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의 애송시 때時 일事 (Issues)

<중앙일보>에는 일주일에 두 번 '나를 흔든 시 한 줄'이라는 글이 실린다. 사회 각계 인사가 등장하여,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시(詩)에 얽힌 짤막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가장 최근인 12월10일자에서 가수 말로는 최승자의 시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가 가져다 준 충격과 각성에 대해 말한다. 산악인 엄홍길은 11월12일자 글에서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해 산악 사고로 먼저 간 동료 산악인들을 추억한다.

9월26일 이 란에 글을 쓴 사람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다. 그녀가 꺼내든 시는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시와 얽힌 이야기를 하는데, 노소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시와 얽힌 이야기를 먼저 한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종종 읊으시던 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참 이상한 시도 다 있다 하면서도 그 비통한 어조가 가슴에 남았다. 나중에 이 시가 일제 강점기에 홍사용이라는 시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와는 별 상관없는 시였다.


그래서 나는 노태우가 애송하던 시가 '나는 왕이로소이다'였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시간이 없고 이 글은 너무 길어요! → 건너뛰기 (그 사이에 있는 것: 노태우 등 신군부의 죄상 + 당시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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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12·12. 이 날은 한국에게 매우 불행한 날이기도 하지만, 특히 한국군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날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79년 12월12일 밤, 전두환과 노태우가 이끄는 역적 군인들, 이른바 신군부는 박정희 사후 권력 공백기를 틈타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적과 대치하고 있던 군대를 빼돌려 서울로 진입하며 무력으로 권력을 차지했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와 더불어,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날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반란군 일당은 쿠데타 이틀 뒤인 12월14일 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원 안이 노태우고 그 오른쪽이 전두환이다. (프레지가 보이지 않을 경우 프레지닷컴에서.)





전두환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인 노태우는 쿠데타 당시 제9사단 사단장이었다. 전두환 등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키면서, 사단 소속 특전대 부대원들을 동원해 청와대, 총리실 등을 장악했다.

노태우 등이 자행한 반란죄의 죄상의 일부를 대법원 판결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아래도 동일).


원심은 1979. 12. 12. 20:30경 육군본부에 집결한 위 윤성민 차장, 김용휴 국방부차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육군의 정식지휘계통에서는 같은 날 21:00경 제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부 피고인들에게 정승화 총장의 석방을 명령하였으나 피고인들이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윤성민 차장은 휘하의 각 부대에게 그의 육성지시 없이는 출동을 하지 아니하도록 명하고 그 무렵 제1공수여단이 출동하였다는 첩보를 접한 뒤 육군본부를 방어하기 위하여 제9공수여단의 출동을 명령하는 등 피고인들을 진압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사실,

이에 대응하여 피고인들은 계엄지역에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아니함은 물론 명시적인 병력출동 금지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지휘계통을 공격하기로 하는 한편, 그에 앞서 피고인 유학성이 정승화 총장의 체포에 대하여 항의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회유하고 윤성민 차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육군본부 측의 병력동원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 피고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할 가능성이 있는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한 사실,

그러던 중 윤성민 차장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건의에 따라 피고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에 대하여 출동준비명령을 내렸으며,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의 장교 및 사병을 인솔하여 제30경비단에 집결한 피고인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한 사실,

한편 피고인 장세동은 제30경비단 소속 전차에 포탄을 장전하는 등 대항체제를 구축한 사실, 이어서 피고인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관 사무실에서 육군정식지휘계통에 대한 선제공격을 결의하고, 이에 따라 1979. 12. 12. 23:00경부터 위 피고인 및 피고인 노태우, 황영시 등이 지시하여 동원된 병력이 같은 날 24:00경부터 1979. 12. 13. 06:20경까지 사이에 육군본부 건물, 국방부 청사, 중앙청, 경복궁, 효창운동장, 고려대학교 등을 점령하는 한편,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 및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각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 있던 윤성민 차장 및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육군소장 하소곤, 합동참모본부장 육군중장 문홍구 등 육군본부 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한 사실 등을 인정하였다.


12.12 쿠데타와 5.17 사태 등을 심판한 이 사건에 명시된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등이다.

