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가족 섞일雜 끓일湯 (Others)

심야에 달 보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 아파트 계단에서 쿵쿵 소리가 난다. 윗집 남자가 아내와 함께 가구를 들고 내려온다. 앞쪽의 남편이 아랍어로 뭐라뭐라하는데, 뒷쪽의 아내는 힘이 부친지 가구가 계단에 닿아서 쿵쿵쿵 소리가 난다. 지금은 밤 11시30분이다.

계단에 올라가서, 여자 대신 뒷쪽을 들었다. 부부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받아들자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히잡을 쓴 여자는 집으로 들어가고, 나와 남자는 가구를 들고 내려왔다. 가구는 쓰레기장으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쩡한 서랍장 같았다.

이걸 왜 버리니?
우리 이사 간다.
그래? 언제?
내일.

이 집은 이집트 가족이다. 미국 생활을 끝내고 이집트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주차장에서 그 집 차가 사라진 지 며칠 됐다.

이 가족은 이 아파트에 나보다 먼저 들어와 살았다. 내가 처음 이사왔을 때, 남자는 빼빼 말랐는데 여자는 몹시 뚱뚱해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윗집에서 걷는 소리가 쿵쿵 나면 이건 아내가 걷는 것, 콩콩 나면 이건 남편이 걷는 것.

두어 달이 지났을까, 갑자기 여자가 삐쩍 말라버렸다. 대신 바구니 하나가 부부를 따라다녔다. 애를 낳았다. 뚱뚱한 게 아니라 임신중이었다. 언제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다니기 때문에 임신인 줄을 몰랐다. 머리가 곱슬곱슬한 아기는 벌써 두 살쯤 됐다. 여기저기 잘도 걸어다녀서 엄마 아빠가 쫓아다니기 바쁘다.

바로 아래윗집에 살면서도 이야기를 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자동차 전등이 그대로 켜 있을 때 문을 두드려 알려준 것, 그리고 어느 날 한밤중에 비바람이 치며 토네이도 경보가 울렸을 때, 잠옷 바람으로 만나서 걱정하는 이야기를 잠깐 나눈 것 정도가 전부다.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것은 내가 심야형 인간인 탓이 컸을 것이다.

이집트 사람인 것도 우연히 알았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데, 트로츠키처럼 생긴 낯선 사람이 집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뭐 도와줄까?
여기 혹시 누구누구라고 어디 사는지 아니?
음, 잘 모르겠는데...
이집트 사람인데, 여기 집 중 하나인데.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를 공유하는 네 집은 각각 한국인, 미국인, 중국인, 그리고 아랍인이다. 그러니까 이집트인으로 추정되는 집은 하나밖에 없다. 2층 올라가봐. 아마 거기일 듯.

30여 미터쯤 떨어진 쓰레기장에 가구를 옮기고 난 뒤, 주차장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집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공부를 마친 부부는 돌아가서 정부 부서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올 때 그의 정부는 무바라크 정부였을 것이다.

어디로 돌아가니? 카이로?
거기서 가까운 곳이다. 넌 어디서 왔지?
난 한국인이다.
아, 한국인, 서울? 나도 학과에 한국인 친구 좀 있다. 한국인은 친절하고 굉장히 열린 사람들이야. (목소리를 좀 낮추어서) 중국인하고는 다르다.
그래? 그런 이야기 들으니 반갑네.

넌 참 운이 좋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요 몇 년, 이집트 시끄럽지? 고국에서 벌어진 일,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니?
언젠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지. 무바라크가 몇 년 집권했는지 아냐? 30년이야, 30년!
잘 알지. 우리도 비슷한 경험 있다. 우린 한 20년쯤 된다.

이렇게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슬펐다.

지금도 혼란스러운데, 군부가 문제다. 힘이 아주 강해서, 이집트 운명을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것도 잘 안다. 이집트와는 달리 나의 조국에서 그런 일은 이제 과거사가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일을 벌인 인간들은 여전히 뻔뻔하게 잘 살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군인 출신 '스트롱 맨', 무슬림 형제단 같은 단어를 쓰며 이집트에서 벌어진 일을 내게 간단히 말해 주었다. 이집트는 2011년 혁명으로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오로지 혼란이었다. 이슬람 세력과 군부, 자유주의 세력이 대립하고 있으며, 쿠데타와 반정부 시위, 권력이나 반대파끼리의 충돌로 인한 살육이 계속되어 왔다. 한때 인류 최고의 문명을 건설했던 이 나라는 독재자들의 욕심으로 망가진 끝에, 이제는 나라를 다시 건설하는 일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80년대에 누군가 한국인을 만났다면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이사간다니, 이참에 사과할 게 있다. 그동안 밤에 좀 시끄럽지 않았니? 내가 밤에 일을 하고 늦게 자는 버릇이 있어서.

