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라, 가제트 팔! 섞일雜 끓일湯 (Others)

언젠가 근처에 있는 큰 헌책방에 들른 적이 있다. 잘 정리된 서가를 둘러보다, 글자 그대로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한 5분 동안 그랬다. 지나가던 직원은 씩 웃었다. 나는 웃음 소리를 억누르느라 아주 고생했다.

이 책 때문이었다.




그렇지, 그 쓸모없는 발명품, 진도구(珍道具) 모음집이다. 영문판으로서, <쓸모없지 않은 일본 발명품(The Big Bento Box of Unuseless Japanese Inventions)>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한국어판도 나와 있다.

이 발명품들, 그리고 이를 제작한 발명가 가와카미 겐지는 한국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이 책 생각이 난 것은 '셀카봉' 때문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셀카봉으로 찍은 자기 사진을 종종 만나게 된다. 셀카봉이란 '셀카'를 좀더 넓은 각도로 효과적으로 찍을 수 있도록 카메라를 달아 거리를 늘릴 수 있는 연장식 막대다.

어떤 제품들로 찍은 사진인가 봤더니, 예를 들면 이런 제품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건 진도구 책에 나와 있는 한 발명품과 아주 흡사하지 않은가.




아이디어가 누가 먼저인지, 발명품과 관련된 권리, 이를테면 특허권 같은 것은 어떻게 되는지, 아니 우선 겐지씨는 자신의 쓸모없는 발명품에 특허 등록을 하는지부터 모두 궁금하지만, 지금의 관심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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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구를 가리키는 영어 'unuseless'는 '쓸모없지는 않은', 그러니까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조어다. 그럼 유용한 거 아닌가? 그랬다면 'useful'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발명품들은 어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실제로 쓰려면 (다른 문제가 발생하여) 실용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말은 복잡한데, 책 아무 데나 펼쳐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저 셀카봉(영어로는 'Self-Portrait Camera Stick'이라고 되어 있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런 걸 들고 다니면서 쓴담. 만든 발명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점에서, 기술 발달로 야기되는 문화 현상이라는 맥락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unuseless가 useful이 된 것은 셀카 문화, 혹은 '셀피(selfie)' 열풍 덕분일 것이다.

1. 필름이 필요없으며 갖고 다니기 편한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고, 아예 늘 갖고 다녀야 하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이어지는 동안, 사진 찍기는 밥 먹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 더 나아가 습관과 같은 일이 되어 왔다.

2. 사진 찍기만 쉬워서는 이런 열풍이 생기지 않는다. 찍은 사진을 활용할 마당도 계속 발달해 왔다. 블로그, SNS, 이제는 사진을 위주로 한 서비스까지 무궁무진하다.

3. 자기 모습을 찍고 이를 공유하는 심리 현상과, 그 뒤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사회 배경(1인 가족, 오타쿠 문화 등)에 대해서는 좀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위와 같이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따지기 어려운 요소들이 맞물려 셀카 문화가 번성중이다. 잘 알려진 대로 셀피는 작년(2013년)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의해 '올해의 단어'로 뽑혔다. 삼성이 3천 명을 대상으로 하여 수행한 설문조사에서는 18~24세 응답자들이 찍는 사진의 30%가 셀카인 것으로 나왔다. (남자가 더 많이 찍는다는 것은 함정...)

셀카봉은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그 전에는 없던 실용성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번과 관련하여, 사진 기기가 작고 가벼워짐에 따라 그것을 얹어 사용해야 하는 셀카봉 역시 작고 날렵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겐지의 책에 나온 셀카봉 시제품에 부착된 사진기는 코니카 자동 카메라다. 물론 필름 카메라. 셔터는 유선 원격 셔터를 연결했다. 요즘 이런 카메라는 찾기도 어렵다. 현재 시판되는 셀카봉은 스마트폰을 부착하기 쉽도록 고안되어 있다. 셔터는 자동 셔터를 이용해도 되고, 전용 리모콘도 나와 있다.

삼성의 설문조사 결과를 전한 <텔레그래프>는 셀피를 "카메라를 팔 길이 거리에 두고 자신을 찍는 사진"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신체 구조를 고려하면 당연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데, 셀카봉의 등장으로 이제 이런 정의마저 수정되어야 하게 생겼다. 나와라, 가제트 팔!

이것이 사진 안에 들어가는 피사체(사람)의 확장을 의미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위에 보인 시판 셀카봉의 광고문은 "아직도 셀카를 혼자만 찍나요? 더 길어진 거리로 더 넓어진 각도가 가능하니까 여럿이 찍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일이 가능하고 또 일반화한다면, 이것은 기구의 도입 및 전파로 인해 새로운 문화 현상이 벌어지는 (이를테면 혼자 볼링을 치는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반대로,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자기(네)가 해결하려는 성향이 확대된다거나,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보편화된다는 측면에 주목하더라도 역시 탐구 대상이 될 듯하다.

여하튼 천재나 기발한 생각을 잘 해내는 사람들의 재능은 언젠가 반드시 쓸모가 있는 것 같다. 사실 겐지의 진도구 책을 보면, 당장 제품으로 만들어도 잘 팔릴 듯한 품목이 몇 있다. 만일 당신이 당대와 미래의 문화 현상을 잘 읽어내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겐지의 책을 열어 보십시오. 뚫어뻥으로 만든 지하철 손잡이가 첨단 제품으로 불티나게 팔릴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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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진도구 중 하나다. 비오는 날 바지나 치마가 젖는 것을 막아주는 우산, 'Full Body Umbrella'다. 정말 편할 것 같지 않습니까? 키에 따른 길이 조절 수단, 그리고 빠르게 펴고 걷을 수 있는 수단만 보완하면 바로 제작해 팔아도 좋을 듯하다. 중개 수수료는 제 계좌로

그런데 비를 막는 것 말고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다. 예전에 파파라치에 대해 조사하다가 비슷한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다. 할리우드의 유명 연예인이 외출을 하는데, 늘 집앞에 진을 치고 있는 파파라치 등살에 시달리다 못해 우산을 쓰고 나타난 것이다. 그 우산에는 위 그림의 투명 비닐과 같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데, 물론 검은색으로 하여 속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눈 부위는 뚫었겠지. 연예인들, 또 남 눈을 피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참고하십시오. 여의도에 대량 납품

진도구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독자적인 발상인지는 법률적으로 다툴 사항이지만(은 농담), 여하튼 문화 현상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킨 또 하나의 사례라 하겠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필요는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식에게도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이기도 한 모양이다. 열 자식 안 굶기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특정한 책이나 제품의 협찬 포스팅처럼 보이는 것은 보시는 분의 기분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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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happyalo 2014/10/12 09:28 # 삭제 답글

    또 오랜만에 들어 왔네요. ^^
    셀카 찍기는 문화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다른 나라에도 많이 파급되었나 문득 궁금해지네요.
    셀카봉을 보면서 외국 사람들이 무척 신기해하더란 얘길 여러 번 읽은 걸 보면 여전히 우리가 셀카 찍기를 더 좋아하나 싶기도 하고.
    남이 찍어주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터라, 셀카봉까지 동원하는 문화가 신기하긴 합니다.
    기록, 특히 자신에 대한 기록에 대한 욕구가 많은 거겠지요? ^^;
  • deulpul 2014/10/12 19:25 #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말씀을 들으니, 한국에서 셀카봉이 만들어 팔리기 시작한 지 이미 상당히 된 것 같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셀카에 열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happyalo님이 대답을 주셔야 하는 영역 아닙니까? 하하. 틀림없이 이미 다양한 고찰들이 있을 텐데,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들여다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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