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국어는 제3의 언어 말씀言 말씀語 (Words)

한글날 기념이라기보다, 이런 생각도 해 보면 좋을 듯해서.

외국어에서 쓰이는 말을 가지고 와서 한국어로 적당히 옮기지 않고 그대로 쓰는 일이 잦다. 이른바 '보그 병신체' 같은 너절하기 이를 데 없는 글자긁어모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어떤 외국어는 우리에게 비슷한 개념이 없어서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말이 뜻하는 내용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원래의 외국어를 써야 한다. 또 고유명사는 그대로 쓰는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그것에 엇비슷하게 해당하는 우리 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말을 쓰지 않고 외국어를 그냥 쓰면, 그 단어는 한국어라는 물에 들어와 다른 말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의미가 한 켜 입혀진다. 이 켜를 뭐라고 할까. 뭔가 참신하거나 뭔가 현대적이거나 뭔가 과시적거나 뭔가 우월하거나, 혹은 이 모든 것이 뒤섞인 얇고도 끈적끈적한 켜다.

이 점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원래의 말에는 그런 부가적인 의미의 켜가 없다.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새로운 우월적 의미가 덧붙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어 속에 섞인 이 말들은 원래의 뜻보다 조금 더 앞서고 상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말값의 과대평가랄까.

한국인이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말하는 것과 미국인이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인의 콜라보레이션은 그저 한국어의 '협업'과 비슷한 정도의 말느낌 및 말값을 가진다. 그런데 한국인이 '협업'이라고 한국말로 바꾸지 않고 '콜라보레이션'이라고 원어를 그냥 쓰면, 바로 이런 켜가 입혀진다.

따라서 한국인이 쓰는 '콜라보레이션'은 미국인이 쓰는 '콜라보레이션'과도 다르고 한국어 '협업'과도 다르다. 바로 그런 차이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쓰는 것이지만 말이다.

2.

한국인은 '블루투스'라고 말하면서 파란 색으로 된 이빨 같은 것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인은 (물론 이게 이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은 당연히 알면서도) 말 자체에서 그런 심상을 먼저 갖게 된다. 한국인이 '호빵맨'이라는 말을 들으면 동그랗고 볼록한 호빵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외국인은 'Hoppangman'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오래 전에 영어 '치킨 수프'를 한국어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를 놓고 벌어지던 논쟁과 비슷하다. 가장 쉬운 번역은 물론 그냥 '치킨 수프' 혹은 '닭고기 수프'라고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 놓으면, 영어권 사람들이 갖는 치킨 수프의 말느낌을 짐작하지 못한 채 글을 읽게 된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왜 하필 닭고기 수프인가? 소고기 수프도 아니고 야채 수프도 아니고 말이다.

치킨 수프는 영어권에서 매우 대중적인 수프로, 이를테면 감기에 걸려 몸이 안 좋을 때 어머니가 따끈하게 끓여줘서 먹고 힘을 내는 것 같이 인식되는 존재다. '영혼을 위한...'은 영혼에 감기가 걸렸을 때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이 책을 읽으면 힘이 나고 도움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한글로 쓰인 '치킨 수프'나 '닭고기 수프'에는 그런 맥락이 담겨 있지 않다. 그 맥락까지 이해하도록 하려면 '영혼을 위한 얼큰한 콩나물국' 같은 모양이 되어야 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여하튼 언어는 언어문화적인 맥락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말이라도 물을 건너가면 그 맥락이 잘 전달되지 않고 따로 놀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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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몇 가지 말들을 적어 보았다. 이런 외국어를 이렇게 옮기거나 바꿔 써야 한다는(흔히 '순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들이 원고장 사람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인식되는지를 한번 짚어보기 위함이다. 고유명사까지 함께 생각해 본 것은 그 때문이다.

