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까운 데에 큰 식품점이 두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매주 일요일에 신문을 나눠준다. 장을 다보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면, 점원이 물건을 스캔하고 값을 찍으면서 "신문을 드릴까요?" 하고 물어본다. 계산대 옆에는 여러 섹션과 광고지로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신문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발행되며 이 주에서 두 번째로 발행부수가 많은 일간 신문의 일요일판이다.
신문을 원하냐고 물어보는 것은 '공짜로 줄 테니 가져가겠느냐'는 뜻이다. "예"라고 대답하면, 내가 산 물건들과 함께 종이 봉투나 비닐 봉투에 담아 준다. 신문을 받기 위해서는 구매액이 5달러 이상만 되면 된다. 그 기준만 넘으면, 카트 하나 가득 장을 본 사람이든 몇 가지만 산 사람이든 똑같이 신문을 챙겨올 수 있다.

나는 거의 대부분 신문을 받아 온다. 이 신문 일요판의 값은 2.50달러다. 계산서를 보면 일단 신문을 산 것으로 되어 있고, 바로 밑에 'Free Sunday Newspaper -$2.50'라는 항목이 붙어서 그 값을 도로 뺐다. 결국 공짜다.
내가 이 식품점에서 산 빵, 오렌지, 양상치, 통조림, 우유를 생산하는 데는 돈이 든다. 신문을 생산하는 데도 돈이 든다. 그런데 빵, 오렌지, 양상치, 통조림, 우유를 사는 데는 돈을 냈지만, 신문은 그냥 받아 왔다. 봉투에 담긴 물건들 중에서 이 신문은 내가 돈을 지불하지 않은 유일한 상품이다. 생각해 보면 낯선 일도 아니다. 나는 이 신문이 생산한 기사를 온라인으로 보면서 돈을 낸 적이 한 번도 없다.
집에 가져온 신문은, 바쁘지 않으면 그날 저녁에 대충 훑어보고 폐지 재활용 박스에 넣는다. 바쁜 날은 안 읽은 신문, 잡지 더미에 올려져서 며칠을 간다. 어떤 경우나, 넓지 않은 내 집에서 물리적 부피를 차지한다. 더구나 이 두툼한 일요일판 신문의 상당 분량은 광고지다. 거기 실린 기사는 대부분 신문 웹페이지에도 올라와 있을 것이다. 기사를 웹으로 본다면, 이렇게 종이를 쌓아두거나 광고지를 정리하는 일 같은 것은 필요없을 것이다.
신문을 훑어보다가 기억해 두어야 하는 기사가 있으면 뒹굴뒹굴 굴러서 컴퓨터로 간다. 구글이나 신문 웹페이지의 검색어를 사용하여 해당 기사를 찾고, 그 링크를 보관해 둔다. 옛날 같았으면 신문을 오려 스크랩을 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체 이런 일을 왜 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이런 일이란, 똑같은 기사를 컴퓨터로 쉽게 볼 수 있음에도 무거운 종이 신문을 받아와 집안에 처박아 두고 시간 나면 읽다가 결국 다시 웹 버전으로 가는 꼴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의 장점이 있다면, 필요하든 아니든 해당 일치 기사들을 주르륵 훑어볼 수 있다는 점과, 가끔 정보가 되기도 하는 광고를 볼 수 있다는 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요일 점심 때나 이른 오후쯤은 식품점에 사람이 몰려들어 계산대에 긴 줄이 형성된다. 차례를 기다리며 유심히 살펴 보면, 신문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돈을 받지 않는데도 그렇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으니, 이 주에서 두 번째로 발행부수가 많은 이 신문은 독극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셈이다.
또 이런 생각은 그들만 하는 것도 아니다.
