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파블로프의 개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지난 연말,<슬로우뉴스>에서 송년회를 한다길래 짧은 인사말을 보냈다. 제작에 관여하는 편집진끼리 모여 오붓하게 갖는 송년회인 줄 알있다. 대개 글 인사는 한 번씩 나눈 분들이라서, 인사말에 장난을 좀 쳤다.

행사가 임박하여 알고 보니, 외부 필자와 독자 등 손님까지 초대하는 모임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격식을 갖추고 프레젠테이션 같은 것들로 채울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제작진만 염두에 두고 만든 내 인사말은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사말을 물릴까 하다가, 그것도 또 마땅치 않아서 그냥 분량만 줄여서 다시 보냈다.

대학 때 어떤 선배가 학교 신문에 글을 보냈다. 글이 실리기로 되었는데, 뒤늦게 필자 사진을 한 장 써야 한다며 급하게 선배를 찾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학교 인근 단골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학보사 기자가 선배를 찾아 서둘러 사진을 찍어갔다.

나중에 인쇄되어 나온 신문을 보니, 교수님과 대학원생 등 다른 필자들은 모두 책이 잔뜩 꽂힌 서재를 배경으로 하여 근엄하게 나온 사진이었는데, 이 선배 사진만 특이했다. 그의 뒷쪽으로는 서가 대신, 소줏병과 막걸리통이 잔뜩 늘어선 술집 선반이 배경이 되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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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에서 친 장난이란 별 게 아니라, 옛날 라디오 심야 방송에 나오던 시그널 음악을 깔고서 녹음한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학교 갔다 와서 놀다가 초저녁에 텔레비전을 보고 밤에 숙제나 공부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것이 내 어릴 때 평범한 날의 일과였다. 중학교 1, 2학년 쯤 되면, 내 책생 서랍 속에는 멀쩡한 라디오, 완성되지 못한 라디오, 망가진 라디오를 다 합쳐 대여섯 개의 라디오가 굴러다니게 된다. ('완성되지 못한 라디오'가 무슨 말인지 감을 잡으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마이마이나 워크맨 같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도, 나는 꼭 라디오 기능이 달려 있는 것만 원했다. 그렇게 해서 라디오 방송을 장난 삼아, 혹은 심각하게 녹음한 테입도 많았다. 대학가요제나 개그 콘테스트 같은 것들은 해마다 열심히 녹음했는데, 지금은 다 사라졌다. 잘 보관했더라면 좋은 자료가 되었을 텐데.

언젠가부터, 아마 누님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은데, 밤 10시 이후에 하는 심야 프로그램에 빠지게 되었다. 그 뒤로 7, 8년 가까이 이 방송들을 열렬히 들었다. 사실 당시 한국 청소년으로서 열렬히 할 수 있는 일이란 대개 이런 것 밖에 없기도 했다.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모두 라디오를 끼고 살자니, 심야 프로그램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시간대의 프로그램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프로그램들이 시작될 때 나오는 시그널 음악에 길이 들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 밤을 잊은 그대에게


▶ 밤의 디스크쇼


▶ 별이 빛나는 밤에


▶ 0시의 다이얼


▶ 영화음악실


▶ 2시의 데이트


▶ 25시의 데이트



이 연주 음악들은 내게는 방송 진행자들의 목소리와 단단히 맞물린 음악 신호다. 지금도 이 음악들을 듣노라면, 중간에 황인용 아저씨나 이종환 아저씨가 불쑥 튀어나와 "쌀쌀한 날씨입니다. 오늘 하루 어떠셨습니까" 하고 말할 것만 같다.

이 음악들을 틀면 언제나 이유없이 마음이 아프다. 어딘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마음 한쪽이 싸- 하고 저리면서 아프다. 워낙 폴 모리아나 프랑크 포셀 류(流)의 편곡과 연주 스타일이 사람의 마음을 고문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 음악들이 특히 더 그렇다.

그 아픔의 연원이 뭔지는 모르겠다. 딱히 슬픈 일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음악들만 들으면 마음이 싸- 하고 아파진다. 아주 기계적인 반응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 대신 통증이 나온다는 것이 좀 다르긴 하다.

 

덧글

  • 미스티 2014/01/13 00:28 # 삭제 답글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을 만난것 처럼 반가운일이 없죠..
  • deulpul 2014/01/13 12:44 #

    맞습니다. 정서적 공감, 더구나 저 마음 밑바닥에 있는 부분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는 경우 정말 반갑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민노씨 2014/01/14 01:07 # 삭제 답글

    ㅜ.ㅜ; 너무 너무 공감합니다....

    "이 음악들을 틀면 언제나 이유없이 마음이 아프다. 어딘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마음 한쪽이 싸- 하고 저리면서 아프다. 워낙 폴 모리아나 프랑크 포셀류의 편곡과 연주 스타일이 사람의 마음을 고문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 음악들이 특히 더 그렇다.

    그 아픔의 연원이 뭔지는 모르겠다. 딱히 슬픈 일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음악들만 들으면 마음이 싸- 하고 아파진다. 아주 기계적인 반응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마치 들풀 님의 목소리로 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 민노씨 2014/01/14 01:09 # 삭제 답글

    추.
    영화음악실은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인 줄 알았는데, 음악이 다르네요? 다른 '영화음악실'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은임 방송을 라디오로 녹음해서 워크맨으로 엄청 듣고 듣고 또 듣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 deulpul 2014/01/14 15:31 #

    저기 올라가 있는 음악은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시그널로 기억합니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한 프로그램 'FM 영화음악'의 시그널은 아마 http://www.youtube.com/watch?v=4Y-FmsKz-fU 이것이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시그널을 쓴 실제 방송 녹음도 있네요. 2003년 녹음이라고 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KjMd_SOAGvs
  • pine25 2014/01/14 21:37 # 삭제 답글

    문학에 문외하며, 기억용량이 초라해도 앞의 3곡에는 금방 감정이 반응하네요.
    그기까지는 세월의 질곡이 빼곡 했건만 마치 인터럽트 시그널 받은마냥
    배경음악을 듣는 순간 그 시절로 바로 몰입 되었답니다.
    막막하고 불완전했던 청춘의 애환을 보듬어 주며 젊음의 밀애를 담아내었던
    프로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결핍였던 그 시절,
    어른의 범주를 향한 수단물로 밀려났던 젊음 세대를 한 인간 개체로 인증해주며
    공감의 장을 마련하였기에 라디오가 주는 향수는 진하고 아리나 봅니다.
  • deulpul 2014/01/14 22:30 #

    그저 추억담만 늘어놓았을 뿐,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정말 정확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라디오는 언제나 변함없는 친구처럼, 바로 내 앞에 앉아서 내 말을 들어주고 나에게 말해 주고 나를 염려해 주어서 그토록 오랜 동안 빠져들 수 있었던가 봅니다. 당시 라디오를 듣던 청소년들에게 이 프로그램들은 나를 이해해주는 분명한 양방향 소통 매체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통찰을 가지시고서 문외한이라니,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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