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도랏 섞일雜 끓일湯 (Others)

꽃이며 나무 이름을 척척 대는 사람은 참 부럽다. 옛날엔 특정한 분야에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면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면 이곳 길가에 흔하게 피는 꽃. 자전거 길에도 있고 기찻길 옆에도 있다. 다른 들꽃과 어울려서, 혹은 저희끼리만으로 여름 들판을 하얗게 수놓는다.





이 희고 작은 꽃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중에서)

몸짓이 아니라 원래부터 어엿한 꽃이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없었다. 알지 못했기 때문. 그저 하늘거리는 몸짓으로만 기억하고 지나쳤다. 나도 몰랐고 불행히도 주변에 사랑 많은 사람도 없어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전거 길 옆에 늘어선 꽃들을 다시 보고 온 날, 마음먹고 찾아보았다. 수수하면서도 발랄한 어린 여동생 같은 이 꽃은, 그 이름이 헷지 파슬리(hedge parsley)란다. 헷지는 생울타리나 덤불을 뜻한다. 여기 속한 종으로 spreading hedge parsley(학명 Torilis arvensis)와 japanese hedge parsley(학명 Torilis japonica)가 있는데, 내가 사는 곳에는 전자는 없고 후자만 있다고 한다. 후자는 아시아종으로, 여기 기준으로 보면 외래종이다.

한국에도 흔한 풀이다. 이 풀은 한국말로는 사상(蛇床), 그 씨앗은 사상자(蛇床子)라고 한다. 순우리말로는 뱀도랏. 사상은 뱀이 잘 눕는 침상이라는 뜻이라고 하고, 뱀도랏이라는 예쁜 말은 '뱀도라지'에서 온 듯싶다.

사상은 <동의보감> 같은 전통 의서에도 주요한 약재로 나온다. 주로 피부비뇨기 쪽으로 효능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 의학은 그 씨앗에 남성호르몬과 관련된 물질이 들어 있음을 실험실에서 입증하였으니, 오로지 경험으로만 축적되는 전근대적 지식의 양상이란 실로 놀랍다고 하겠다. 한 한의사는 이 풀의 효능으로 "이 물로 목욕을 하면 피부가 윤택해지고 야릇한 정()을 느끼게 된다"라고 적었다. 풀의 약리작용이란 화학적 성분들이 어울려서 내는 효과일 텐데, 건조한 육각 기호로 이루어진 화합물에서 사람에 대한 정서가 솟아나온다니 오묘한 일이다.

<동의보감>에는 꽃이 궁궁(芎藭)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궁궁, 혹은 궁궁이는 뱀도랏보다 키가 조금 크고 여러해살이인 풀이다. 뱀도랏이나 궁궁이 모두 산형과에 속한다고 하는데, 산형(繖形)이란 꽃이 우산 모양으로 핀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작은 꽃잎들을 원형으로 펼치고 우산살 같은 꽃줄기로 세심하게 떠받친 모양이, 어릴 때 젊은 어머니가 즐겨 쓰시던 질박한 양산 같기도 하다.

이제 알았으니 그 이름을 불러줄께, 뱀도랏.

 

덧글

  • 아인하르트 2014/09/02 19:59 # 답글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꽃이네요. 뭐 저도 남자지만. (...)

    이상하게 화려한 꽃들보다는 들에 자기들 맘대로 퍼진 들꽃들이나 무덤가에 핀 할미꽃같이 조금은 수수하고 뭔가 겸손해보이는 꽃들이 좋던데 말입죠. (할미꽃이라든가 어릴 적 놀던 기억 덕분에 선산은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었죠.) 할미꽃이나 일부 유명한 거 제외하면 이름을 모르겠지만. 정말로 꽃, 나무이름, 별자리 이름 물어보면 척척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 deulpul 2014/09/03 03:43 #

    무덤가의 할미꽃! 이 이미지를 실사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물의 이름이란 자주 보고 써야 익숙해지는 것이므로, 할미꽃, 땅강아지, 싸리나무, 큰곰자리 같은 말이 잊혀지거나 추상어가 되고 대신 아이폰, 갤탭, 앱스토어, 카톡 같은 말이 생생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런 세계가 있음을 기억하며 그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이 발붙인 땅과 함께 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진, 마음이 부유한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14/09/03 01:1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4/09/03 04:05 #

    염려해 주어서 감사. 사실 네 심정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할 수 있겠지. 곧 이메일이라도 쓸께.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