2004년에 <워싱턴 포스트>는 불과 2년 사이에 구독자가 6%, 숫자로 4만7천 명이나 줄어드는 일을 겪었다. 전에도 독자는 조금씩 줄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앞 3년 동안에는 7천 명 남짓한 구독자가 줄었을 뿐이다. 구독자 감소 현상이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특히 전문직을 가진 젊은 독자들이 자기네 신문을 잘 구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문을 구독하지 않거나 구독을 취소한 45세 이하 시민 일부를 뽑아 포커스 그룹을 만들어 조사를 해 보았다. 6회의 세션이 진행된 뒤 밝혀진 사실 중 하나는, 이 시민들은 <워싱턴 포스트> 종이 신문을 공짜로 넣어 준다고 해도 이를 거부한다는 점이었다. 대표적인 이유는 종이더미가 집안에 쌓이거나 굴러다니는 게 싫다는 것이었다.
포커스 그룹 참여자들은 '이 커다란 종이 뭉치는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라고 생각했으며, 법대를 졸업한 한 전문직 젊은이는 견본으로 제공된 종이 신문의 오피니언 페이지를 넘겨보며 멋있게 꾸몄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도무지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젊은 놈들은 도대체 글러 먹었어. 뒹굴면서 게임이나 하지, 신문 한 장 읽을 줄을 모른단 말야!" 이렇게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신문 '한 장' 읽지 않을지는 몰라도 신문 기사는 다 본다. <워싱턴 포스트>의 포커스 그룹 조사 결과 밝혀진 또다른 사실은, 이들이 정기적으로 뉴스 기사를 읽으며 그 중 일부는 뉴스에 몰두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를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신문을 구독할 동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젊은 놈들 뿐만 아니라 늙은 놈들도 점점 더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포커스 그룹을 지켜본 <워싱턴 포스트> 관계자는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가 동시에 나왔다. 좋은 결과란 이들이 우리 신문에 매우 익숙하다는 점이다. 나쁜 결과란 이들이 돈을 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스란 공기 같은 것이 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가르쳤다"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웹을 통해 무료로 기사를 내보내는 정책을 '종이 신문 구독 감소의 핵심 이유'라고 꼽았다.
포커스 그룹 조사를 한 <워싱턴 포스트>는 종이 지면 혁신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며 대책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러나 그런 대책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포커스 그룹 조사를 한 2004년 이후 8년이 지난 2012년에 이 신문의 주중 구독자는 50만8천 명이었으며, 조사 당시보다 21만 명 이상, 30% 정도가 다시 줄었다. 하루에 75명씩 꾸준히 구독자가 떨어져나간 셈이다.
이러한 현상이 우려할 만한 일이라면, 그 가장 큰 책임은 신문사들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이들은 상당한 비용을 투자하여 뉴스 기사라는 상품을 생산하면서도, 인터넷 독자들이 이를 공짜인 것으로 여기도록 길을 들였다. 인터넷이라는 전례 없는 정보 소통 인프라를 맞아, 신문사들은 환상을 가졌던 것 같다. 인터넷이 몰아다 주는 막대한 독자로 인해 발생하는 광고 수익이 구독 수익을 압도할 것으로 예측했다. 무료로 기사를 풀어줌으로써 구독자 수가 줄더라도, 얼마든지 수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익과 품질 두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인쇄 매체의 수익은 원래 구독에서 나왔다. 신문이 출발할 때부터 그랬다. 돈 주고 신문을 사는 사람들이 매체를 먹여 살렸다. 먹고 살기가 쉽지 않으면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급해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유료 독자가 가장 주요하고 기본적인 수익 원천이었다.
신문에 광고가 실리기 시작한 것은 근대적 신문이 세상에 선을 보인 때로부터 200년 이상 지난 1836년의 일이다. 프랑스에서 발행되던 페니 프레스 신문 <La Presse>가 최초로 광고를 실은 신문이었다. 인쇄된 지면이 광고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그런 방식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La Presse>는 구독료가 다른 신문의 절반 수준이었는데, 광고 게재를 통해 이를 벌충했다. 구독료가 저렴하므로 독자는 쉽게 불어났다. 광고 수주는 '광고 수익 + 유료 독자 증가'라는 환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윈윈 게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다른 신문들도 앞다투어 광고를 싣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쇄 지면의 광고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광고 수주와 게재가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여러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광고주가 매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자도 돈을 내고, 광고주도 돈을 낸다. 그런데 독자는 수가 많고 개개가 내는 돈은 소액이다. 반면 광고주는 수가 적고 뭉터기 돈을 낸다. 따라서 신문의 수익 원천이 되는 측이 신문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 힘은 독자보다 광고주가 훨씬 세다. 이렇게 광고를 싣는 매체는 본질적으로 아슬아슬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현대 신문이 상업 논리에만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국가와 사회의 감시견 역할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편집권 독립과 저널리즘의 사명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직업 저널리스트 집단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인 직업 저널리스트 윤리의 기초를 세운 월터 윌리엄스는 특히 기억해 둘 만하다.
