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정 상해요 말씀言 말씀語 (Words)

다 ‘기레기’ 덕분입니다

제값을 못하는 기자들 때문에 오히려 기자가 드라마 소재로 떠오른다는 칼럼이다. 기자가 썼다. 본문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강조는 내가).


“기자요? 재미없잖아요. 수술이나 요리처럼 다이내믹한 볼거리를 만들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아요.”

몇년 전 만났던 한 드라마 작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미있게 못 만들면서 남 탓은….’ 빈정은 좀 상했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방송됐던 드라마나 영화 중 기자가 전면에 나섰던 작품 치고 인기를 끌었던 사례를 찾기 힘들다.


언제부터인가 '빈정이 상하다' 혹은 '빈정 상하다'라는 정체불명의 말이 쓰인다.

'빈정'이라는 낱말은 없는 말이다. 독립된 단어가 아니라, '빈정대다', '빈정거리다'의 형태로만 쓰인다. '빈정빈정'이라는 말은 있다. 남을 비웃으며 놀리는 모양을 일컫는 말이다. 일종의 의태어다.

빈정빈정 - 빈정대다, 빈정거리다 - 빈정 (X) - 빈정(이) 상하다 (X)

'빈정 상하다'는 무슨 뜻인가. 맥락으로 짐작해 보면 '비위가 상하다' '감정이 상하다'의 뜻으로 쓰는 듯하다. 말하자면 '빈정거리다'와 '비위가 상하다'를 뒤섞어놓은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말인 데다가, 뜻까지 혼동되어 있다. '빈정'에 정(情?)이 들어있다고 해서 이를 '감정'과 같은 종류의 말로 착각했다는 의심도 할 수 있다.

이와 얼개가 아주 비슷한 말의 예는 '건들거리다'이다. '건들거리다', '건들대다'는 가볍게 흔들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건들건들'이란 의태어는 있지만, '건들'이라는 말은 없다.

'빈정이 상하다'라는 말은 '건들이 어지럽다' 같은 꼴이다. 얼마나 억지인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건들건들 - 건들대다, 건들거리다 - 건들 (X) - 건들(이) 어지럽다 (X)
솔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건들이 어지럽다. (X)

기자는 '쓰는 사람'이다. 글(말)을 다루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족보에도 없는 잘못된 말을 사람들이 흔히 쓴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쓰고 전파해서는 안 된다.

'빈정 상하다'라는 말을 볼 때마다 나는 '비위가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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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모임에서 희한한 말을 들었다.

'생일자'.

생일 맞은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이런 말도 없다.

1. 사람의 뜻을 가진 접미사 자(者)가 붙는 경우는 주로 앞에 '-하다'의 어간이 되는 한자어 명사가 올 때다.

승리하다 - 승리자
운전하다 - 운전자
보행하다 - 보행자
운영하다 - 운영자
보유하다 - 보유자
독재하다 - 독재자
편집하다 - 편집자
연주하다 - 연주자
지도하다 - 지도자
납세하다 - 납세자
노동하다 - 노동자
동업하다 - 동업자
투자하다 - 투자자
개척하다 - 개척자
경쟁하다 - 경쟁자
계약하다 - 계약자
방랑하다 - 방랑자
합격하다 - 합격자
시청하다 - 시청자
대기하다 - 대기자
퇴직하다 - 퇴직자

2. '-하다'보다 드물지만, 피동형 '-되다'가 붙는 한자어 명사에 뒤따라올 때도 있다.

당선되다 - 당선자 (당선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당선되는 사람)
당첨되다 - 당첨자 (당첨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당첨되는 사람)
수배되다 - 수배자 (수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수배당하는 사람)
수감되다 - 수감자 (수감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수감당하는 사람)
피살되다 - 피살자 (피살된, 즉 살해를 당한 사람)

3. '-하다', '-되다'의 어미로 연결되는 한자말이라고 해서 모두 '자'를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하다 - 공부자 (X)
낙심하다 - 낙심자 (X)
돌진하다 - 돌진자 (X)
수영하다 - 수영자 (X)
등산하다 - 등산자 (X)
운동하다 - 운동자 (X)
출판하다 - 출판자 (X)
합창하다 - 합창자 (X)

이 경우 억지로 우길 수는 있다. '자'가 붙을 수 있는 말과 같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뜻은 이해가 된다.

4. 이미 다른 말이 있어서 '자'를 붙일 수 없는 경우도 흔하다.

간호하다 - 간호자 (X) 간호사 (O)
비행하다 - 비행자 (X) 비행사 (O)
축구하다 - 축구자 (X) 축구선수 (O)
성악하다 - 성악자 (X) 성악가 (O)
수집하다 - 수집자 (X) 수집가 (O)
청소하다 - 청소자 (X) 청소부 (O)
요리하다 - 요리자 (X) 요리사 (O)
배달하다 - 배달자 (X) 배달부, 배달원 (O)
임신하다 - 임신자 (X) 임신부 (O)
재판하다 - 재판자 (X) 판사 (O)
미용하다 - 미용자 (X) 미용사 (O)

5. 그러나 '-하다', '-되다'로 연결되지 않는 명사에 '자'를 붙이지는 않는다.

