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정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지난 해의 마지막 날 밤, 나는 피천득의 '송년(送年)'을 읽었다. 세 번쯤 읽었다. 복잡하고 현란한 글들보다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말금한 글이 한 해를 보내는 조용한 밤에 더 좋았다.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有限)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 그러기에 세모(歲暮)의 정(情)은 늙어 가는 사람이 더 느끼게 된다. 남은 햇수가 적어질수록 1년은 더 빠른 것이다.


이 글이 언제 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작품집 <산호(珊瑚)와 진주(眞珠)>는 1969년, 그의 나이 만 59세에 나왔으니 그 이전일 것이다. 본문에서 그는 "나는 반 세기를 헛되이 보내었다"라고 한다.


새해에는 잠을 못 자더라도 커피를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도록 노력하겠다. 눈 오는 날, 비 오시는 날, 돌아다니기 위해 털신을 사겠다. 금년에 가려다가 못 간 설악산(雪嶽山)도 가고, 서귀포(西歸浦)도 가고, 내장사(內藏寺) 단풍도 꼭 보러 가겠다.


그는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어느 해 끝무렵에 그는, 새해에는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도록 '노력하겠다'라고 결심한다. 남들은 새해면 끊자고 다짐하는 것들인데, 그는 하자고 다짐한다. 해가 거듭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구속과 속박에서 조금씩 벗어나 삶을 좀더 관조하며 걸어갈 여유가 생긴 덕분이 아닌가 싶다. '마음 조심'을 덜 하여도 되는 것처럼 쓴 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도록 노력하겠다는 결심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술 담배를 감당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올해가 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다지 슬퍼할 것은 없다. ... 그리고 무엇보다 조춘(早春) 같은 서영이가 시집갈 때까지 몇 해 더 아빠의 마음을 푸르게 할 것이다.


딸 서영이는 피천득의 수필에 자주 나온다. 아예 '서영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도 있다. 그 자신이 수필이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라고 하였거니와, 수필가가 솔직한 바람에 그 딸까지 솔직하게 등장한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기억하는 피천득의 수필 속에서, 그의 딸도 이른 봄처럼 어리거나 앳된 모습으로 고정되어 함께 기억된다.

물리학자로서 성취를 이루고 미국에서 교수로 있는 따님은 이제는 저 글을 쓸 때의 아빠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슬하에 아들 하나가 있어, 아빠의 마음을 푸르게 하던 자신처럼, 이제 그 아들이 엄마의 마음을 푸르게 한다. 오늘처럼 해를 보내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한 세대가 바람처럼 휙 지나갔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약간 어지럽고 좀 슬프다.

예전에 백기완이 지금보다 훨씬 젊을 때 쓴 글에서 딸을 '담아! 담아!'하고 부르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 때의 '담'은 어린 소녀였을 것이다. 한두 해 전에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불거졌을 때, 그 어린 딸이 그 때의 아빠만큼 커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백기완에게는 '담'을 돌림자로 하는 딸이 셋 있다. '담아!'가 누구를 가리키든, 연배로는 그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어느 세밑에 아빠는 새 봄과 같은 아이에 대해 썼지만, 어느 순간 아이는 불쑥 자라서 만춘(晩春)과 성하(盛夏)를 지나고 이제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늘 슬픈 일인 것 같다. 내일을 향해 자라는 아기에게조차도. 몇 시간 뒤에 새로 시작될 희망을 아무리 힘주어 말한다 하더라도, 피천득이 말한 세모의 정이란 본질적으로 비정(悲情)이 아닌가 싶다.

 

덧글

  • 2014/01/07 19:3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1/08 09:4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