1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21세기로 접어들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신문 구독자는 일정한 비율로 계속 하락하고 있었지만,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그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위에 쓴 <워싱턴 포스트>의 고민은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 같은 추세의 한 단면일 뿐이다.
신문들이 자기가 공들여 생산한 기사라는 상품을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공급함으로써, 유료 구독 동기를 스스로 없애버렸다는 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와 더불어 몇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전통적으로 독자의 구독과 광고는 신문업에서 수익이 발생하는 두 가지 원천이었다. '독자 - 신문 - 광고주'의 3자 관계는 아주 독특한 것으로, 이런 형태로 판매되는 상품은 매우 드물다. 신문은 그 자체가 상품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주목)이라는 상품을 광고주에게 파는 소매 채널이기도 하다. 독자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광고주에 의해 구매되는 상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신문 수익의 원천인 구독과 광고는 일정한 관계에 묶이게 된다. 그 핵심은 광고가 구독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광고주는 광고료를 지불할 때 많은 상품(독자)을 사기를 바란다. 즉 구독하는 사람이 많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싶어한다. 신문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읽히는가가 광고 수주와 광고 단가를 결정한다. 따라서 신문 제작자는 많은 독자를 만족시키는 좋은 신문을 만들어야 광고도 잘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기사가 무료로 서비스되기 시작하면서, 이 전통적인 관계가 깨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특정 신문을 보는지는 여전히 광고주에게 중요한 사항이지만, 그 내용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구독률이나 열독률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인터넷 신문에 광고를 내는 사람에게는 해당 신문이 얼마나 많은 정기구독자를 갖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얼마나 많은 클릭수와 방문수를 기록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신문사가 인터넷에서 광고를 유치하려면, 독자의 구독을 늘리려는 노력이 아니라 클릭수를 늘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기사를 읽지 않아도 좋다. 일단 클릭하여 들어오게 만들어서, 그 유입이 숫자로 환산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인터넷판에서는 그 말고는 수익 수단이 없으므로,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에 전력하게 된다.
가판에서 하루치를 사든 1년 정기 구독을 하든, 독자가 신문을 사 보는 행위는 그 신문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전제로 한다. 돈 내고 사 볼 가치가 있어야 구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클릭에는 그런 판단이 필요없다. 개개의 기사가 흥미롭기만 하면 된다. 그 신문 전체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을 내는 소비행위도 아니므로(즉 잘못된 소비를 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심사숙고할 필요도 없다.