노태우는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이 되었고, 다음해(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피로 짓밟고 권력을 다진 뒤 민주정의당 권력을 탄생시켰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뒤 당과 정부를 오가며 5공화국 독재 정부의 최고직을 누비다가, 1988년에 전두환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는 12.12 쿠데타 이래 언제나 반란 군인들의 2인자였다. 전두환이 워낙 악역 스타일로 얼굴마담 역할을 해서, 그 검은 빛에 가려 잘 안 보일 뿐, 노태우도 뒤지지 않는다. 쿠데타에서 전두환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피고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그들을 지지하는 피고인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등을 역시 그들을 지지하는 피고인 장세동의 사무실인 제30경비단 단장실에 집결시켜 유사시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피고인 노태우와 전두환의 연락에 따라 피고인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등이 1979. 12. 12. 18:00경부터 같은 날 19:00경 사이에 제30경비단 단장실에 집결하여 지휘부로 기능하고, 한편 피고인 전두환은 피고인 허화평으로 하여금 당시의 보안사령부 정보처장 권정달, 보안처장 정도영 등과 함께 보안사 상황실을 거점으로 하여 각급부대 지휘관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대동향과 병력이동상황을 파악하여 수시로 위 지휘부에 보고하게 한 사실 (중략)

피고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는 등의 이 사건 반란을 모의한 뒤, 피고인 허삼수, 이학봉은 1979. 12. 9.경 피고인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 총장의 구체적인 체포계획을 세우면서 그 계획에 따른 체포행위가 위법한 것임을 알면서도 피고인 전두환과 이 사건 반란을 모의하였고 (중략)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하여 피고인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은 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 총장의 체포, 그 후의 대통령에 대한 강압·병력동원 등의 반란행위에 대하여 개별적 또는 순차적으로 모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적어도 정승화 총장의 체포를 알고 난 뒤 이를 용인하고 지지하면서 집단을 이루어 병력을 동원하거나 이에 가담한 이상 공모하여 반란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고 (하략)


광주 학살을 초래한 1980년 5.17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위 피고인들이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와 1980. 5. 초순경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고 내란을 모의하면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를 계기로 계엄군을 동원하여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등을 강압하는 방법으로 반란하기로 공모하여, 1980. 5. 17. 저녁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무회의장에 소총 등으로 무장한 수경사의 병력을 배치하고, 같은 달 18. 01:45경부터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을 국회의사당에 배치·점거하여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같은 달 20.경 일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저지하게 하는 등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사실 (중략)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에 대한 이 사건 반란의 공소사실 중, 위 피고인들이 공모하여, 1980. 5. 17.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전후하여 무장한 계엄군을 동원하여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체포하고, 1980. 5. 17. 저녁 무렵부터 5. 18. 새벽까지 전국의 주요 보안목표에 무장한 계엄군을 배치하고, 1980. 5. 18. 07:20경 피고인 노태우가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의 가택에 소총 등을 휴대한 수경사의 헌병들을 배치하여 포위, 봉쇄하고, 광주에서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5. 18.경부터 무장한 계엄군을 투입·증파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광주시 외곽을 봉쇄한 후 광주재진입작전을 실시하여 도청 등을 점령한 사실 (중략)

피고인 노태우가 피고인 전두환과 공모하여, 1980. 5. 17. 저녁 국무회의장에 휘하의 병력을 대통령, 대통령 경호실장 또는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의 승인 없이 배치한 행위에 대하여, 이는 군사반란죄를 구성하고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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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은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이 일으킨 쿠데타 때문에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제삿날이기도 하다.

이 날 국립묘지에서는 쿠데타 당시 특전사 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중령의 추도식이 열린다. 육사 25기인 김 중령(당시는 소령)은 권력욕에 눈이 뒤집힌 선배들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 할 때, 이에 맞서 싸우다 피살됐다. 국방부 초병 정선엽 병장 역시 야밤에 들이닥친 신군부 병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날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에는 반란군쪽 병사도 있다. 헌병대 소속으로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차출되었다가 사살된 박윤관 상병이다. 박 상병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극상을 일으킨 그의 상관들과는 달리, 상관의 명령을 따르다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가족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오랑 중령을 추도하기 위해 국립묘지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관례적으로 정선엽 병장과 박윤관 상병 묘소를 함께 돌아본다. 진영에 상관없이, 모두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의 정치적 야욕에 희생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12년 그들이 박 상병 묘소를 찾았을 때, 묘소에는 그의 형이 홀로 와서 술을 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 날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반란군에 대항해 싸우다 신군부에 의해 수족이 잘리고 군문에서 밀려난 군인들과 그 가족에게도 전-노 일당의 쿠데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쿠데타 직후 보안사에 체포되어 두 달간 감금된 채 조사를 받았다.


