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포도 우화 섞일雜 끓일湯 (Others)

배고픈 여우는 발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린 포도를 따려고 애쓴다. 결국 포기하면서, 이 포도는 시어서 못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신 포도 우화는 자기 합리화, 심리적 방어 기제 같은 주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먹을 수 없는 것은 못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편하다.




그런데 더불어 생각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여우가 포기한 포도는 실제로 신 포도일 수도 있다. 여우는 포도를 따서 먹어볼 수 없었으므로, 이 포도가 신지 단지는 실증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여우는 시다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비록 자기 만족을 위해 내려진 근거 없는 결론이긴 하지만,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50%의 확률로 사실일 수도 있다.

먹을 수 없는 것은 못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편하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못 먹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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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태원은 열 다섯 살 때 친구의 누나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다. 1934년에 그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이야기다.


열 다섯 살짜리 문학 소년은 그(친구의 누나)를 사랑하고 싶다 생각하고, 뒷날 그와 결혼할 수 있다 하면 응당 자기는 행복이리라 생각하고, 자주 벗을 찾아가 그와 만날 기회를 엿보고, 혹 만나면 저 혼자 얼굴을 붉히고, 그리고 돌아와 밤늦게 여러 편의 연애시를 초(草)하였다.


누나는 구보보다 세 살 위였다. 따라서 구보가 충분히 커서 사랑을 고백할 정도 나이가 되면, 누나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애인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구보로서는 이게 제일 걱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불과 두 해 뒤, 구보 나이 17, 그녀의 나이 20에 친구 누나는 시집을 갔다.

몇 년이 지난 뒤, 구보는 친구와 함께 그녀를 찾아간 일이 있다.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 앞에서, 구보는 얼굴을 붉히는 일 없이 평범한 이야기를 서로 할 수 있었다. 구보가 일곱 살 먹은 사내아이를 영리하다고 칭찬하였을 때, 젊은 어머니는 그러나 그 애가 이 골목 안에서는 그중 나이 어림을 말하고, 그리고 나이 먹은 아이들이란 저희보다 적은 아이에게 대하여 얼마든지 교활할 수 있음을 한탄하였다.

언제든 딱지를 가지고 나가서는 최후의 한 장까지 빼앗기고 들어오는 아들이 민망하여, 하루는 그 뒤에 연필로 하나하나 표를 하여 주고, 그것을 또 다 잃고 돌아왔을 때 그는 골목 안의 아이들을 모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딱지에서 원래의 내 아이 물건을 가리어 내어, 거의 모조리 회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젊은 어머니는 일종의 자랑조차 가지고 구보에게 들려주었었다.

구보는 가만히 한숨짓는다. 그가 그 여인을 아내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 그러한 여인은, 혹은 한평생을 두고 구보에게 행복이 무엇임을 알 기회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딱지치기를 하는 룰은 대개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공정한 것이었으리라. 비록 나이 차이에 따른 핸디캡 같은 것이 고려되지는 않지만, 모두 그런 점을 알고서 게임에 참가한다. 그게 싫으면 참가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다시, 딱지치기는 이미 정착되고 합의된, 나름대로 공정한 룰에 따라 진행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자기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공정하게 진행된 게임을 무효화하고 다른 아이들의 성취를 강탈하여 온다. 그 심정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권력(여기서는 나이 권력)에 기대어 룰을 무너뜨리고 제 잇속을 챙기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 방법조차 얼마나 그악스러운가 말이다. 그런 일을 하고도 "자랑조차 가지고"...

구보가 밤을 새며 연애시를 쓰던 대상은 이런 여자는 아닐 것이다. 여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세월 동안 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음을 구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일까. 어느 경우든, 구보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구보가 가만히 내쉬는 한 줄기 한숨 속에는 실망, 원망, 안도, 회한, 우울 같은 많은 감정이 복잡한 타래로 뒤엉켜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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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인연')

구보도 결혼한 뒤의 그녀와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이 아사코를 세 번째 만난 일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선생이 아사코와 함께 살았다면, 한 발 떨어져서 보기만 하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그녀의 그악스러운 성정을 체험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콩꽃처럼 귀엽고 목련꽃처럼 청순한 줄 알았던 아사코는, 선생에게 한 평생을 두고 행복이 무엇임을 알 기회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로 아사코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임에도(30대 중반 정도가 된다)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천득은 이것이 그녀의 남편과 연관 있음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남편은 잘 나가는 진주군 장교였으므로, 남편 탓에 몸과 마음이 시들어간다는 것은 사실 억측일 수도 있다. 백합처럼 시들어간 아사코는, 말하자면 제 자식의 딱지에 연필로 표시를 하는 구보의 옛사랑 누나처럼 그녀 스스로 우려낸 모습일 수 있고, 이것은 선생과 인연이 되어 뾰족집에서 같이 살았더라도 여전히 현현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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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작품들의 화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이상의 서술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남녀를 바꾸어서 생각하여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구보의 첫사랑이 그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구보를 다시 만난 일을 소설로 썼다면 구보는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혹은 아사코가 금아(琴兒)를 세 번째 만난 일을 수필로 썼다면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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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포도 우화의 교훈은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은 흔히 폄하된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화를 사랑에 적용하면,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단 포도 우화'라고나 할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왠지 훨씬 아름다울 것 같고 훨씬 소망스러울 것 같다. 저 포도는 너무 높아 내 손이 닿지 않았어. 틀림없이 맛있고 단 포도였을 거야.