내용 없는 낚시질 기사가 판을 치고 음란물에 가까운 제목과 사진으로 독자를 낚으려는 기사가 넘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적어도 수익의 측면에서 볼 때 별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허황된 제목으로 낚시질을 하는 것이, 좋은 신문을 만들어 충성스런 독자를 늘리려는 노력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상황이 됐다. 힘들고 느린 후자의 노력보다 전자의 노력을 택하는 것은, 신문 종사자들이 언론 사명 의식을 지니지 못한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왜 한국 신문의 온라인 사이트들이 이런 특징을 유별나게 더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독자와 신문 사이에 계약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돈을 내고 신문을 구매하는 행위는 일종의 계약 관계다. 독자는 신문과 기사라는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하며, 그 대가로 일정한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무를 진다. 신문은 독자로부터 금품을 받는 대가로 다양한 양질의 정보를 수집, 정리, 가공하여 기사의 형태로 생산한 뒤 이를 독자에게 제공한다는 의무를 진다. 이것이 신문 구독의 계약 내용이며, 일종의 구매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신문들이 닷컴을 달고 인터넷을 통해 기사를 무료로 풀어내면서, 이러한 계약 관계는 저절로 해소되어 버렸다. 독자는 기사를 향유하기만 할 뿐,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세심하게 따지는 사람이라면 방문수를 하나 늘려주는 대가를 치른다고 하겠지만, 전통적인 유료 구독에 비하여 볼 때 이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독자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지불받지 않음에 따라, 신문 역시 양질의 상품을 생산해 제공할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신문과 독자는 '금품 제공 - 양질의 기사 제공'이라는 계약 관계에서 풀려나 '무료 열람 - 낚시질로 유입 확대에 골몰'이라는 변태적인 구독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신문과 독자가 함께 망하는 길로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독자는 민주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정보들을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되며, 대신 어떤 연예인이 공연중에 어떤 색깔의 속옷을 내비쳤는지 따위 정보만 축적하게 된다. 신문은 1) 이러한 변태적 구독 관계가 전통적인 정도의 수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생존 위협을 받아야 하며, 2) 뜻 있고 충성도 높은 핵심 독자들이 점점 더 떨어져나가는 상황을 지켜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을 놓고 신문사만 탓할 수는 없다. 1) 신문사를 비롯한 언론이 기여한 바도 있지만, 어쨌든 인터넷에서 정보는 자유로이(즉 공짜로) 유통되어야 한다는 대중적 믿음이 단단하게 형성되었고, 2) 인터넷 사용자들이 정보를 얻는 방식이 개개 언론사에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언론 상품의 단위가 '신문'에서 '기사'로 쪼개졌다), 3) 대안적인 뉴스 소스들이 막대한 양으로 발생되었다는 점 등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전개된 이러한 환경은 모두 언론사의 목줄, 밥줄을 죄는 역할을 해 왔다.
많은 경우, 문제가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잘 살펴보면 그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다. 신문 위기의 경우는 그게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고민이 있다. 문제를 훑어보다 보면, 입에서 '유료화'라는 말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참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인터넷 기사 유료화가 바람직한 것인가, 혹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참으로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너무 왔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 초기에 지적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때, 음악은 당연히 공짜로 다운 받는 것이고, 유틸리티 프로그램들도 당연히 공짜로 받아 깔아 쓰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떠 있는 글은 '퍼가요~♥'만 적어 넣으면 얼마든지 긁어가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음원을 구매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프로그램들도 적어도 공식 영역에서는 불법 설치하여 사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언젠가 신문 기사도 그렇게 될 날이 올까. 지금까지 검증된 바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면 쥐가 고양이만큼 크고 힘이 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방울 달려는 쥐만 피를 봤다. 방울을 단 쥐도 아슬아슬하긴 마찬가지다.
기사와 기자와 저널리즘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을 담당하는 자들을 유혹하는 부조리와 부패가 있고, 세상이 그런 자들에 의해 농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는 한 그렇다. 또 세상에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 있는 한 그렇다.
그렇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그런 저널리즘을 듣고 소비하는 방식은 전과 달라질 것이다. 신문(지)를 펼쳐 보며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며, 공짜로 준다고 해도 거절하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여전히 열렬히 뉴스를 챙기면서도 말이다.
방식은 달라져도 정보라는 상품이 생산되는 데 누군가의 노동이 소모된다는 것은 여전하다. 제대로 잘 만들려고 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신문의 온갖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독자와 신문이 다시 건강한 계약 체결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 전에 이 곳에서 나는, 노래 한 곡당 얼마나 돈을 받으면 기꺼이 유료로 구입하겠는가 하고 여쭤본 적이 있다.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옷을 벗기고 낚시질을 해야 유지할 수 있는 신문의 상황에 짜증과 분노를 토해내는 우리는, 신문이 다시 건강한 정보 상품으로 돌아가는 데에 얼마나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신문을 원하냐고 물어보는 것은 '공짜로 줄 테니 가져가겠느냐'는 뜻이다. "예"라고 대답하면, 내가 산 물건들과 함께 종이 봉투나 비닐 봉투에 담아 준다. 신문을 받기 위해서는 구매액이 5달러 이상만 되면 된다. 그 기준만 넘으면, 카트 하나 가득 장을 본 사람이든 몇 가지만 산 사람이든 똑같이 신문을 챙겨올 수 있다.