신군부 진압에 실패한 장(태완) 전 의원은 곧바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돼 서빙고 분실에서 두 달간의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30년간 입었던 군복을 강제로 벗어야 했고 2년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TV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 마시다가 세상을 버리고, 서울대에 다니던 외아들은 행방불명됐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역시 반란군에 대항하다가 총상을 입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980년 초에 강제 예편된 뒤, 줄기차게 12.12 쿠데타의 부당성과 명예 회복을 주장하다가 1989년 3월 야산에서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었다.


(정병주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체 발견 현장에 달려가 유족들과 함께 수습에 나선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은 “내게 ‘오래오래 살아 역사의 증인으로 12ㆍ12쿠데타를 증언하고 명예를 회복하자’는 긴 편지를 보내온 일이 있어 자살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태완 장군은 정병주 장군이 사망하기 전에 보내온 편지를 《시사저널》에 공개했다. “오늘 장장군댁을 방문한 후 보다 튼튼하게 살아보겠다고 보신탕집을 찾아 두꺼비(소주) 두마리를 잡아먹고 편지를 씁니다” 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시종 역사의 증인임을 명심하고 건강을 지키자는 당부와,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 수집 진척 정도, 애로 사항 등을 담고 있다. 특히 진상 규명 노력과 관련해서는 “목적하는 바가 성사될 때까지는 보안에 유의하고 자료 수집에 열중합시다. 이 편지는 보시고 소각하십시오”라고 끝을 맺어 상당한 위협 의식을 느끼며 12ㆍ12진상 규명에 적극 나섰음을 암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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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의 주역이자 반란군 수괴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7년과 5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이 기간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에게 더할 나위 없이 복되고 풍성한 시기였을 것이다. 최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돈을 긁어 모았다.

두 사람을 비롯한 신군부를 처벌하기 위해 열린 재판의 범죄 목록에는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이란 죄목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뇌물를 받은 죄를 말한다. 재판 결과 전두환은 2천205억원, 노태우는 2천628억원을 토해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노태우는 재임 기간 중에 30개 기업으로부터 이 돈을 거둬 들였다. 이것이 20여 년 전의 금액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부당하게 차지한 권력과 부정하게 모은 돈으로 그들의 식솔이 어떻게 호의호식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없는 돈에 빚을 내가며 대학 공부를 시켰으나 애꿎게 숨져간 박윤관 상병, 반란군의 총탄에 자신은 절명하고 아내는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린 김오랑 소령, 쿠데타의 진상을 알리고자 애쓰다 의문의 죽음으로 돌아온 정병주 소장, 그리고 신군부의 야욕을 규탄하다 숨진 광주 시민 수백 명과 그들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 같은 것은 겪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노태우가 홍사용의 시를 읊던 일을 추억하는 노소영은, 대통령 아버지의 권력이 최정점에 달했던 1988년 9월13일에 청와대 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선경그룹(현 SK그룹) 최종현 회장의 장남 최태원이었다.

이후 노소영은 미국에 거액의 계좌를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되어, 1994년 8월과 1995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았다.




1994년 조사에서 노소영은 미국에 있는 돈이 결혼 축의금이라고 주장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녀 소영씨(33)와 사위 최태원씨(35.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장남) 부부의 외화밀반출 의혹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형사5부(윤석정 부장검사)는 24일 이들 부부를 소환,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이날 오후 2시 최씨를, 오후 5시 노씨를 차례로 불러 90년 미국 은행에 예치한 19만2천달러의 출처를 집중 조사했으나 혐의를 밝혀내지 못한 채 밤 11시쯤 모두 귀가토록 했다. 이들 부부는 "문제의 돈은 미국의 친척들이 결혼 축하금조로 준 14만달러와 이주 정착금 등이다"라고 혐의를 부인했다.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한국 검찰은 전 대통령의 딸이 내세우는 이런 거짓말을 인정해주고 무혐의 처분을 했다. 그러나 같은 사건으로 노소영 부부를 화폐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미국 검찰은, 이 돈이 스위스 비밀계좌에서 흘러간 것으로 보았다. 노소영은 미국 법원에 출석하여 재판을 받고 유죄가 인정되어 돈을 압수당했으며, 집행유예 1년 처벌을 받았다.


(미국) 검사 = 재판장, 이의 있습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우선 문제의 돈은 스위스 은행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노씨 자동차 안에서 발견된 스위스 은행의 현찰 포장용 종이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현금의 출처는 한국 정계와 관련된 인물들입니다. 피고인들은 이 돈이 정상적인 통로를 거치지 않고 어떻게 미국으로 들어왔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못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대통령 아버지가 정관계 인물들로부터 뇌물로 받아서 스위스 은행에 넣어두었던 거액의 돈을 딸이 넘겨받았다는 것이다.

