두 사람, 혹은 두 개의 흐름에 대해 선호를 가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요.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3/07/29 19:30 #

    네 그래서 글쓴이는 그 두 당사지가 하는 말이 마음에 안드는데

    정말 서로의 편인지 아닌지 구별을 못해서

    그 둘이 같은 편인걸로 착각을 한다음

    내부에서 싸우는 걸로 생각을 하면 웃긴 이야기겠지 하면서 글을 썼다는거군요?
  • deulpul 2013/07/29 20:00 #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참고로 WSJ은 보수적인 성격의 경제 전문 일간지입니다.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3/07/29 20:01 #

    네 님이 생각할만한 이야기를 쓴거랍니다^^ 흘려 넘기셔도 되요
  • 김승훈 2013/07/30 17:37 # 삭제

    지젝보다 더 난해한 글을 쓰시네요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3/07/30 17:51 #

    편먹기 놀이하느라 본래 목적을 잊어버리는걸 많이 봐서

    글쓴이 저 사람도 그러는거 아닌가 생각해봤어요.
  • 민노씨 2013/07/31 20:18 # 삭제 답글

    이게 무슨 편들기 놀이는 아니지만(사람은 편먹고 싸움질하는 걸 참 좋아하고, 이게 인간의 본성인가 싶기도 합니다만....;;; ), 촘스키에 관한 체험치도 적고(촘스키에 관한 이차 비평과 칼럼 몇 개를 읽은 게 다이고), 지젝에 관한 체험치는 더욱 적지만(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대중문화 칼럼을 한두 번 읽은 게 전부) WSJ의 고소해하는 모습은 별론으로, 촘스키의 지적에 좀 더 끌리네요.

    아주 한정적인 체험치의 오류와 선입견을 충분히 인정하는 한계에서, 그러니 무책임한 직관일수도 있겠으나, 지젝은 무의미한 수사적 말장난(이X광 씨가 떠오르네요. 물론 수사적 말장난의 수준은 다르겠지만)을 무슨 심오한 이론으로 둔갑시키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지, 고전적인 의미에서, 가령 제가 좋아하는 마르쿠제나 부버 같은 '사상가' 혹은 '철학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 als 2013/08/02 05:21 # 삭제

    지젝에 대한 체험치는 잘 모르는 촘스키에 대해서보다도 적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적으로 말할 용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의미한 책임회피성 수사적 장난 몇개 앞에 덧붙인다고 무책임한 말이 무책임하지 않은것이 되는것도 아니고 편들기 놀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 deulpul 2013/08/07 06:27 #

    저 역시 실증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흐름에 들어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촘스키 쪽의 의견에 더 공감이 갑니다. 문화연구를 포함한 비판이론 작업의 힘과 긍정성을 지지하면서도, 그 일부가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은 참 납득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늘 갖게 되지요.
  • 민노씨 2013/08/10 11:42 # 삭제 답글

    als 님 / 옳은 지적입니다.

    들풀 님 / 저는 오래된 사람이든 최근에 각광받는 이든 상관없이 지금, 여기의 모순과 고통을 좀 더 민감하게 해석할 수 있고, 그 상황을 깨치는데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좋은 철학자라고 생각하는데요(야스퍼스가 그리 말했던 것처럼요). '지젝, 지젝' 타령하는 일군의 논객(?)들이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잘난 척 때문에 (위 als 님께서 옳게 지적한 것처럼) 지젝 자체에 관한 체험치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겨버린 듯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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