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de-off 섞일雜 끓일湯 (Others)

초중등 학제로 볼 때, 미국의 9월은 한국의 3월과 비슷하다. 각급 학교에서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고 입학도 대개 9월이다. 대학가도 8월 중순부터 어수선해진다. 긴 여름방학 동안 캠퍼스를 비웠던 학생들이 돌아오고, 신입생들도 새로 정착하느라 동네가 분주하다. 외국에서 새로 오는 유학생이며 연구원도 속속 도착하여, 살 집을 찾고 살림살이를 마련하고 근처 지리를 익히는 데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미국에서 차 없이 살 작정이라면 큰 걱정 하나 던다. 대중교통이 잘 발달한 곳에서는 없는 게 오히려 속편할 수도 있다. 가족이 있으면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차를 마련할 생각이라면 좀 고민을 하게 된다. 목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한 번 결정을 하면 그 결과가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새로 정착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차 파는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거나, 익숙하더라도 새로 이사 온 곳의 상황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미국 차는 값이 정해져 있지 않다. 파는 측(딜러)이 값을 부르고, 이를 놓고 씨름을 해야 한다. 물론 돈이 많으면 그냥 부르는 대로 집어주고 바로 끌고 나와도 된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게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차를 싸게 사기 위해, 혹은 바가지 쓰지 않고 사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개발하고 적용한다. 이를테면 소비자에게 상품 정보를 제공하는 잡지 <컨슈머 리포트>는 특정 모델 자동차의 시세 정보 리포트를 30~40달러 정도에 판다. 이 리포트에는 딜러들이 해당 차량을 자동차 회사로부터 넘겨받는 값, 딜러의 마진, 최근에 해당 차량이 실제로 거래된 값 같은 정보가 들어 있다. 딜러와 값을 놓고 줄다리기를 할 때 직접 도움이 되는 정보인 셈이다. 이 정보를 잘 활용하면 상당한 금액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40달러는 제값을 하고도 남는 유용한 투자가 된다.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린다. 차는 느긋하게 사야 한다. 그래야 좋은 값으로 따낼 수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굴러먹은 현지인들도 차 하나 사려면 몇 주, 몇 달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정보를 수집한다. 시간 투자하는 만큼 분명히 절약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급히 정착해야 하는 이방인들은 그런 여유가 없다. 낯선 땅에 새로 도착해서 차를 사기로 한다면 1) 개인적으로 차를 내놓은 사람으로부터 중고차를 사거나, 2) 혼자 가서 딜러에게 새 차나 중고차를 사거나, 3)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1)이나 2)를 하게 된다. 특히 딜러에게 새 차를 살 때에, 지역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채 직접 달려들었다가는 제값보다 더 주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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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에 처음 와서 차를 살 때 다른 분의 도움을 받았다. 그전에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는데, 오로지 내가 다닐 학과에 나보다 먼저 와 있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자기 시간을 쪼개어 도와 주셨다. 이 분과 인근 딜러 두세 곳을 다니며 차량을 살펴보고, 흥정도 이 선배와 함께 해서 차를 샀다. 함께라고 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구경하다시피 했고, 선배가 거의 다 했다.

차는 잘 샀다. 가격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내면서 보니 조금 비싸게 산 듯 했다. 그래도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그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고, 그가 팔 걷어부치고 나서서 도와준 덕택에 하루라도 빨리 편하게 정착할 수 있었다.

나중에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차를 산 다른 분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차를 비싸게 샀다며 도와주신 분을 원망하는 말을 했다.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일 도와준 사람이 딜러와 결탁하여 중간에 소개 커미션이라도 떼어먹었다면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 정착하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자기 시간 쪼개 가며 동행하여 편의를 봐 줬는데, 그 결과 차값에서 조금 차이가 났다고 나중에 원망한다는 건 옳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 도움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런 도움 없이 본인이 직접 나섰다면 훨씬 비싸게 샀을 가능성이 거의 100%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윤리적으로도, 또 이해타산적으로도 원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 뒤 보면 차값도 보이고, 같은 모델을 더 싸게 산 사람도 만나게 되고, 게다가 해당 모델이 값이 더 떨어지기도 한다. 이건 모두 나중에 벌어지는 일이다. 차를 산 시점에서는 고려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야 충족될 수 있는 조건으로 과거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도 그런 심정이 되는 모양이다.

갑자기 차를 사야 하는 상황이 불리한 것은 새로 온 사람이나 이미 있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미국에 먼저 와 사는 사람이라도, 갑자기 주어진 미션을 놓고 닳고닳은 딜러를 상대로 하여 기적의 흥정을 하며 차를 끄집어 내오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아야 할 것은 차값뿐만 아니라 이런 여러 사정도 포함된다.

