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개의 성별 섞일雜 끓일湯 (Others)

시립도서관에 책을 반환하러 갔다가, 배포용으로 놓여 있던 지역 신문들을 주루룩 훑어서 챙겨 왔습니다. 집에 와서 대충 훑어보고 재활용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날 저녁, 신문지를 쓸 일이 있어서 그 중에서 몇 장을 빼내어 바닥에 깔았는데, 그 중에 이런 장면이 눈에 띄는 겁니다.




어떤 관광지를 홍보하는 타블로이드판 전면 광고인데, 맨 위에 붙은 사진입니다. 두 사람이 와인잔을 들고 웃으며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특별한 사람과 함께하는 특별한 곳"이라는 카피가 붙었네요. 밑에는 이 관광지의 호텔, 식당 같은 곳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들고 온 신문들 중에 LGBT 정체성이 강한 주간 신문이 하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실린 광고였습니다. 이런 성격의 신문이라고 하더라도 기사는 보통 신문과 다름없는 내용들을 싣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다시 꺼내서 훑어보니 이런 광고가 서너 개 더 있네요. 이를테면,




이건 은행을 알리는 전면 광고인데, 이것도 전혀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화제가 되었을 장면들을 그냥 무심하게 넘기게 됩니다. 그만큼 이런 장면이 흔하게 됐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의 시각도 달라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 --- ** ---


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꽤 오래 전에 아는 분(남)과 노래방에 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가라오케라고 해야 할 업소입니다. 방이 아니라 홀에 테이블과 무대가 있고, 노래를 할 (정도로 뻔뻔하거나 취한) 사람은 다른 손님들 다 보는 데서 노래를 하고, 딴 손님들도 (역시 술에 취했으므로) 함께 즐거워해주는 분위기입니다. You've got talent... Not! 의 분위기랄까요.

바에 있던 주인 할머니가 서비스로 보드카 샷까지 돌리는 신나고 왁자한 분위기라서, 음주가무의 전통에 빛나는 민족의 일원인 우리도 양넘들에게 질 수 없다 하며 함께 나가서 노래를 했습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마침 제가 불렀던 노래는 글로리아 게이너의 신나는 디스코곡 'I Will Survive'...

'게이 성가'이라고까지 추앙되는 이 노래를, 아시아인 두 남자가 무대에서 부릅니다... 아 놔

객석에 있던 미국넘들은 모두 눈을 하트로 뜬 채, 박수를 치고 함께 부르며 흥겨워해줬는데, 분위기는 '예쁜 사랑 하세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들에게는 무대 위의 두 사람이 이슬람의 탄압을 피해 유럽으로 도피해온 중동의 동성애자처럼 보이지 않았나 싶네요.

저는 이 노래 아주 좋아합니다. 노래에 부착된 동성애적 함의 없이 그냥 노래로서 좋아하는 거죠. 게다가 분위기 그런 판에서 유오성처럼 무게 잡고 마이웨이 부를 수도 없고요. 여하튼 그날 밤 선곡으로서 별로 좋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 ** --- ** ---


얼마 전 바나나 벗기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 <보트 트립>에 대해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찬사가 좀 이해되지 않았는데, 영화를 봤더니 납득이 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게이 커뮤니티의 시각에서 보면 특히 흥미로워할 내용인 것 같았거든요. 물론 이 영화를 좋게 평가한 사람들이 곧 동성애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영화에 대한 취향이 사람마다 다르므로, 어느 영화든 시망, 폭망이 아닌 한 대개 이 정도의 평점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그 물 좋다는 크루즈 배를 탄 두 주인공은, 여행사 직원 실수(혹은 고의)로 게이 클럽 크루즈 배에 타게 됩니다. 둘의 여행 목적으로 보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바다에 떠 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구요.

배에서 동성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몰랐던 세계와 사람들을 이해하며 나름대로 진정한 사랑을 찾아갑니다. 커밍아웃을 하는 것은 아니고요... 더이상은 스포일러.


--- ** --- ** ---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역시 꽤 오래 전에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설문조사를 할 때, 불만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응답자의 인구학적 측면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들 중 성별 항목에서 응답 선택지가 왜 '남'과 '여'밖에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 정체성을 남과 여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하게 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통계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정도라 해도 이미 분명히 존재하는 제3의 성을 고려해 볼 때 타당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 뒤로 설문지를 만들 때는 성별을 물어보는 질문의 선택지가 합리적인가를 꼭 점검하곤 합니다.

