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덧붙은 사연들 섞일雜 끓일湯 (Others)

도서관을 지나다 보니 중고책 판매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일년에 두 번 하는 행사다. 잠깐 들어가서 훑어보다가 책 한 권을 뽑아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다음과 같은 속표지 때문이었다.




저자 서명본이다. 로버트 맥체스니는 정치경제학 시각에서 미디어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자다. 그 생산량이 엄청난 게, 마치 한창 책과 글을 쏟아내던 때의 강준만을 연상시킨다.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이래 2년에 한 권씩 굵직한 책을 낸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로, 2007년 산이다.

위 서명본은 책을 낸 뒤 아는 사람에게 보내준 증정본인 모양이다. 파란색 볼펜으로 쓴 서명에 딸린 글은 "당신의 도움 없이는 이 책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좀 흔한 말이지만, 책 펴낸 사람 처지에서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가장 진실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맥체스니가 이 책을 보낸 사람은 나도 아는 사람이다. 학과 교수다. 맥체스니와는 전공 분야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다. 책의 맨 앞에 나오는 '감사의 말'에도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데, 원고에서 중요한 점을 지적해 준 사람들로 꼽은 40명 중 하나로 들어가 있다. 이 책은 그 교수가 중고책 판매 행사 주관 단체(대학 도서관 후원회)에 기부하여 여기까지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를 포함한 40명은 맥체스니의 '감사의 말'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 중 일부다. 저자는 원고를 읽고 도움말이나 비판을 해준 사람들, 토론과 대화를 통해 아이디어를 촉발해 준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기가 혹사시켰던 '비공식' 연구 조교들이나 자료를 열심히 복사해 준 사람까지 모두 실명을 밝히며 감사를 표했다. 그 수가 100명에 육박한다. 조금 수선스럽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만큼 책에 자부심이 있다는 뜻일 테고, 무엇보다 자신의 지식과 사고, 그리고 그 결과물인 책이 어디에서 나왔나, 즉 출처를 꼼꼼히 밝히는 태도의 한 양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맥체스니는 책이 나온 뒤 수십 권을 사인해 보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중고책 서가에는 맥체스니의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펼쳐보니 이 역시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보낸 책이다. 봄맞이 대청소를 했...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라서 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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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작년에 역시 중고책을 판매하는 행사에서 내가 사온 책에 들어 있던 편지다. 중고책 판매 서가에 한국책이 꼽혀 있는 경우는 드문데다 내용도 흥미로와서 달랑 집어왔는데, 거기 들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선물한 책인 모양이다. 정성껏 쓴 편지를 함께 보냈다. 남들이 주고받은 사사로운 사연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좀 걸리지만, 이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엮여 나온 소소한 역사 자료임에 틀림없어 소중한 생각이 든다.

편지를 쓴 사람은 책을 소개하면서 "김용규님에 반해서, 그리고 내게 영화에 눈뜨게 한 책이기에 ... 보낸다"라고 했다. 책을 펴낸 뒤 독자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저자라면 행복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편지의 주인이 책을 받는 사람에게 추천한 성악가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인 주제에, 덩달아 함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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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책이 귀한 이곳에서 동료로부터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두 권을 빌려왔을 때, 그 중 하나에도 비슷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책을 보낸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주는 글귀였다. 그 글귀는 책을 따라서 잠깐 나에게 대여되었다가 다시 책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책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 글귀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저런 책이 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저자들이 고맙게도 잊지 않고 책을 보내주기도 하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글귀들은 비록 짧지만 기가 막히게 저자의 성격과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몇 안 되긴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중에 따로 모아보기로 하고...

예전에 내게 최승자의 시집을 보내준 친구는, 아주 가는 세필로 꼼꼼하게 쓴 글을 함께 보냈다. 나는 그 얇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책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 없게 되어 저 시집이 혹여 다른 이의 손에라도 들어갈 때, 기억의 집을 버티는 단단한 벽돌과도 같은 그 꼼꼼한 글도 함께 따라갈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왠지 좀 서운하기도 하고 또 좀 편안하기도 하다.

편하게 사서 읽을 수 있는 디지털 책이 아쉬운 점이 몇 있는데, 이렇게 글귀를 적어 함께 보내줄 수 없다는 것도 그 중 하나임이 분명한 듯하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덧글

  • 까날 2014/03/28 19:32 # 답글

    좀 다르지만 중고책에 얽힌 좀 애틋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중고책 무더기에 섞여온 QT책이 있었는데, 언니가 시집가는 동생에게 '결혼 축하하며, 내게 줄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며 예수님을 가까이 하라고 써있었습니다. 결혼 선물이라고 이 책을 받아든 동생의 기분이 상상이 되면서 중고책 무더기에 섞여 제 손까지 온것도 이해가 되더군요.

    ........그리고 그 QT책 안에 100달러 지폐가 한장 꽂혀있었습니다.
  • deulpul 2014/03/28 20:58 #

    흐음... 결혼 선물로 Qt 책이라니요! 했더니, 달러라는 반전이 있었던 것인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뭔가 개발덕후 같은 언니는 먼저 시집가는... 동생에게 개발의 도구와 영적 지표와 현실의 권능을 함께 다 건네주었으니 완벽한 선물 같기도 합니다. 동생은 다르게 생각했을 테지만요... 재미있으면서도 왠지 좀 짠한 마음이 드는 사연이군요.
  • 까날 2014/03/28 21:47 #

    언니 입장에서는 나름 절묘한 한 수 였는데 말입니다. 너무 절묘한 걸 보면 누가 비법을 알려 준 것 같기도 합니다.
  • deulpul 2014/03/29 15:54 #

    그러나 책 종류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동생은 열어보지도 않고 팽개치는데... 가 되었겠네요.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언니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한 것은 성경 말씀처럼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잡는 법, 즉 Qt 책이고, 돈은 그저 자신이 넣어뒀다가 잊어/잃어버린 것일 수도... 아니면 두툼한 책을 받은 동생이 읽지는 않고 비상금 금고로 사용하다 잊어버린 것일 수도... 짧지만 다양한 상상을 부르는 글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 esaint 2014/04/04 23:44 # 삭제 답글

    이글루스가 여전히 생생하네. 내 블로그도 살아있다는 걸 알았는데 정작 나는 접속 아이디와 암호를 몰라 날 증명할 방법이 없네 . 최승자 시인 이름 보니 반가워서. 얼마 전 문학과지성사 시집 전체를 다 구매했는데 최근 시집을 봤었거든. 여전히 글 열심히 글 쓰고 있는 걸 보니 반갑네.
  • deulpul 2014/04/06 03:17 #

    그러게 종종 접속하여 관리 좀 하지 그러셨어요, 하하. 자기 블로그로부터 소외된 사람이라뇨... 문지 시인선 시리즈는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는 모양이네요. 참 용하고 기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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