왼쪽은 우리가 그대로 가져와 쓰는 말이고 오른쪽(우리말로 비슷하게 바꾼 것)은 그들이 이 말을 쓰면서 갖는 실제 어감이다. 양자 사이에 느낌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콜라보레이션 - 협업
린 스타트 - 가벼운 출발
스타트업 - 신생 기업
프레젠테이션 - 발표
마우스 - 쥐
트랙볼 마우스 - 공굴림 쥐
허핑턴 포스트 - 최씨 일보
뉴욕 타임스 - 서울신문
트위터 - 짹짹이
페이스북 - 얼굴책
데모 버전 - 시연판, 맛뵈기판
블루투스 - 파란 이(빨)
애플 아이폰 - 사과표 아이전화기
월마트 - 박씨 가게
타겟 - 표적
맥도널드 - 김씨네
버거킹 - 왕만두
웬디스 - 영희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 대구 닭튀김, 부산 어묵
TGI 프라이데이 - 금요일이라 행복해요, 불타는 금요일
드로잉 강습 - 그리기 강습
워킹 홀리데이 - 일하는 휴가
스마트 워치 - 똑똑한 시계
마이크로 브루어리 - 소형 양조(업체)
웨어러블 디바이스 - 몸에 걸칠 수 있는 기기, 착용용 기기
모바일 디바이스 - 휴대용 기기
델 컴퓨터 - 장씨 컴퓨터
HP 컴퓨터 - 황박(황씨박씨) 컴퓨터
이메일 - 전자 편지

(좋은 예들이 생각나면 더 추가)

대개의 말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사항은, 왼쪽은 뭔가 세련되어 보이는데 오른쪽은 심심하고 평범하거나 심지어 낡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KFC'가 '대구 닭튀김'이나 '부산 어묵'보다 세련되고 참신할 이유는 전혀 없다. KFC 창업자가 켄터키의 노스 코빈이라는 시골 한 구석에서 닭고기를 팔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4년 전이다. 켄터키 자체가 도회지에 사는 미국인에게는 변방의 느낌을 주지만, 게다가 노스 코빈은 현재 인구로도 2천명이 안 된다. 대구나 부산으로 예를 든 것도 많이 봐준 셈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에게는 뭔가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것. 바로 이 차이가 외국어는 없고 한국어에 섞일 때에만 덧씌워지는 한국적 과대포장인 셈이다.

이것은 외국의 대중적인 제품이며 상표가 이름 그대로 한국에 들어가면 고급 제품으로 인식되(고 실제로 그렇게 팔리)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외국의 일상어가 한국으로 들어가면 전문어가 되는 양상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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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말들이 실제로 쓰이는 맥락은 다음과 같이 된다. 외국말을 쓰는 주체는 편의상 미국인이라고 하자. 환기하건대, 모두 이렇게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니라, 원어민은 어떤 느낌으로 쓰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임.

한국인의 느낌: 이번에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이 토픽으로 프레젠테이션 하기로 했어요.
미국인의 느낌: 이번에 고객 모임에서 이 주제로 발표하기로 했어요.

한국인의 느낌: 이번에 런칭한 프로젝트는 세 조직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미국인의 느낌: 이번에 시작한 사업은 세 조직의 협업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한국인의 느낌: 오늘은 버거킹 가서 간단하게 브런치로 밥을 먹었다.
미국인의 느낌: 오늘은 왕만두집 가서 간단하게 아점으로 밥을 먹었다.

한국인의 느낌: 이번에 새로 나온 애플 아이폰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미국인의 느낌: 이번에 새로 나온 사과 아이전화기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한국인의 느낌: 이 배큠은 세일할 때 타겟에서 산 거야.
미국인의 느낌: 이 청소기는 할인판매할 때 표적에서 산 거야.

한국인의 느낌: 삼성에서 새로 개발한 스마트 워치는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일종입니다.
미국인의 느낌: 샘썽에서 새로 개발한 똑똑한 시계는 몸에 걸칠 수 있는 기기의 일종입니다.