나는 거의 대부분 신문을 받아 온다. 이 신문 일요판의 값은 2.50달러다. 계산서를 보면 일단 신문을 산 것으로 되어 있고, 바로 밑에 'Free Sunday Newspaper -$2.50'라는 항목이 붙어서 그 값을 도로 뺐다. 결국 공짜다.
내가 이 식품점에서 산 빵, 오렌지, 양상치, 통조림, 우유를 생산하는 데는 돈이 든다. 신문을 생산하는 데도 돈이 든다. 그런데 빵, 오렌지, 양상치, 통조림, 우유를 사는 데는 돈을 냈지만, 신문은 그냥 받아 왔다. 봉투에 담긴 물건들 중에서 이 신문은 내가 돈을 지불하지 않은 유일한 상품이다. 생각해 보면 낯선 일도 아니다. 나는 이 신문이 생산한 기사를 온라인으로 보면서 돈을 낸 적이 한 번도 없다.
집에 가져온 신문은, 바쁘지 않으면 그날 저녁에 대충 훑어보고 폐지 재활용 박스에 넣는다. 바쁜 날은 안 읽은 신문, 잡지 더미에 올려져서 며칠을 간다. 어떤 경우나, 넓지 않은 내 집에서 물리적 부피를 차지한다. 더구나 이 두툼한 일요일판 신문의 상당 분량은 광고지다. 거기 실린 기사는 대부분 신문 웹페이지에도 올라와 있을 것이다. 기사를 웹으로 본다면, 이렇게 종이를 쌓아두거나 광고지를 정리하는 일 같은 것은 필요없을 것이다.
신문을 훑어보다가 기억해 두어야 하는 기사가 있으면 뒹굴뒹굴 굴러서 컴퓨터로 간다. 구글이나 신문 웹페이지의 검색어를 사용하여 해당 기사를 찾고, 그 링크를 보관해 둔다. 옛날 같았으면 신문을 오려 스크랩을 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체 이런 일을 왜 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이런 일이란, 똑같은 기사를 컴퓨터로 쉽게 볼 수 있음에도 무거운 종이 신문을 받아와 집안에 처박아 두고 시간 나면 읽다가 결국 다시 웹 버전으로 가는 꼴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의 장점이 있다면, 필요하든 아니든 해당 일치 기사들을 주르륵 훑어볼 수 있다는 점과, 가끔 정보가 되기도 하는 광고를 볼 수 있다는 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요일 점심 때나 이른 오후쯤은 식품점에 사람이 몰려들어 계산대에 긴 줄이 형성된다. 차례를 기다리며 유심히 살펴 보면, 신문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돈을 받지 않는데도 그렇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으니, 이 주에서 두 번째로 발행부수가 많은 이 신문은 독극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셈이다.
또 이런 생각은 그들만 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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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워싱턴 포스트>는 불과 2년 사이에 구독자가 6%, 숫자로 4만7천 명이나 줄어드는 일을 겪었다. 전에도 독자는 조금씩 줄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앞 3년 동안에는 7천 명 남짓한 구독자가 줄었을 뿐이다. 구독자 감소 현상이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특히 전문직을 가진 젊은 독자들이 자기네 신문을 잘 구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문을 구독하지 않거나 구독을 취소한 45세 이하 시민 일부를 뽑아 포커스 그룹을 만들어 조사를 해 보았다. 6회의 세션이 진행된 뒤 밝혀진 사실 중 하나는, 이 시민들은 <워싱턴 포스트> 종이 신문을 공짜로 넣어 준다고 해도 이를 거부한다는 점이었다. 대표적인 이유는 종이더미가 집안에 쌓이거나 굴러다니는 게 싫다는 것이었다.
