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요 섞일雜 끓일湯 (Others)

먼저 자수를 해야겠다. 나에게는 070으로 시작하는 한국 인터넷 전화가 있다. 인터넷 망을 쓰는 전화이므로 국가에 상관없이 연결되지만, 한국 인터넷 폰을 해외에서 사용하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분이 해외에서 사용중인 것이 현실이다.

인터넷 망을 쓰는 장치에 국가 장벽을 세운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공식 허용된 사용 방법이 아니긴 하니, 쓰긴 쓰면서도 좀 찜찜하다. 사실 나보다는 한국에서 전화하시는 분들이 더 많이 쓴다. 어머니가 그 중 하나인데, 길고 긴 국제전화 번호 사용을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어머니에게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이 전화로 모르는 사람이 가끔 전화를 한다. 잘못 걸린 전화다. 한국에서 잘못 건 전화가 미국으로 온다. 이런 전화를 받고 나면,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갑자기 불쑥 디밀어진 한국의 일상 같은 것이 마음에 한참이나 퍼져 나간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다.



12월6일에 받은 전화 기록이다. 통화 시간은 9초, 잘못 온 전화다. 기록된 시간은 한국 시간이다. 한국은 오후 4시 경, 여기로는 새벽이다.

잠이 깨서 전화를 받았더니 30대 초쯤으로 짐작되는 여자다.

나: 여보세요.
그녀: 여보세요?
나: 아...... 어디신가요?

전화가 뚝 끊어졌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안하고 다짜고짜 전화를 끊어버렸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게 아니라, 울컥 분노를 일으켰다.

요즘은 발신자 번호가 다 찍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무례하게 전화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전화해서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그러다가는 다시 잠들기가 더 힘들 것 같아서 참았다.

한국은 오후 시간이었으니, 잠을 깨운 것은 그 여자 탓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저 싸가지.

지난 주말에는 이런 전화를 받았다.



통화 시간은 15초, 역시 잘못 온 전화다. 이번에는 30대 후반~40대 초반 정도의 남자다. 오전 3시58분, 시간이 암시하듯 아주 약간 맛이 갔다.

나: 여보세요.
그: 혹시 지금 나오실 수 있어요?
나: 네? ......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그: 아, 그래요.

전화가 뚝 끊어졌다.

와, 정말... 이 상황은 아, 그래요라고 대답할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말은 손님 술값 8만원 나왔습니다라든가 네놈의 바지 지퍼가 열렸어요라든가 하는 말에 대한 대꾸지, 새벽 4시에 남의 집에 전화를 잘못 건 놈이 할 말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이번에도 다시 전화해서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그냥 참았다. 여기는 낮 시간이어서 나는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저 싸가지.

미안한 일을 했으면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그런데 안 한다. 미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미안한 줄 모르는 것인지, 미안하긴 한데 그런 말을 하기를 싫어하는 것인지, 그런 말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앞에서 쓴 '사과할 상황인 줄 모르는 윤리적 문맹'에서 인용한 신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사과할 줄 모른다. '미안하다'는 발음을 잊고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로버트 풀검이 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서, 미안한 일을 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어야 할' 일 중 7번째 원칙이다. 아니, 이런 일은 엄마 품 안에서부터 배우는 것 아닌가.

미안하다는 발음을 잊어버려서인가. 자, 다같이 복습 한번 해봅시다...

미안하다[mɪ ɑn hɑ dɑ] Mie-Ahn-Hah-Dah
미안합니다[mɪ ɑn hɑm nɪ dɑ] Mie-Ahn-Haam-Nie-Da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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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isanghee 2014/12/15 10:34 # 삭제 답글

    저도 미국에서 070 쓰고 있습니다.
    한 2년전 쯤에 한 50대 여자분으로 보이는 분이 제 XXX) XXX-7890 번호로
    "XXX) XXX-7891이죠?거기 신당동이죠?"라고 하시길래
    아닙니다. 여기는 미국이고 번호 잘못 누르셨습니다. 했더니
    "한끗차이니까 바로 옆집이겠네요? 알려주시면 안되나요?" 하시길래 살짝 멍해져서 몇초간 말을 못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서, 쯧쯧쯧" 이러고 끊으셨었죠.
    와이프도 농담하냐고 안 믿어주는 이야기입니다. 실화입니다.
  • deulpul 2014/12/15 11:31 #

    유머가 뛰어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진지했다는 게 함정이군요. 전화번호를 아파트 호수와 같은 양상인 것으로 간주하시다니, 융통성이 넘치다못해 안드로메다로 뻗칠 기세입니다, 정말.
  • sunho 2014/12/15 18:49 # 답글

    예전에 친구와 지하철역을 지나가던 중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께서 아이고 죄송해요 좀 지나갈게요, 하는 식으로 이야기 하신적이 있었어요. 동시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와 엄청나다! 하며 저렇게 나이 먹자고 했는데, 아직도 드물지만 부딪히고 미안합니다 하시거나 밀치지 않고 저기요 하는 사람들 보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런 걸로 기분 좋은건 결국 되게 슬픈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deulpul 2014/12/15 20:24 #

    맞습니다. 그런 일들이 인상깊게 생각되는 것은 그만큼 드물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요. 그래도 당장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지하철에서 겪은 즐거운 경험들이 있습니다. 아마 유쾌-불쾌한 경험을 횟수를 기준으로 하여 결산을 내면 손해인 결과가 나오겠지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 횟수는 적어도 울림이 커서, 능히 작은 희망을 갖게 됩니다.
  • 편도 2014/12/16 20:16 # 답글

    친절한 발음표기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라고 했을 때 "죄송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저도 거의 못 만났어요. 전화기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나 봅니다.
  • deulpul 2014/12/17 04:50 #

    사소한 일이라서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일상은 그런 사소한 일들로 구축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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