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잡습니다'는 당연한 귀결 중매媒 몸體 (Media)

7월 31일 바로잡습니다

지난 4월에 냈던 '낸시 랭 BBC 초청 공연 취소' 관련 기사가 잘못되었다는 정정문이다. 영국 BBC 방송이 낸시 랭을 초청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이런 논란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 하나 있었다.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BBC에서 왜 낸시 랭을 초청하는가? 본인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낸시 랭을 예술가로 평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돌출 이벤트로 화제를 모으고 괴상한 이름 석 자를 알리며 국내에서 연예인에 가까운 준 공인이 되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예술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BBC의 행사는 '세계적인 예술인들이 모여 벌이는 행사'라고 했다. 낸시 랭이 세계적인 예술가가 된 것을 우리만 모르고 있었던가? 백남준이나 윤이상처럼? 그럴지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상식들로만 생각하자면, 영국 공영방송이자 세계적 권위와 공정성을 자랑하는 BBC가 낸시 랭을 세계적인 예술인님으로 정중히 모셔가 공연을 하게 한다는 것은 도대체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이른바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 사항인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낸시 랭이 BBC 초청을 받았다고 자랑한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고, 일부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까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을 제기한 사람이 변희재를 중심으로 한 인간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다른 쪽 인간들은 이러한 의심을 애써 외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일은 흔히 벌어진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행사가 턱없이 부풀려지거나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심지어 조작까지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외국의 유명한 무언가를 팔아 그 명성에 기대며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고, 그러면서도 그게 사실인지는 국내에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온갖 수상쩍은 교육 기관에서 받은 가짜/유사 학위들이 그렇고, 나꼼수의 '미국 유명 대학 초청 특강'도 마찬가지다. 낸시 랭의 BBC 초청 공연도 그러한 맥락에서 사실 여부가 확인되었어야 옳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생략되었다.

이 글은 낸시 랭이 왜/어떻게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나를 들여다보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보도 관행 때문에 이런 '바로잡습니다'가 나왔나를 되짚어보려는 것이다. 이 점은 문제의 기사를 복기하여 보는 것으로 아주 간명하게 확인할 수 잇다.



"팝아티스트 낸시 랭(34·사진)이 <비비시>(BBC) 방송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해 펼치려던 공연 계획"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일단 넘어가자. 기사는 첫 문장에서 "취소됐다"라고 단정적으로 썼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을 보면, 이것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한 측근'의 주장에 불과하다. 이 경우, 언론이 보도할 수 있는 사실은 '누가 그런 말을 했다'라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기사가 쓸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단락의 첫 문장이 전부다. 이러한 주장을 놓고 마치 기자가 확인한 것처럼 '취소됐다'라는 표현을 하면 안 된다.

김 아무개씨가 "내 귀에 도청장치가 들어있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김 아무개씨의 귀에는 도청장치가 들어 있다"라고 쓸 수 있는가? 똑같은 문제다.

근거가 전혀 없는 단정이다. 이런 문장이 쓰인 것은 역시 두 번째 단락에 나오는 '한 측근'의 주장 때문이다.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단정하여 서술했다는 점은 ①과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누리꾼이 BBC에 항의하는 바람에 초청 공연 계획이 취소되었다'라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이다. 의구심이 드는 내용이면 사실을 찾아 확인해 주는 게 언론이 독자에게 해 주어야 할 일이다. 주장과 소문은 귀속말로도 전해들을 수 있고 트위터로도 얼마든지 얻어들을 수 있다. 그런데 기사는 의구심이 드는 개인의 주장을, 확인은커녕 오히려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여 독자에게 들이밀었다.

기사 내용의 가장 중요한 출처인 취재원이 익명으로 되어 있다. '측근'은 낸시 랭의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아파트 경비원일 수도 있고 미장원 언니일 수도 있고 중간에 끼어 일을 도모해주는 부정직한 거간꾼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기사가 인용한 내용들이 아무런 공신력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취재원이 익명이 되어야 할 이유, 이를테면 신원이 공개되면 위험에 처한다거나 하는 이유는 전혀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익명으로 뭉개서 보도하는 바람에 기사의 신뢰도가 떨어졌음은 물론이고, 책임질 사람도 없게 되어 버렸다. 책임 안 져도 된다면 거짓말을 하기는 더 쉬워진다.

는 확인되지 않은 낸시 랭의 주장을 사실처럼 썼다는 점에서 결격이다. 맨 처음의 '바로잡습니다'는 바로 이러한 초청 사실이 없었음이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4월에 위 기사가 나오는 시점에서 이미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가 제시되고 있었다. <한겨레>가 이런 주장이 사실인가를 체크해 보기가 불가능하였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 보도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들을 챙겼다면 기사가 저런 형태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석 달도 더 지난 뒤 바로잡습니다를 내보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기자가 그렇게 썼더라도 뉴스 생산 과정에서 걸러졌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게으름이나 무지나 잘못된 편의적 관행에서 나온 것인지, 변희재-낸시 랭 같은 이름들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전자라면 불행하고 후자라면 더 불행한 일이다.

덧붙여, 뒤늦게 수정을 한 '바로잡습니다'의 내용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4월19일치 11면 ‘BBC, 낸시 랭 ‘팝아트 공연’ 취소’ 기사와 4월22일치 30면 ‘낸시 랭과 아무개의 경우’ 칼럼에서 낸시 랭이 <비비시>(BBC) 방송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해 공연을 펼치려던 계획이 취소됐다고 보도했으나, 당시 <비비시>는 낸시 랭을 직접 초청한 일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석달 반이나 지난 지금 그게 어떻게 확인되었다는 것인가? BBC가 그런 일이 없다는 점을 이제와서 밝힌 것인가? 아니면 낸시 랭 본인이나 '측근' 등이 사실이 아니라고 실토한 것인가? 어떤 법적인 절차를 밟는 동안 확인된 일인가? 중요한 내용이 마지막까지 빠져 있다.

이러한 '바로잡습니다'를 냈다는 것 하나는 높이 살만한 일이다.

 

덧글

  • 민노씨 2013/08/06 02:38 # 삭제 답글

    "이것이 게으름이나 무지나 잘못된 편의적 관행에서 나온 것인지, 변희재-낸시 랭 같은 이름들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전자라면 불행하고 후자라면 더 불행한 일이다."

    이 문장이 아주 인상적이네요. : )
    역시 들풀 님입니다!
  • deulpul 2013/08/07 06:58 #

    과찬의 말씀이지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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