포커스 그룹 참여자들은 '이 커다란 종이 뭉치는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라고 생각했으며, 법대를 졸업한 한 전문직 젊은이는 견본으로 제공된 종이 신문의 오피니언 페이지를 넘겨보며 멋있게 꾸몄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도무지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젊은 놈들은 도대체 글러 먹었어. 뒹굴면서 게임이나 하지, 신문 한 장 읽을 줄을 모른단 말야!" 이렇게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신문 '한 장' 읽지 않을지는 몰라도 신문 기사는 다 본다. <워싱턴 포스트>의 포커스 그룹 조사 결과 밝혀진 또다른 사실은, 이들이 정기적으로 뉴스 기사를 읽으며 그 중 일부는 뉴스에 몰두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를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신문을 구독할 동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젊은 놈들 뿐만 아니라 늙은 놈들도 점점 더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포커스 그룹을 지켜본 <워싱턴 포스트> 관계자는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가 동시에 나왔다. 좋은 결과란 이들이 우리 신문에 매우 익숙하다는 점이다. 나쁜 결과란 이들이 돈을 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스란 공기 같은 것이 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가르쳤다"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웹을 통해 무료로 기사를 내보내는 정책을 '종이 신문 구독 감소의 핵심 이유'라고 꼽았다.
포커스 그룹 조사를 한 <워싱턴 포스트>는 종이 지면 혁신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며 대책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러나 그런 대책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포커스 그룹 조사를 한 2004년 이후 8년이 지난 2012년에 이 신문의 주중 구독자는 50만8천 명이었으며, 조사 당시보다 21만 명 이상, 30% 정도가 다시 줄었다. 하루에 75명씩 꾸준히 구독자가 떨어져나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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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이 우려할 만한 일이라면, 그 가장 큰 책임은 신문사들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이들은 상당한 비용을 투자하여 뉴스 기사라는 상품을 생산하면서도, 인터넷 독자들이 이를 공짜인 것으로 여기도록 길을 들였다. 인터넷이라는 전례 없는 정보 소통 인프라를 맞아, 신문사들은 환상을 가졌던 것 같다. 인터넷이 몰아다 주는 막대한 독자로 인해 발생하는 광고 수익이 구독 수익을 압도할 것으로 예측했다. 무료로 기사를 풀어줌으로써 구독자 수가 줄더라도, 얼마든지 수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익과 품질 두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인쇄 매체의 수익은 원래 구독에서 나왔다. 신문이 출발할 때부터 그랬다. 돈 주고 신문을 사는 사람들이 매체를 먹여 살렸다. 먹고 살기가 쉽지 않으면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급해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유료 독자가 가장 주요하고 기본적인 수익 원천이었다.
신문에 광고가 실리기 시작한 것은 근대적 신문이 세상에 선을 보인 때로부터 200년 이상 지난 1836년의 일이다. 프랑스에서 발행되던 페니 프레스 신문 <La Presse>가 최초로 광고를 실은 신문이었다. 인쇄된 지면이 광고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그런 방식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La Presse>는 구독료가 다른 신문의 절반 수준이었는데, 광고 게재를 통해 이를 벌충했다. 구독료가 저렴하므로 독자는 쉽게 불어났다. 광고 수주는 '광고 수익 + 유료 독자 증가'라는 환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윈윈 게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다른 신문들도 앞다투어 광고를 싣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쇄 지면의 광고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광고 수주와 게재가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여러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광고주가 매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자도 돈을 내고, 광고주도 돈을 낸다. 그런데 독자는 수가 많고 개개가 내는 돈은 소액이다. 반면 광고주는 수가 적고 뭉터기 돈을 낸다. 따라서 신문의 수익 원천이 되는 측이 신문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 힘은 독자보다 광고주가 훨씬 세다. 이렇게 광고를 싣는 매체는 본질적으로 아슬아슬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현대 신문이 상업 논리에만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국가와 사회의 감시견 역할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편집권 독립과 저널리즘의 사명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직업 저널리스트 집단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인 직업 저널리스트 윤리의 기초를 세운 월터 윌리엄스는 특히 기억해 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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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21세기로 접어들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신문 구독자는 일정한 비율로 계속 하락하고 있었지만,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그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위에 쓴 <워싱턴 포스트>의 고민은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 같은 추세의 한 단면일 뿐이다.