지난 2월13일 페이스북은 사용자가 성별을 선택하는 항목의 옵션을 기존의 남/녀 두 가지에서 수십 가지로 늘리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페이스북 먼지 털고 들어가 보니 이렇게 되어 있네요.




모두 60가지 가까운 옵션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할까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자신일 테니, 다양하게 열어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영어 페이스북에만 이런 옵션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이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3의 성이랄 수 있는 성적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성 정체성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의 사회적 정체성과 관련한 두 주장이 서로 반대 방향인 것이 흥미롭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다양한 성 정체성이 공존하는 형태로 사는 현상은 점점 더 자연스러워질 것 같습니다. 차별금지법 사례에서 보듯, 사회 일각, 특히 일부 극단적 종교주의자들의 태도가 그러한 변화의 속도를 가감하는 변수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 이미지: 신문 스캔, 페이스북 화면

 

덧글

  • Psychedelic Soul 2014/02/26 19:22 # 답글

    56개. 이 정도로 성정체성의 다양한 분류가 가능한 줄은 몰랐어요,
  • deulpul 2014/03/05 08:59 #

    사실 저 항목들이 모두 상호배제적이라기보다는, 같은 상황(정체성)도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옵션을 늘려 놓았다고 해야 정확하겠지요. 어쨌든 성 정체성이 다양하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 민노씨 2014/02/27 03:12 # 삭제 답글

    들풀 님께서 "I will survive"를 부르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습니다만,
    언젠가 한 번은 볼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 )

    페이스북 성(정체성) 선택 항목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50여 개라니 정말 다양하네요.

    추.
    저도 (슬과 상관없이) 블로깅을 좀 꾸준히 해야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한 번 더 해봅니다...;;
  • deulpul 2014/03/05 09:04 #

    이크 연습을 더 해야겠군요...
  • Ellery 2014/02/27 05:12 # 삭제 답글

    다양성이 존중되고 자유라는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미국에서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동성애' 인것 같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동성애 결혼을 인정한 주가 늘어나고 있죠). 아직까지 남자는 남자다워야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된다는 관념이 많이 남아있죠(인기있는 남자는 근육마초맨, 스키니진에 분홍색 입으면 게이취급). 그래서 이부분에 있어서는 유럽에서 미국은 아직도 인권후진국이라고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이것도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어쩔수없이 한국과 비교하게 되네요) 한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아예 다양성이라는 개념조차 확립이 안되있는 단계이죠. 동성애자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장애인, 채식주의자, 술 못마시는 사람, 나아가서는 대체 병역 까지 소수자들은 거의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니.

    여기 미국학교 식당에서도 보면 날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채식메뉴가 나오고,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어린이는 먼저 배려를 받고, 친구들과 파티에 가더라도 술못마시는 사람이라도 즐겁게 잘 어울릴수 있죠(술 안마시고 분위기 깬다고 술강요하는 사람 없습니다). 한국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갈길이 먼 것 같네요.

  • 미스티 2014/02/27 06:58 # 삭제

    한국 출신으로 첨엔 미국을 한국과 비교하며 살기 좋은 나라(?)라고 감탄했지만 이제 미국에서 오래살다보니 저역시 비교대상이 유럽으로 자연스레 옮겨지면서 미국의 후진성(!)에 역겨울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 인류의 역사가 진보의 역사라고 믿는다면 언젠가 한국과 미국도 유럽에 다가가는 인권선진국이 되겠죠?
  • deulpul 2014/03/05 09:11 #

    역시, 한 사회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에서 그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내용의 범위가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완고하거나 탄력적이거나의 차이가 있더라도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며, 경험과 문화 배경이 다른 사회와의 교류를 통해 (대체로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하는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 philoyyj 2014/06/08 02:37 # 삭제 답글

    보부아르가 책에서 한 말은 많은 이들에게 여성이라는 성별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성기 모양만을 보고 강요한 것이며,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본연의 정체성은 이와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기에 사회가 부여한 제 2의 성이 아닌, 그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제 3의성을 찾아 떠날테고요. 제 2의성과 제 3의 성에 관한 논의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 맞닿아있지 않나 싶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