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발이 되며 대가리를 도끼 삼아 섞일雜 끓일湯 (Others)

신채호는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손에 떨어진 뒤, 중국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글을 쓰고 독립운동을 했다. 사라진 조국의 망명객 처지로 외국에서 살기란 몹시 힘들었을 것인데, 언어가 다른 것도 만만치 않은 문제였던 모양이다.

쓴 날짜가 정확하지 않은 1920년대 초의 글 '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일전에 어느 도서관을 지나다가 중국 청년 한 명을 만났다. 나는 설재(舌才, 혀를 놀리는 재주)가 없어, 중국에 체류한 지 10년에 지금까지 손으로 입을 대신하는 자라, 필담으로 그 청년에게 "근래 중국 청년계가 이렇게 오래 적막함은 무슨 이유이냐?" 물으니, 그가 "백화문이라" 대답한다."


어릴 때부터 한학에 통달하였으며 글말로는 중국 망명중에 중국 신문에 글도 쓰곤 하던 단재였으나, 입말은 또 다른 문제다. 그래서 '손으로 입을 대신한다'라고 했다.

중국 청년이 말하는 백화문(白話文)이란 고전적인 문어(文語)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쓰던 구어로 글을 적은 것이다. 위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그가 한참이나 잠잠히 있다가 붓을 들어 써 가로되,

"백화문은 중국의 문화 운동을 촉진하는 신기계라.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악용하면 사람만 상한다. 편리한 백화로 난삽한 옛글을 대신하니 어찌 좋지 않으냐만은, 백화문이 난 이후에, 연애 편지 한 장만 쓰면 남녀 학생의 결혼이 당장에 성립하고, 연애소설 한 편만 지으면 야유호탕(冶遊豪蕩, 주색에 빠져 방탕하게 노는 일) 할 거리가 생기고, 약간의 고저 없는 시와 구속 없는 글을 쓰면 문인 학사의 명예도 가질지니, 그 누가 이 같은 온유(溫柔)한 집단의 취미 있는 세월을 버리고, 손이 발이 되며 대가리를 도끼 삼아 쓰는 정치, 혁명, 사회, 운동 등 백사일생(百死一生)의 마당에 출입하리오? 그러므로 근일 중국 청년계의 적막은 백화문의 까닭이라 하노라."

내가 이 말을 듣다가 우리 조선 청년계의 아무 운동에든지 거기에 대한 흥미가 냉담하여 감히 문예운동의 영향이 아닌가 경외하였노라. 문예파, 특히 연애문예파가 재삼 고려할 바라 하노라.


비슷한 이야기는 1925년 정초에 <동아일보>에 쓴 '낭객(浪客)의 신년만필'에도 나온다.


일찌기 중국 광동의 <향도(響導)>란 잡지에 그 호수가 몇 호인지 작자가 누구인지를 지금에 다 기억하지 못하는 중국 신문예에 대한 탄핵의 논문이 났었는데, 그 대의를 말하면,

"중국 연래에 제1혁명, 제2혁명, 5.4운동, 5.7운동... 등이 모두 학생이 중심이었다. 그러더니 근일에 와서는 학생 사회가 왜 이렇게 적막하냐 하면, 일반 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를 먹은 후로, 혁명의 칼을 던지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피흘려 희생하는 관념을 버리고 신시(新詩), 신소설의 저작에 고심하여, 문예의 도원(桃源)으로 안락국을 삼는 까닭이다. 몇 구의 시나 몇 줄의 소설을 지으면, 이를 팔아 그 생활비가 넉넉히 될 뿐더러, 또한 독자의 환영을 받는 시인이나 소설가라 하는 명예의 월계관을 쓰며, 연애에 관한 소설을 잘 지으면 어여쁜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무한한 염복(艶福)을 누리게 되므로, 혁명이나 다른 운동같이 잡혀 갖히거나 총을 맞을 위험은 없고 명예와 안락을 얻으며 연애의 단꿈을 이루게 되므로, 문예의 작자가 많아질수록 혁명당이 적어지며, 문예품의 독자가 많을수록 운동가가 없어진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에, 3.1운동 이후에 침적(沈寂, 아주 고요함)하여진 우리 학생 사회를 연상하였다. 중국은 광대 침흑(沈黑)한 대륙인 고로, 한 가지의 풍조로써 전국을 멍석말이할 수 없는 나라어니와, 조선은 청명 협장한 반도인 고로 한 가지의 운동으로 전사회를 곶감꼬치 꿰듯 할 수 있는 사회니, 즉 3.1운동 이후 신시, 신소설의 성행이 다른 운동을 초멸(剿滅)함이 아닌가 하였다.




1910년대에 일어난 백화 운동은 중국을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탈바꿈시키는 주요 계기 중 하나였다. 후스(胡適), 천두슈(陳獨秀), 루쉰(魯迅)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근대화된 중국을 꿈꾸는 젊은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저런 평가도 있었던 모양이다.