신문들이 자기가 공들여 생산한 기사라는 상품을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공급함으로써, 유료 구독 동기를 스스로 없애버렸다는 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와 더불어 몇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전통적으로 독자의 구독과 광고는 신문업에서 수익이 발생하는 두 가지 원천이었다. '독자 - 신문 - 광고주'의 3자 관계는 아주 독특한 것으로, 이런 형태로 판매되는 상품은 매우 드물다. 신문은 그 자체가 상품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주목)이라는 상품을 광고주에게 파는 소매 채널이기도 하다. 독자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광고주에 의해 구매되는 상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신문 수익의 원천인 구독과 광고는 일정한 관계에 묶이게 된다. 그 핵심은 광고가 구독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광고주는 광고료를 지불할 때 많은 상품(독자)을 사기를 바란다. 즉 구독하는 사람이 많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싶어한다. 신문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읽히는가가 광고 수주와 광고 단가를 결정한다. 따라서 신문 제작자는 많은 독자를 만족시키는 좋은 신문을 만들어야 광고도 잘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기사가 무료로 서비스되기 시작하면서, 이 전통적인 관계가 깨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특정 신문을 보는지는 여전히 광고주에게 중요한 사항이지만, 그 내용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구독률이나 열독률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인터넷 신문에 광고를 내는 사람에게는 해당 신문이 얼마나 많은 정기구독자를 갖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얼마나 많은 클릭수와 방문수를 기록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신문사가 인터넷에서 광고를 유치하려면, 독자의 구독을 늘리려는 노력이 아니라 클릭수를 늘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기사를 읽지 않아도 좋다. 일단 클릭하여 들어오게 만들어서, 그 유입이 숫자로 환산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인터넷판에서는 그 말고는 수익 수단이 없으므로,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에 전력하게 된다.
가판에서 하루치를 사든 1년 정기 구독을 하든, 독자가 신문을 사 보는 행위는 그 신문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전제로 한다. 돈 내고 사 볼 가치가 있어야 구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클릭에는 그런 판단이 필요없다. 개개의 기사가 흥미롭기만 하면 된다. 그 신문 전체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을 내는 소비행위도 아니므로(즉 잘못된 소비를 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심사숙고할 필요도 없다.
내용 없는 낚시질 기사가 판을 치고 음란물에 가까운 제목과 사진으로 독자를 낚으려는 기사가 넘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적어도 수익의 측면에서 볼 때 별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허황된 제목으로 낚시질을 하는 것이, 좋은 신문을 만들어 충성스런 독자를 늘리려는 노력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상황이 됐다. 힘들고 느린 후자의 노력보다 전자의 노력을 택하는 것은, 신문 종사자들이 언론 사명 의식을 지니지 못한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왜 한국 신문의 온라인 사이트들이 이런 특징을 유별나게 더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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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독자와 신문 사이에 계약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돈을 내고 신문을 구매하는 행위는 일종의 계약 관계다. 독자는 신문과 기사라는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하며, 그 대가로 일정한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무를 진다. 신문은 독자로부터 금품을 받는 대가로 다양한 양질의 정보를 수집, 정리, 가공하여 기사의 형태로 생산한 뒤 이를 독자에게 제공한다는 의무를 진다. 이것이 신문 구독의 계약 내용이며, 일종의 구매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신문들이 닷컴을 달고 인터넷을 통해 기사를 무료로 풀어내면서, 이러한 계약 관계는 저절로 해소되어 버렸다. 독자는 기사를 향유하기만 할 뿐,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세심하게 따지는 사람이라면 방문수를 하나 늘려주는 대가를 치른다고 하겠지만, 전통적인 유료 구독에 비하여 볼 때 이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독자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지불받지 않음에 따라, 신문 역시 양질의 상품을 생산해 제공할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신문과 독자는 '금품 제공 - 양질의 기사 제공'이라는 계약 관계에서 풀려나 '무료 열람 - 낚시질로 유입 확대에 골몰'이라는 변태적인 구독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신문과 독자가 함께 망하는 길로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독자는 민주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정보들을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되며, 대신 어떤 연예인이 공연중에 어떤 색깔의 속옷을 내비쳤는지 따위 정보만 축적하게 된다. 