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의 정의 말씀言 말씀語 (Words)

몇 개월 만에 세상은 다시 하얗게 바뀌었다. 녹색 칠을 했던 자리는 모조리 흰색으로 덧칠이 되었다. 현실인 줄 알았던 녹색은 꿈으로 돌아갔고, 꿈 같던 흰색이 다시 현실이 되었다.

아는 분과 이메일을 나누다, '첫눈의 정의(定義)'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첫눈이란 그해 겨울에 처음 오는 눈이다. 이것은 사전적 정의이다. 그런데 겨울이 시작될 무렵 처음 오는 눈이란, 대개 매우 가볍게 잠깐 내리다 만다. 본 사람이 있고, 못 본 사람이 있다. 지역에 따라 편차도 크다. 성북동에서는 볼 수 있지만 여의도에서는 볼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럼 기상청은 첫눈을 어떻게 결정하여 알려주는 것일까.

기상청이 첫눈을 결정하는 방식은 뜻밖에 간단하다.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이다. 아무런 계측 기구도 쓰지 않는다. 잠깐 날리는 눈을 기구로 재기도 어려울 것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관측자가 육안으로 눈 현상을 관측했을 때' 공식적으로 눈이 온 것으로 본다고 한다. 눈 현상이란 함박눈뿐만 아니라 진눈깨비, 싸락눈을 다 포함한다. 첫눈은 비에 섞인 진눈깨비 형태로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첫눈을 비롯한 기상 소식은 지역 단위로 결정하고 통보한다. 각 지역 기상청이나 기상대에서 '육안으로 눈 현상을 관측'하는 것이다. 따라서 첫눈 온 날짜는 지역에 따라 다 다르다. (기상청은 비, 눈, 안개 같은 기상 현상과 구름, 가시거리 등을 눈으로 관측한다.)

서울의 경우는 서울관측소가 있는 종로구 송월동이 기준 지역이다. 원래 기상청이 있던 자리인데, 본청은 지금 대방동으로 옮겨갔고 관측소만 남았다. 서울에 첫눈이 왔다는 것은, 이 송월동 관측소에서 당직 근무를 하는 직원이 그해 겨울 처음으로 눈을 목격했다는 말이 되겠다.

이것은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의 한 형태라고 하겠다. '처음 오는 눈'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지역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첫눈은 특정 지역(각 관측소)에서 특정인(관측자)이 특정한 방법(목측)에 따라 결정하는 것으로 조작적 정의를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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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연인들이 첫눈 오는 날 어디어디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잘 했다고 한다. 매일 보는 연인이 아니라 어떤 사연으로 헤어져야 하는 연인이 주로 그랬기 때문에, '첫눈 오는 날 만난다'라는 것은 그 말만으로도 애틋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는 쉽지 않다. 둘 중 한 사람이 여름, 가을을 지나면서 변심하였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두 사람이 첫눈의 정의(정확히 말하자면 '첫눈 온 날'의 정의)를 다르게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첫눈'은 안 된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기상청에서 말한 첫눈'도 안 된다. 사후 보고이기 때문이다. 밤 12시 경에 내렸다면, 이게 전날에 속하는 것인지 다음날에 속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헤어진 연인 만나기 정말 힘들다.

사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이 약속의 핵심이자 미덕이기도 하다. 연인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인연이 되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 연인들이 꼭 만나고 싶다면, 그들 역시 첫눈에 대한 조작적 정의가 필요하다. '기상청이 서울에 첫눈 왔다고 한 다음날'이라든지 '눈이 와서 처음으로 적설량 1cm 이상인 날'이라든지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나무 주변에 처음으로 눈이 날린 날'이라고 하든지.

물론 요즘은 그렇게 머리 싸맬 필요 없다. 오래 전부터 약속을 하여 둘 필요도 없다. 당일에 휴대전화 한 통화 하거나, 문자나 카톡 하나 넣으면 된다. 이제 연인들 간에 첫눈 온 날의 조작적 정의는 '그(녀)로부터 첫눈 왔으니 만나자는 문자가 오는 날'이 되었다. 의미가 분명하여 과학적이 된 대신, 눈발 날리는 나무 밑에서 그가 과연 올까 하며 기다리던 설렘과 두근거림은 눈 녹듯 사라졌다.


※ 이미지: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한 장면(일부 수정). 첫눈과는 직접 관련 없으나, 눈 오는 날 옛 연인이 다시 만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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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김승훈 2014/11/18 21:18 # 삭제 답글

    일부 수정은 직접 하신건가요... 전 아직도 포토샵으로 합성 같은건 엄두도 못내겠던데;
    박대기 기자의 표정이 김대기씨 만큼이나 적절하네요;
  • deulpul 2014/11/19 18:59 #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발님이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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