시대의 큰 흐름이었던 백화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로써 만들어지는 작품들의 경향성, 그리고 젊은 세대가 그에 몰두하고 그로써 소일하느라 사회의 큰 주제에 대한 열정을 점차 잃어버리고 유약해지는 데 대한 경고라고 하겠다. 신채호 글에 나오는 중국의 한 청년은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악용하면 사람만 상한다'라고 하고, <향도>의 논설은 백화문으로 이루어지는 신문예를 '마취제'라고 한다. 신채호는 조선의 학생들이 통탄할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지 않고 사회 운동에 관심이 멀어진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런 글을 쓸 때의 신채호는 40을 조금 넘긴 나이다. 기성 세대가 젊은이들의 나약함을 탓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나라를 잃은 상황이라는 점이 그에게 더 절박함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풍찬노숙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에서, 식민지 조국의 젊은이들이 야유호탕할 거리만 찾고 염복이나 추구하는 모양이 걱정스러웠으리라. 친일이면 어떠냐고 대놓고 주장할 법한 신문학 동인지 <월간 베슷흐>가 없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 글에서 인용한 신채호의 원문은 연변대학교 조선문학연구소가 펴낸 <신채호 산문집>(2010년 보고사 간)에 실린 것이다. 내용 중 일부는 내가 지금말로 바꾸어 적었다.

※ 신문 이미지: <동아일보> via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덧글

  • 겨리 2014/03/10 09:05 # 답글

    마지막즈음에 빵 터졌습니다만 기쁘게 웃지도 못할 통탄할 일이라...
  • deulpul 2014/03/10 15:50 #

    사실 이 부분을 인용하며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갈피가 더 있었는데,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방향이겠습니다만 따로 정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패스했네요.
  • LidiaD 2014/03/12 14:25 # 삭제 답글

    누구나 '손가락만 달려있으면' 무슨 말이든 써재낄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의 무한정에 가까운 자유도와 생각과 느낌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이 가능한 백화문과의 비교..평소 들풀님 글의 숨은 독자입니다만, 이번엔 살짝 갸웃하게 되네요.

    물론 단재 선생님의 쓴소리는 진정어린 걱정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철없는 독자 입장에선 좀 갑갑함이 느껴집니다. 중국 고문( 특히 과거시험용 팔고문)은 이미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글의 일차적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고, 명, 청대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선 그 전 시대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는 평가가 대다수죠. 특히 청나라때부터 심해진 중국 사회와 사상의 보수화도 한 맥락이구요.백화문 운동으로 쟁취한 자유로 연애이야기만 늘었다는 걱정은 요즘으로 치면 꼰대의 잔소리로 들립니다 -_-; 수백년동안 막혀있었던 글의 자유를 겨우 쟁취해서 나라 걱정은 뒤로하고 연애소설좀 썼다고 한 세기뒤의 옆나라 웹상의 일부 쓰레기性 공간과 같은 선상에서 다뤄지는건 좀 너무한거 같아요 -_-;;
  • deulpul 2014/03/18 08:16 #

    말씀하신 것을 가름해 보니 두 가지 점을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1) 신채호(정확히 말하면 그가 인용한 중국 지식인)의 꼰대질 2) 저의 백화문과 '쓰레기 공간' 동등 비교. 1)은 제가 드릴 말씀이 많지 않은데, 당시 젊은 세대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채호가 백화문 자체나 그 운동, 더 나아가 신문화 운동 같은 근대화의 노력이 성취하고 있는 성과를 부정한다기보다, 그런 운동을 가능케 했던 에너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져 간다는 판단을 했던 게 아닌가 싶고, 더구나 이 글을 쓴 그의 관심은 결국 중국이 아니라 망국 상황이었던 조선이었던 점, 그리고 그가 조선 독립을 위해 무력 투쟁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옹호한 사람이었음을 고려하면 (저는)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그에게는 백화문이 중국 문화에 끼친 영향보다는 조선 독립을 위해 떨쳐 나서지 않고 안온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후배들이 더 큰 관심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는 그런 '쓰레기성 공간'이 없었다는 것인데요? 여하튼 백화문 운동과 인터넷 환경을 동등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인터넷 환경이 사회 문화에 끼친 영향이 여러 모로 혁명적인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원래 위 글의 밑에 길게 서술해 두었다가, 다른 기회에 좀더 정리해서 써 보고 싶어서 따로 떼어 두었는데, 그래서 글이 좀 중동무이가 된 것 같기도 하네요.
  • .. 2014/03/13 11:51 # 삭제 답글

    뭐 그 시대는 지금과 진지함의 무게가 달랐으니 연애소설 '좀' 쓰는게 연애소설 '만'쓰는 것처럼 보였겠죠.. 그 시대어르신들의 생각하면 적잖이.. 월간벳슷흐하고 비슷하게 생각될 만도 합니다..
  • deulpul 2014/03/18 08:22 #

    게다가, 지금으로선 짐작하거나 상상하기도 어려운 시대 상황이 있습니다. 1900~1910년대는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기 배에 칼을 찌르거나 목을 매거나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 자결한 이들이 경향 각처에 쏟아져 나왔던 때입니다. 지방에서는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탈에 무력으로 항쟁하기도 했고요. 그런 시대 환경도 함께 고려하면, 단순히 진지 빨고 십선비질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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