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상담원 비칠映 그림畵 (Movies)

휴대폰에 전화가 오면 네 번쯤 벨이 울리다 바로 자동 응답으로 넘어간다. 대부분 미처 받을 틈도 없이 끊어져 불편하다. 전화를 건 사람 처지에서 봐도, 벨이 달랑 서너 번 울리고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니 무례하다고 생각할 만하다. 이런 경우 자동 응답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도 거의 없다. 생각난 김에 작정하고 바꿔보려고 했다.

전화기의 자체 설정 메뉴를 다 뒤졌는데, 보이스 메일로 넘어가는 조건을 설정하는 메뉴는 없다. 이번엔 보이스 메일에 전화를 걸어 녹음된 안내 메뉴를 다 들어봤는데 거기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전화 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마이크라고 하는 상담원이 받는다. 요즘 이곳 무선 송수신 상태가 안 좋은지라, 내 이야기가 하나도 안 들린다고 하면서 자신이 다시 나에게 걸겠단다.

잠시 뒤 전화가 왔다. 용건을 말했는데,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변경하려면 별표(*)로 시작하는 긴 코드를 전화기에 입력해야 한다고 한다. 코드를 받아적고 나서 두 가지를 물어보았다. 이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둔 건가요? 다른 회사의 전화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야 하나요? 마이크는 그 때까지와는 조금 다른 어투로 시원시원하게 말해준다.

이렇게, 아마도 매뉴얼에 있을 법한 질문과 용건에서 조금 벗어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물론 그래도 어디까지나 업무 영역에 속하는 질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상담원은 대부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간단히, 하지만 여전히 친절하게 답변한다. 아마 이렇게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탓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 대한 대응법까지 매뉴얼에 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매뉴얼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를 잠깐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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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스미스가 주연한 2008년 영화 <세븐 파운즈(Seven Pounds)>에서 우디 해럴슨은 앞이 보이지 않는 전화 상담원이다. 육류 회사의 고객 상담실에서 일하는데, 그에게 진상 고객 윌 스미스가 전화를 걸어 모욕을 준다.






사실 윌 스미스는 일부러 저러고 있다. 착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스미스가 업무 영역을 넘어 상담원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의 위치는 전화 상담원 - 고객에서 두 자연인으로 급속히 재규정된다. 그래도 해럴슨은 직업 의식이 강한 것인지, 아니면 천성이 착한 것인지, 모욕적인 상황을 잘 참고 넘긴다. 고달픈 전화 상담원의 삶이여.

역시 2008년에 나온 정지 모션 애니메이션 영화 <$9.99>는 매우 독특하다. 현실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무거운 주제를 우울하게 그려가는 애니메이션이다. (여담이지만, 네이버다음에 올라와 있는 똑같은 영화 설명은 완전히 엉터리다.) 그 중 한 장면인데, 외롭게 사는 독거노인의 아파트에 어느 날 밤 전화가 걸려온다. 여론조사를 위한 전화인데, 노인은 전화를 붙잡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추억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조사원은 묵묵히 듣다가, 방해해서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으려 한다. 노인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만, 전화가 끊어진다.

이 영화에는 이런 장면도 있다. 같은 아파트의 다른 호에 사는 순진한 청년이 자신이 깨달은 삶의 의미를 설문조사원과 공유하고 싶어한다.






이 청년은 실업 상태인데, 통신 판매로 산 책 <인생의 의미>를 읽으며 깨달음을 얻어가는 중이다. 이 청년에게 설문조사 전화가 온다. 조사원이 어떤 직업을 원하느냐고 묻는데, 꿈이나 희망 같은 것은 별로 없는 청년은 전화조사원을 하고 싶다고 한다.

조사원: 어떤 직업을 갖고 싶으십니까?
젊은이: 전화 설문조사원을 하고 싶네요.
조사원: 그렇게 비꼬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젊은이: 아뇨, 정말이에요. 며칠 전에 면접을 봤는데, 내가 마땅치가 않대요.
조사원: ... 이 직업 별로 안 좋아요, 제 말을 믿으세요.
젊은이: 왜요? 전화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이런저런 질문도 하고, 좋잖아요. 이름이 뭐에요?
조사원: 카밀이요.
젊은이: 안녕, 카밀. 저는 데이브에요. (다이브... 호주-이스라엘 합작 영화다)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조사원: 후훗
젊은이: 인생의 의미가 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도를 아십니까)
조사원: 농담 말아요.
젊은이: 아니, 아니, 진심이에요. 난 책에서 그걸 발견했다구요. 아주 간단해요. 중얼중얼...
조사원: 잠깐만요, 더 듣고 싶지만, 과장님이 내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알면 난리를 칠 거에요.

젊은이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더 설명하려 하지만, 물론 전화조사원 카밀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곧 통화는 끊어지고, 인생의 의미는 다시 모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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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머니와의 통화.

母 : 선거가 다가오니까 그런지, 요즘 뭐 조사한다는 전화가 많이 온다.
子 : 그래요?
母 : 근데 요것들이 60대 이상이라면 고맙다고 하고 끊어버리데.
子 : 그럴 수도 있겠죠.
母 : 괘씸해서 이제는 꼭 50대 선택 버튼을 누른다.
子 : 네에? 그럼 안 돼요. 사실대로 해야죠.
母 : 그래도 늙었다고 그렇게 괄시하는데? 다 민주당에서 조사하는 거 같기도 하고. 나이 많은 사람 빼려고.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 괄시하거나 특정 연령대를 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인구 비례로 미리 할당을 해 놓고 전화를 하니까, 이미 숫자가 다 차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50대 버튼을 누르는 것은 괘씸해서가 아니라, 전화가 빨리 끊기는 것을 원하시지 않아서인 것 같기도 하다.

母 : 그래. 어쨌든 난 조사 전화 받으면 다 1번 누른다.
子 : 왜요?
母 : 나는 원래 1번 아니냐. (어머니는 만년 여당... 으로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신 바 있다.)
子 : 에이, 그래도 그렇게 하면 조사가 안 되잖아요. 차라리 전화를 받지 마시든지요.
母 : 그럼 되냐? 힘들게 조사하는데 잘 응해줘야지. (...)

그래서 다시, 그런 습관적인 대답을 막기 위해서 설문조사 전화에서는 선택지 순서를 (랜덤하게) 뒤섞어서 제시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실제로 조사 기관들이 그렇게 하는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子 : 그러니까 어머니가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응답했을 수도 있어요.
母 : 그래? 그럼 잘 듣긴 해야겠네. 근데 요즘은 다 녹음 조사라서.
子 : 사람이 조사하는 경우는 없어요?
母 : 거의 없어. 그래도 그렇게 사람 목소리 들으니까 재밌지.

사람들이 점점 더 외롭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점은 전화 상담원이나 조사원의 직무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이들은 밝고 쾌활한 세계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우울하고 외로운 그늘의 세계에 사는 사람과도 대화를 하여야 한다. 전화 진상들 역시 어쩌면 다 외롭고 우울해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핵가족을 넘어, 형용모순(oxymoron) 같은 '1인 가족'이 보편화한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는 동료 인간의 목소리를 늘 기다리는게 아닌가 싶다. 그것이 비록 업무를 위한 건조한 목소리라도, 심지어 녹음된 일방적인 목소리일지라도.


[덧붙임] 2014년 5월21일 13:30

"외로워서"…112에 182차례 허위신고 60대男 '쇠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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