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TFM, FTFM 때時 일事 (Issues)

NOVA에서 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잠깐 봤다. 새들의 문제 풀이 능력이 뜻밖에 높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이 행한 여러 실험이 나왔다. 복잡한 장치를 해체한 뒤 안의 먹이를 꺼내는 실험에서, 현명한 새로 알려진 까마귀는 개보다 훨씬 탁월한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개는 문제 상황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과정 몇 개를 순서대로 거쳐야만 먹이를 꺼낼 수 있는 실험을 했을 때, 실험 상황에 들어간 까마귀는 행동부터 하지 않았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오가면서 상황을 먼저 파악했다. 그러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행동에 돌입했다. 까마귀는 딱 한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뒤, 8단계의 순서를 정확히 밟아서 먹이를 꺼냈다. 그 과정에서 도구까지 썼다.






이러한 능력의 근원이 본능인지, 경험인지, 아니면 인지 능력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까마귀가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풀어냈다는 것이며, 이런 실험을 반복했을 때는 문제 해결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러한 문제 상황이 여러 까마귀들에게 지속적으로 제시된다면, 그리고 까마귀가 글을 쓸 수 있다면, 현명한 새 까마귀는 매뉴얼부터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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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매뉴얼대로 하는 원칙주의자들은 대개 머저리 취급을 받는다. 융통성도 없고 눈치도 느리고 분위기도 모르는 꽉 막힌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다.

그러다, 그런 원칙 지키지 않아서 무슨 일이 터지면 모두 하나같이 원칙 지키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서 도리깨질을 한다. 가만히 보면 스스로에게 할 도리깨질이다.

원칙은 원칙이다. 어떤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모아 매뉴얼이 만든다는 것은, 과학과 상식과 지혜와 공동의 경험에서 추출된, 당대에 설정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을 정해두었다는 뜻이다. 'FM대로 한다'라는 말로 자주 쓰이는 FM(field manual)은 효과적인 전투 수행을 위한 행동을 가장 간명하게 정리해 둔 교전 원칙이다. 법은 사회를 안녕하게 돌리기 위해 모두에게 강제되는 매뉴얼이다.

맞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아도 일은 된다. 더 잘 된다. 더 효과적이다. 안개가 조금 끼었더라도 조심해서 조종하면 헬리콥터로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승선 정원 100명인 배에 101명 탄다고 배 가라앉지 않는다. 110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매뉴얼대로 하는 원칙주의자는 꽉 막힌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럼 150명은? 200명은? 어디까지 되고 어디부터 안 되는가?

이미 답이 있다. 승선 정원 100명이 그 답이다. 매뉴얼에 그렇게 되어 있다. 이 경우 매뉴얼이란,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질 것을 고려하여, 어떤 경우에도 안전할 수 있는 인원수를 정해 놓은 것이다. 다행히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면 120명이 타도 괜찮다. 99%의 상황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딱 한 번, 위험 요소들이 맞물리면 대형 사고가 난다. 이럴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 '유도리'를 포기한 것이 매뉴얼이다.

세월호 사고 원인은 차차 밝혀질 것이다. 1993년 서해훼리호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과적이었다. 정원 221명인 배에 362명이 탔다. 정원의 3분의 2가 더 탔다. 서해훼리호의 승선 인원 초과 운행은 그 날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상용 구명정도 9대 중 여러 대가 작동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모두 작동해야 한다. 하지만 평소에는 모두 작동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고 2주 전에 있었던 구명정 정기 검사에서 항만청 소속 검사관은 핵심 부품의 불량 상태를 눈감아주고 합격 처리해 주었다. 이렇게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그동안 잘 운항하여 왔다. 292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사고는 원래 나서는 안 된다. 그 가능성이 0%는 아니더라도, 흔하게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의학과 과학과 공학과 윤리가 사고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원칙과 매뉴얼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버스 운전사들은 하루에 몇 시간 이상 운전을 하여서는 안 된다. 군 장비에 쓰이는 부품들은 일정한 내구성을 가져야 한다. 비가 올 때는 평소 운전 속도의 일정한 비율로 감속하여야 한다. 건물을 지을 때는 설계도대로 철근과 골재를 설비하여야 한다. 용의자를 취조할 때는 폭력이나 고문을 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고는 나게 마련이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고작은 어떤 사고든, 그 뒤에는 원칙을 무시하고 정해둔 매뉴얼대로 하지 않은 행동이 얽혀 있다. 거의 예외 없다.

큰 사고를 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매뉴얼을 읽고 따르는 종류의 인간인지를 점검해 볼 만하다. 사고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서서히 드러나면, 이들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우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매뉴얼을 무시하고 원칙보다 융통성을 택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들과 우리 자신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동안 사고가 나지 않을 정도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


RTFM매뉴얼을 좀 읽으시오, FTFM은 매뉴얼대로 좀 하시오의 뜻이다. 위에서 말하는 매뉴얼은 가전제품 매뉴얼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매뉴얼도 같이 포함될 수 있다.


[덧붙임] (4월21일 05:45)

운항관리규정 있으면 뭐하나…'총체적 부실'

운항관리규정에서 정한 차량 적재기준 32대 초과…화물은 보고한 것보다 2배 많아

청해진해운 측이 18일 공개한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은 선박 운항과 관련해 화물 적재량·승무원 배치 및 역할·비상상황시 대응방안을 규정한 일종의 '매뉴얼'이다. 지난해 2월 인천해양경찰서가 심사 완료해 사고 당시까지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 전·후 과정을 보면 이와 같은 규정은 정확히 지켜지지 않았다.

 

덧글

  • 타츠야 2014/04/22 14:17 # 삭제 답글

    그래서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해 아무런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메뉴얼에 맞추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살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더군요.
    외국계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해외 개발팀과 한국 고객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메뉴얼입니다. 한국에선 메뉴얼을 지키면 유연하지 못 하고 현실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게 씁씁할니다.(그럴 때마다 좌절감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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