서적 - 서적 만들거나 읽는 사람 - 서적자 (X)
일기 - 일기(날씨) 전하는 사람 - 일기자 (X)
도로 - 도로 다니거나 수리하는 사람 - 도로자 (X)
식기 - 식기 씻거나 만드는 사람 - 식기자 (X)
신문 - 신문 만들거나 보는 사람 - 신문자 (X)
애정 - 애정을 받거나 갖는 사람 - 애정자 (X)
비애 - 비애의 감정을 갖는 사람 - 비애자 (X)
재산 - 재산 있는 사람 - 재산자 (X)
성질 - 성질 있는 사람 - 성질자 (X)
생일 - 생일을 맞은 사람 - 생일자 (X)
환갑 - 환갑을 맞은 사람 - 환갑자 (X)

그래서 노동자는 있어도 자본자는 없는 것이다.

6. '-하다'나 '-되다'로 연결되지 않는 명사에 '자'가 붙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인격 있는 사람 - 인격자
채무 있는 사람 - 채무자
경력 있는 사람 - 경력자
공직 맡은 사람 - 공직자
후보가 된 사람 - 후보자

이런 말은 예외적인 경우다.

왜 '생일자' 같은 말이 나왔는지 이해는 된다. '생일 맞은 사람' '생일인 사람'이라고 쓰면 길어진다. 말의 경제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랄까. 그 배경에는 글자와 생각이 모두 짧아지는 우리 시대의 기계의존적 소통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든 생활이든, 경제만 쫓으며 살 수는 없다.

'빈정 상하다'까지 포함하여,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대중매체, 특히 말글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연예인들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내뱉은 말을 거르지 않고 내보낼 뿐만 아니라 자막으로 뇌리에 각인까지 해 주는 엉터리 방송이다. 나쁜 교재, 나쁜 선생이 국민의 말글 생활을 망친다.

다 매체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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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camino 2014/10/03 12:15 # 삭제 답글

    링크 열었다가 인용하신 부분을 넘기지 못하고 그냥 닫았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경우에 매체 밖에서 더 나은 글들이 보이더군요. 내용은 물론이고 말과 글의 쓰임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한국어의 오염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만, 점점 심해지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바르지 않은 쓰임에 대해서 지적하면 꼰대질 취급마저 받는 세태이니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단정하고 소박한 글, 말이 자취를 감춘 세상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싶습니다.
    늘 느낍니다만, 참 글이 꼼꼼하십니다. 따로 노력을 들이시는 것인지, 아니면 성격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읽으면서 감탄합니다.
  • deulpul 2014/10/07 10:00 #

    그것이 성격이라면 축복보다는 저주라고 해야 하겠... 저는 언어에 관해서는 보수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자랑스러운 보수주의자이지요. <strike>가스통 굴릴 기세</strike> 한 교열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경우 기자들 대부분이 영문법을 더 잘 안다. 국문법체계는 신문사에 입사한 후 겨우 배운다. 결과적으로 기자들이 산출하는 기사문의 완성도면에서 극명한 차이가 난다." 이런데도 매체들이 경제적 이유와 속보성 같은 핑계로 말을 다듬는 기능을 점점 축소하여 간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체란 국민이 늘 접하는 언어 교재라는 점에서요...
  • ㅈㄴㄱㄷ 2014/10/07 09:46 # 삭제

    '보주수의자'라는 오타가 댓글의 설득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 deulpul 2014/10/07 10:01 #

    @ㅈㄴㄱㄷ 가스통 굴리는 사람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보주수의자 맞습니다. (라고 우긴다 흑) 밝은 눈을 가지셨네요! 얼른 수정하였습니다. 잡아주셔서 감사요~
  • 친일청산 2014/10/04 03:06 # 삭제 답글

    '빈정 상하다'

    수 년 전에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말들이 넘쳐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청소년과 젊은층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이 이런 문제에 특히 더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 deulpul 2014/10/05 07:50 #

    그렇게 똑 부러지게 자꾸 쓰지 마십시오, 익숙해진단 말입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이 말 나돌기 시작한 지도 꽤 됐네요. 낯설고 거부감 드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요.
  • 타츠야 2014/10/06 16:04 # 삭제 답글

    "빈정대다" 에 대해서는 저도 빈정이 명사로 사용 가능한 줄 알고 있었는데 처음 알았네요. 좋은 포스팅에 오늘도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 deulpul 2014/10/06 17:46 #

    자꾸 보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혼동을 하기 십상이겠지요. 타츠야님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 kalms 2014/10/10 16:52 # 삭제 답글

    생일자라는 말은 교회에서 처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에 의존)
    교회라는 공간에서 (보통 한달씩 모아서 챙겨 주는데) 같은 달에 생일을 맞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골고루 있게 되니
    한국문화상 높임말을 쓰기도 그렇고 안쓰기도 그런 애매한 상황이 생겨서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생긴 표현이,
    "선배님, 식사 하셨어요?" 입니다.
    선배 뒤에 '님'이 붙는 건도 불편한데
    "진지 잡수셨어요?" 라고 하기에는 또 어색하니 이해는 됩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님, 식사하셔요~ 라고 말하는 며느리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 deulpul 2014/10/11 04:46 #

    구글로 이 말을 검색해 보면, 저의 경우 검색 결과 1~2쪽에 나오는 17개 관련 항목 중에서 기독교 관련 사이트가 6개, 불교 관련 사이트가 1개로 종교 사이트에서 많이 쓰는 것으로 나오긴 합니다. 연령대가 비교적 고르고 동일한 집단에서는 물론이고 위의 경우에도 '생일 맞은 사람' (업체가 고객을 상대로 하는 경우처럼 존대의 의미를 담으려면 '생일 맞은 분')으로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대상의 연령대까지 정밀하고 세심하게 고민하여 나온 말이라시니, 장고 끝에 악수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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