이상하게도 현실은 늘 힘들고 버겁다. 그래서 늘 마음 한 구석에서 옛사랑을 가끔씩 꺼내 쓰다듬어 보게 되는 모양이다. 설령 그것이 환상이나 착각이더라도. 아니, 오히려 환상이나 착각일수록 더욱 더.

아마도 옛사랑이란 구보나 금아처럼 직접 찾아나서서는 안 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 이름을 몰래 아껴 부르며 눈 내리는 거리를 서성이기만 하면 족하다(이영훈, '옛사랑'). 좋은 때 좋은 모습만을 박제처럼, 혹은 암모나이트 화석처럼 간직하게 되는 것은 차라리 축복일 것이다. 박제하였던 동물이, 혹은 화석이었던 고대 생물이 다시 살아 꿈틀거리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리라.

상실은 당장은 아프지만 다행일 수도 있다. 단 포도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 신 포도인지도 모르니까. 목숨 걸고 좇았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늦가을날 아침 안개만큼이나 덧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면 그냥 또 살아진다.

알면서도 안 되니까 사람이고 사랑이긴 하지만.


※ 이미지: Illustration by Harrison Weir in Three Hundred Aesop's Fables by George Fyler Townsend,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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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blue303 2014/11/15 06:53 # 답글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보는게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러고 보니 이 구절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를 교과서에서 배울 때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글쓴이가 마음에 걸려한 이유가 뭐였을까요?
  • deulpul 2014/11/15 20:25 #

    두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남편이 외국 출신인 2세라서 섬세한 아사코가 가진 일본인 정서 같은 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리라는 의미, 그리고 2) 전쟁 상황에서 승전국 장교였다는 사실. 선생은 단순히 2세라는 점보다는 후자가 더 마음 쓰였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사코는 결국 패전국의 여인으로서, 일본계이긴 하지만 승전국으로 점령하여 들어온 미국인의 아내가 된 셈이니까요. 이런 점들이 마음에 걸렸다는 것은, 그 뒤에서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라고 한 데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김승훈 2014/11/16 16:45 # 삭제 답글

    얼마전에 가르치게 될 학생 명단을 보다가 피 성을 가진 학생이 있다고 직장동료 A양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와 동료 B군이 곧 "피천득 몰라요?" 라는 대답을 했지요. 그리고 몇마디 더 의미 없는 이야기가 오가다가 마찬가지로 같이 일하는 C양이 "근데 피천득 중국사람 아니에요?" 라고 했습죠... C양을 쳐다보는 B군의 시선이 마치 '이런 끝간데 없이 무식한 분 같으니...' 라고 말하는 듯 해서 '아니 그건 루쉰...' 이라고 얘기도 못꺼내고 그만 웃음이 빵터지고 말았는데; 이어지는 C군의 말이... "피천득 모릅니까? 그 시? 나 하늘로 돌아가리?" 아... 그, 그건... "그건 천상병... 시인이고 피천득 씨는 ..." 뭐; 아무말 없이 듣고 있던 A양과 D군이 "모를땐 가만있는게 최고라더니..." 라고 자기들끼리 주억거리는 동안 그렇게 모두들 즐겁게 퇴근을 했다는 일화가 있네요; 일주일도 안된 일입니다...
  • deulpul 2014/11/16 20:26 #

    크학- 이것이야말로 웃픈 이야기네요.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인연'이 교과서에서 빠지고 그래서 낯설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중국 사람은 너무했네요. 사실 더 안타까운 일은, 피천득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보다 그가 쓴 산호, 진주처럼 영롱한 글들을 접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 아침 정동 거리에는 뺨이 붉은 어린아이들과 하얀 칼라를 한 여학생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우러 간다"라든가 "봄이 오면 비둘기 목털에 윤이 나고 봄이 오면 젊은이는 가난을 잊어버린다. 그러기에 스물여섯 된 무급조교는 약혼을 한다" 같은 글들이란, 글쎄요, 좋은 음식으로 한 상 차려둔 부페라고나 할까요. 음식이라면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이번 연말에 <인연> 한 권씩 선물하시면 어떨까요? 아픈 데 찌른다고 오해하려나...
  • mooyoung 2014/11/17 04:23 # 답글

    못 먹는 감 찔러보는 정서는 어찌 이해하면 좋을지^^? ㅎㅎ
  • deulpul 2014/11/17 22:16 #

    '못 먹는다'를 믿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실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는 농담이고 놀부 심보라고 해야겠죠, 하하.
  • 편도 2014/11/19 22:16 # 삭제 답글

    뭐랄까, 지난 해 봄 혹독하게 단 포도 놀이를 한 저로서는 위로와 격려가 되는 글이네요^^
    지난 인연에 추억과 희망을 덧씌우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 봐요. 살다 보면 또다시 살아진다는 말씀에 많이 공감합니다. 포도나무 주변을 용감히 떠나고 나니 향이 좋은 들판을 만나게 되더군요.
  • deulpul 2014/11/21 07:07 #

    살면서 그런 일 몇 번 거치는 것은 글자 그대로 통과의례 같습니다. 향이 좋은 들판이 끝나는 즈음에서 아주 잘 익은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키 낮은 포도나무를 마주치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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