말에도 성격이 있다. 어떤 말은 친절하고 어떤 말은 권위적이며, 어떤 말은 폭압적이고 어떤 말은 간사하다. 위에 예로 든 말 중에서 쉽게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말하자면 잘난 체 하는 성격을 가진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원어 그대로 쓰는 게 편할 때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덧켜를 씌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을 쓰자는 의미 이전에, 말의 가치를 배반하거나 가감하지 않고 원말의 그것 그대로 되살려 전달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안 그러면, 외국에서 나온 개념과 용어는 모두 고유명사로 인식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쓰다 보니 역시 우리말 캠페인, 아니 우리말 운동이 되어버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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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웅이 2014/10/09 17:48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켜라는 표현 참 좋네요.
  • deulpul 2014/10/10 04:02 #

    켜켜켜켜켜...(웃는다) 감사합니다.
  • 프리니 2014/10/09 22:23 # 답글

    비슷한 생각은 자주 했었는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외국어를 좋아할까ㅠㅠ
    나 혼자라도 되도록 우리말로 얘기하도록 신경쓰면서 지냈는데
    이렇게 잘 정리되어있으니 너무 반갑네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deulpul 2014/10/10 04:31 #

    사람들 모였을 때 가끔 '외국어 말하면 벌로 술먹기' 놀이를 하는데, 조금 하다 보면 모두가 대취해 있습니다...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많이 쓰고 있나를, 그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런 현상 자체를 새삼 발견하고 놀라곤 하죠.
  • Ellery 2014/10/10 00:07 # 삭제 답글

    언제나 좋은 들풀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어라고 여겨지는 많은 단어들이 19-20세기에 일본이 서양문물을 들여오면서 한자어로 바꾼 단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쉽지않은 문제인것 같네요. 어떻게 보면 일본식 한자어도 한국어와는 거리가 있는 것을 볼때 한번 장기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한국어 단어로 바꿀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모색해 보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 deulpul 2014/10/10 05:17 #

    당시 외국에서 물밀듯 들어오던 외국 문물은 대부분 조선에 대체어가 없던 개념이나 사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있더라도 바뀌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겠습니다만... 계좌-구좌 같은, 다른 한국어가 있는 일본식 한자어를 잡아내고 고치는 것은 이를테면 문장을 다듬는 사람들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만, 요즘에도 그런 일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수행되는지는 의문입니다.
  • 2014/10/10 03:25 # 삭제 답글

    국립국어원에는 이런 답변이 있군요.

    http://www.korean.go.kr/09_new/minwon/qna_view.jsp?idx=65868

    뭔가 말씀하신거랑은 맥락이 조금 다른 듯도 하지만 신조어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반응이네요..
  • deulpul 2014/10/10 06:26 #

    이것은 앞에 쓴 '빈정 상하다' 관련글(http://deulpul.net/4047412)에 대한 댓글이 잘못 붙은 것이겠죠? 그렇게 이해하고 씁니다... 본문을 쓰면서, 언어의 역사성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만, 그런 태도를 국립국어원에서 본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다른 몇 가지 답변과 함께 종합해 보면, 이 말에 대한 국립국어원 응답자의 태도는 '사전에 없는 말이니까 신조어다(이것은 수용 여부를 따지지 않는 표현인 듯 http://www.korean.go.kr/09_new/minwon/qna_view.jsp?idx=65795),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마음이 상하다'로 쓰는 게 좋다(http://twitter.com/urimal365/status/231207975589666816), 그러나 언중이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정식 낱말이 될 것이다'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납득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이를 포함하여 저는 지금의 국립국어원을 한국어에 대한 권위적인 해석을 내려줄 수 있는 기관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happyalo 2014/10/12 09:34 # 삭제 답글

    아, 뭣보다 아점!
    왜 브런치라고 표현하면 세련되게 생각하는지 싶어요.
    전 아점은 자주 하는데 브런치는 거의 이용하지 않아서 말이죠. ^^
  • deulpul 2014/10/12 20:04 #

    롯데호텔에 아점 먹으러 가자... 는 좀 이상하다는 것이겠죠. 또 한국 사람 처지에서 볼 때, 음식에 상관 없이 그저 아침과 점심의 중간이라는 뜻을 갖는 아점에 비해, 특정한 (서구적) 메뉴들과 긴밀하게 연결되게 마련인 브런치는 다른 말로 인식되는 탓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또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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