쿵쿵거리는 소리는 아래로 내려오고 사람 목소리는 위로 올라간다. 특히 굵은 남자 목소리가 그렇다. 위에 정상인들이 살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밤이면 생활 소음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전화는 어쩔 수가 없다. 전화에 대고 속삭이면 상대편은 알아듣지 못하거나 오해를 한다. 또 가끔 기타를 뚱땅거리기도 하는데, 극히 소리를 죽이긴 하지만, 위에서 들으면 어떻게 들릴지는 짐작할 수 없다.

아니, 조금도 문제 없었다. 나야말로 사과해야겠네. 애가 걷기 시작하면서 우르르르 뛰곤 해서 그거 말리느라고 애쓴다. 내 친구도 이 아파트 사는데, 그 집에도 애가 있어서 맨날 아랫집에서 천장을 두들긴다고 한다. 뛰지 말라고.

아이가 뛰는 소리가 종종 나긴 한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고(아마도 저렇게 말리는 탓이겠지), 애 키우는 집 대충 다 그렇잖나. 내가 이것저것 까탈 예민해도 이쪽으론 둔감한지, 불편하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심야에 주차장에 우두커니 서서, 국제 정세와 생활 윤리와 우울한 현재와 모호하거나 밝은 것 같은 미래와 커 가는 아이들에게 이식할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우리는 왜 진작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을까 하며 웃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 나와의 거리를 좁혀와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뒤로 물러서야 했다. 밤이라 내가 목소리를 낮춘 탓도 있겠지만, 그의 습관인 것 같기도 했다.

야, 우리가 더 이야기하면 너의 부인이 나를 미워할 거야. 이사 뒷정리하느라 바쁜데 너 붙잡아두고 있다고.
아냐, 다 했다. 일도 없고 짐도 없다. 여하튼 이제 들어가봐야겠네. 행운을 빈다.
그래, 너와 너 가족의 이집트 새 삶에도 최고의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빌께.

이 이집트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트로츠키처럼 생긴 그의 친구가 집을 찾을 때 한 번 듣긴 했는데, 너무 복잡하고 낯설어서 기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도 나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는데,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음날 낮에 나가면서 보니, 늘 커튼이 걷혀 있던 그의 집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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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윤주한 2014/09/19 09:34 # 답글

    잘 봤습니다.
  • deulpul 2014/09/19 10:38 #

    감사요-.
  • tazuya 2014/09/19 13:40 # 삭제 답글

    오늘의 글에서는 왠지 수필의 느낌이 납니다. 저도 아파트에 사는데 누군가와 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네요. 요즘 아파트 이웃들끼리 가장 많이 하는 대화는 "시끄러워요" 가 아닐런지. 그나마 경비원 아저씨랑 서로 인사를 자주 주고 받는데 며칠 전, 무인 경비 시스템을 도입해서 경비원 지출 비용을 줄이자는 제안서를 읽어보니 이제 그것마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지더군요.
  • deulpul 2014/09/19 16:46 #

    다들 생활이 빡빡하고 바빠서 그런 것이겠지요. 난방비 떼어먹거나 공사 발주하고 떡고물 챙기는 것 같은 비리 사건이 안 벌어지는 게 어딥니까... 주거지에서 공동체라 할 무언가가 형성되기 어려운 구조나 문화는 삶의 질에도, 또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때 이에 대처하는 대응의 측면에서도 크게 불리한 환경인 것 같습니다. 오바마도 출발은 커뮤니티 오가나이저였는데 말입니다...
  • snowall 2014/09/20 03:30 # 삭제 답글

    좋은 이웃을 두셨네요. 저는 추석 연휴를 보내고 돌아왔더니 집앞에 짜장면 빈그릇이 떡...하니 놓여있네요. 복도식 아파트라 같은 층 주민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범인은 못 잡겠고요...
  • deulpul 2014/09/20 04:57 #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짓을 하나요. 돈 들여 버릴 것도 아니고 음식점에서 수거해갈 것인데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어디나 사람의 종류는 다양하고 이상하거나 나쁜 인간들은 늘 일정한 정도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나 문화에 따라 그 수치가 조금 다르겠지요. 저도 공동 세탁실의 아파트별 사물함(오픈)에 보관하는 세제를 어떤 인간이 계속 써서 빡친 적이 있습니다. 몰카라도 달아서 잡아내고 싶은 생각이 다 나더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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