신문은 1) 이러한 변태적 구독 관계가 전통적인 정도의 수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생존 위협을 받아야 하며, 2) 뜻 있고 충성도 높은 핵심 독자들이 점점 더 떨어져나가는 상황을 지켜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을 놓고 신문사만 탓할 수는 없다. 1) 신문사를 비롯한 언론이 기여한 바도 있지만, 어쨌든 인터넷에서 정보는 자유로이(즉 공짜로) 유통되어야 한다는 대중적 믿음이 단단하게 형성되었고, 2) 인터넷 사용자들이 정보를 얻는 방식이 개개 언론사에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언론 상품의 단위가 '신문'에서 '기사'로 쪼개졌다), 3) 대안적인 뉴스 소스들이 막대한 양으로 발생되었다는 점 등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전개된 이러한 환경은 모두 언론사의 목줄, 밥줄을 죄는 역할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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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문제가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잘 살펴보면 그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다. 신문 위기의 경우는 그게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고민이 있다. 문제를 훑어보다 보면, 입에서 '유료화'라는 말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참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인터넷 기사 유료화가 바람직한 것인가, 혹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참으로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너무 왔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 초기에 지적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때, 음악은 당연히 공짜로 다운 받는 것이고, 유틸리티 프로그램들도 당연히 공짜로 받아 깔아 쓰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떠 있는 글은 '퍼가요~♥'만 적어 넣으면 얼마든지 긁어가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음원을 구매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프로그램들도 적어도 공식 영역에서는 불법 설치하여 사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언젠가 신문 기사도 그렇게 될 날이 올까. 지금까지 검증된 바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면 쥐가 고양이만큼 크고 힘이 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방울 달려는 쥐만 피를 봤다. 방울을 단 쥐도 아슬아슬하긴 마찬가지다.
기사와 기자와 저널리즘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을 담당하는 자들을 유혹하는 부조리와 부패가 있고, 세상이 그런 자들에 의해 농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는 한 그렇다. 또 세상에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 있는 한 그렇다.
그렇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그런 저널리즘을 듣고 소비하는 방식은 전과 달라질 것이다. 신문(지)를 펼쳐 보며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며, 공짜로 준다고 해도 거절하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여전히 열렬히 뉴스를 챙기면서도 말이다.
방식은 달라져도 정보라는 상품이 생산되는 데 누군가의 노동이 소모된다는 것은 여전하다. 제대로 잘 만들려고 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신문의 온갖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독자와 신문이 다시 건강한 계약 체결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 전에 이 곳에서 나는, 노래 한 곡당 얼마나 돈을 받으면 기꺼이 유료로 구입하겠는가 하고 여쭤본 적이 있다.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옷을 벗기고 낚시질을 해야 유지할 수 있는 신문의 상황에 짜증과 분노를 토해내는 우리는, 신문이 다시 건강한 정보 상품으로 돌아가는 데에 얼마나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덧글
긁적 2014/01/23 12:54 # 답글
PS : 퍼가요~♥ ㅋㅋ
deulpul 2014/01/23 15:29 #
지지배배 2014/01/23 13:13 # 답글
deulpul 2014/01/23 15:38 #
glass 2014/01/23 22:31 # 답글
일부만 나오네요. 혹시 일부러 이렇게 설정해 두신 건가요?
deulpul 2014/01/24 04:24 #
미스티 2014/01/24 02:41 # 삭제 답글
deulpul 2014/01/24 04:32 #
2014/02/03 05:43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2014/02/03 14:44 #
비공개 답글입니다.umagazine 2014/02/11 20:53 # 삭제 답글
deulpul 2014/02/12 19: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