나도 지내면서 보니 조금 비싸게 산 듯 했다고 했다. 그러나 차값은 둘째치고,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차를 사러 갈 엄두나 났을 것인가. 그가 서너 시간씩 나를 태우고 주변 딜러들을 둘러보는 동안 기름값이라도 내라고 했던가. 생면부지의 사람임에도 우연히 선후배가 되었다는 인연으로 밥이며 커피며 사 먹이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들을 제쳐놓고, 나중에 차값을 많이 깎아주지 못했다고 원망한다는 것은,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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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흔히 trade-off의 성격을 가지며, 우리는 많은 경우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하나를 취하려면 다른 것을 손해봐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시간과 돈의 반비례 관계가 가장 실감나는 사례일 것이다. 빨리 하려면 돈이 든다. 급행료다. 혹은 게으름 피우다 마감 넘기면 돈이 더 붙는다. 연체료다. 거꾸로, 서둘거나 시간 계산을 잘 하면 돈이 절약된다. 돈과 시간 둘 다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또 편하려면 돈이 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 절약할 수 있다. 품질 좋은 제품은 대부분 비싸다. 아마존닷컴 같은 데서 싼 제품을 사서 써보고 나서 투덜거리는 리뷰에 흔히 나오는 말 'you get what you pay for'도 비슷한 맥락. '싸고 품질 좋은' 같은 일은 실제로는 잘 벌어지지 않는 'too good to be true'.

차값에 민감하다면 당장 사지 말고 시간을 두고 값을 깎아야 한다. 대신 그동안 겪게 될 불편은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 하거나 당장 차를 굴리는 일이 중요다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trade-off다. 아무리 선배가 도와주고 현지인이 돌봐 주더라도 이런 원칙을 뒤집기는 어렵다. 세상 일이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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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김승훈 2014/09/12 19:43 # 삭제 답글

    이런 글 정말 좋습니다.
  • deulpul 2014/09/13 09:24 #

    감사요-. 글도 음악이나 음식처럼 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호오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 새알밭 2014/09/13 01:28 # 삭제 답글

    이 글을 보니 옛날 이민 초기 시절이 떠오릅니다. 대개 이민을 오면 그 사람의 직업은 공항으로 마중나온 사람의 직업을 따라간다는 말도 있었지요. 그만큼 이민 초기 정착을 도와주는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는 뜻일 겁니다. 토론토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편의점에 들어가면 십중팔구는 한국인일 것이어서 도움을 받기 쉬울 거라는 말도 들었고요. 하지만 요즘은 편의점 비즈니스가 사양길이어서 그런 추세도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제 경우는 오자마자 대학에 진학을 하는 관계로 그런 속설에 해당되지도 않았고, 제게 달라붙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민 코치를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차도 '한국 차만 아니면 된다'라는 원칙 아닌 원칙말고는 달리 없어서, 별로 고민하지 않고, 그 중 값싸고 견실한 혼다 씨빅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 차를 기피한 건 품질 때문이 아니라 한국에서 줄창 국산차만 탄 데 따른 피로감 때문이었습니다. 어디 한 번 다른 차도 좀 굴려보자는 뭐 그런...

    캐나다의 경우, 특히 대도시로 정착하는 이민자들에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거개는 교회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아예 이민자 전담 인력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죠. 일종의 신도 유치 전략인 셈입니다. 이민 정착을 발 벗고 도와줬는데 그 교회에 안 나가기는 어렵겠죠 ㅎㅎ. 하지만 요즘은 캐나다 이민자가 현격히 줄었다고 하는데, 세월호 사태 이후 잠깐 늘 공산도 있을 듯합니다. 아무려나 낯설고 말 선 나라에서 적응하는 일은 늘 어려운 것 같습니다.
  • deulpul 2014/09/13 10:07 #

    가끔 구글 애널리틱스를 통해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의 지역 통계를 볼 때가 있습니다. 야... 정말 한국인의 세계 진출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세계 각국, 저는 처음 듣는 도시 -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의 삶은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곳곳에 나가 힘차게, 혹은 외롭게 사시는 분들 참 많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새알밭님도 그런 분 중 하나이겠지요.

    교회를 비롯한 종교 커뮤니티가 새로운 이민자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일을 저는 좋게 보고 있습니다만, 제가 있는 곳이 그러한 일과 관련하여 잡음이 나오거나 하는 일이 비교적 적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낯선 외국 땅에서 삶을 시작하는 일이란,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 과거와 잘 보이지 않는 미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낀 채 사는 법을 익혀야 하는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 피렌체 2014/09/16 17:27 # 삭제 답글

    가끔 들어와서 글을 봅니다. 한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아 아쉬웠는데 요즈음 다시 글들이 올라와 즐겨 보고 있습니다. 이번 글도 너무 와닿는 글이네요. 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쓰시는 능력이 탁월하십니다.
  • deulpul 2014/09/17 05:11 #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기대하거나 읽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는 글이 어떤 종류일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어떤 영화에서 한 정치인이 선거에 떨어지고 나서 "정치 수십 년 해오지만 유권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모르겠다"라고 한탄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저도 그 비슷한 심정입니다. 아니, 왠지 글투부터 합니다체로 고쳐야 할 것 같은... (자주 하는 고민.)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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