노소영은 1996년에는 아버지가 대통령 재직 때인 1992년에 무기 중개상이 인사 청탁을 위해 건넨 3천200만원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반지 세트를 받은 혐의로 다시 검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이 때에도 노소영은 처음에는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또 결혼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소영씨도 애당초 다이아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발뺌하다가 "결혼 선물인 줄 알고 받았다. 인사 청탁용임을 알고 즉시 돌려줬다"고 검찰 조사에서 밝히는 등 주장에 일관성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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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반란죄나 뇌물죄의 가족 연좌제 같은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란 수괴, 뇌물 사범의 식솔들이 그런 범행의 결과로 얻게 된 안락함을 누리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시간이 꽤 흘렀다고 해서 이렇게 서정적인 언어를 동원해 반란 수괴 아버지를 추억해도 되는지 의문을 갖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한국과 한국인이 겪은 고통이 너무나 크지 않은가.

전두환과 노태우가 권력자로 군림하던 80~90년대는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독재에 저항하던 많은 젊은이가 시위하고 분신하고 고문당하고 군대로 끌려가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공장에서 노동하던 젊은이들 역시 최소한의 생존권과 헌법적 기본권을 박탈당한 채 기계처럼 소모되었다. 광주에서는 젊은 남녀가 신군부가 동원한 공수부대의 곤봉에 맞아 머리통이 깨져나가고 개처럼 도살되었다.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노소영에게는 이런 고통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대에는 재벌이나 고관대작 자녀들로 이루어진 명우회라는 고급 사교 모임이 있었다. 노소영과 그의 오빠인 노재헌은 이 모임의 회원이었으며, 노재헌이 또다른 재벌인 동방유량(현 신동방그룹) 회장 딸을 만난 것도 이 모임에서였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고통과 아비규환의 대학은 그들의 세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홍사용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주인공은 실제로 왕이 아니다. 그는 눈물의 왕이며, 세상의 모든 고통을 눈물로 구현하고 보듬는 왕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읊던 노태우. 그는 실제로 왕이 되었다. 동료들과 모반을 일으킨 뒤 8년 만에 왕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므로 왕은 없다. 그러나 그가 누린 절대 권력, 그의 식솔들에게 넘겨준 부와 안락함을 생각하면 왕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는 말은 아니다.

노소영은 이렇게 썼다.


눈물의 왕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왕으로 태어났으나 세상에서 홀대를 받고 있는 한국민의 한과 설움이다. 우리는 진정한 슬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우리는 눈물의 왕이 되기 싫다. 한과 설움을 갖기 싫고, 진정한 슬픔 가운데 하나 되기도 싫다. 우리도 당신들처럼 기쁨과 풍성함의 왕이 되고 싶다. 우리가 왜 눈물의 왕으로 살았어야 하는지 진정 모른단 말인가. 역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말이다.


※ 이미지: 12.12 쿠데타 기념 사진, 전두환-노태우 신문기사들, 박윤관 관련 사진, 노소영 출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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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누구의왕인가 2014/12/26 00:40 # 삭제 답글

    어떤삶이 맞는걸까요?
    정의의맞서다가 죽거나 다치고 가족들 모두 고통 받는 삶과 더럽고 치사하게 안락하게 자손대대로 사는것
    몇살되지 않앗지만 가끔씩 정의란 멀까 생각하게 됩니다
  • deulpul 2014/12/26 12:07 #

    물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치적인 의미든 일상적인 의미든, 진보는 고민에서 시작되고 고민은 의문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말씀하신 것은 게임 이론에서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직접적인 적용은 아닙니다). 1) 모든 사람이 룰을 잘 지키고 잘못을 서로 경계하면서 정의롭게 살면, 모든 사람이 작지만 일정한 정도의 이익을 보며 살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어떤 사람이 불의한 방법으로 남들보다 훨씬 큰 이익을 얻기 시작합니다. 3) 그럼 사람들이 그런 방법을 앞다투어 추구하게 되고 4) 이 경우 공동체를 공평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룰이 무너지므로 강자가 이익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며 5) 결과적으로 절대다수의 사람이 1)보다 훨씬 적은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보며 살게 됩니다. 현실을 보자면 정의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그놈의 정의의 효용이란 대체 있기나 한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이러한 고민의 해소는 결국 2)와 같은 일을 경계하는 것,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이 손해를 보게 만드는 합의 구조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딱히 대답을 바라신 말씀은 아님을 알지만, 댓글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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