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 바이러스 섞일雜 끓일湯 (Others)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변화는 잘 체감되지 않는다. 한국에 있는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은 굉장히 빨리 변하는 나라다. 적어도 외양이나 사회 인프라에서는 그렇다. 수십 년간 바쁘게 달려온 한국은 여전히 속도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한국에 가면 얼마간은 바보가 된다. 내가 알던 세상과는 다르게 바뀐 새 세상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 중 하나는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사람들이다. 한국에 가면 공항에 내리는 즉시 무뚝뚝해지기를 실천해야 한다. 표정은 무엇엔가 화가 난 것처럼 엄하게 짓고, 언행은 적당히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되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신해야 사람들과 잘 섞일 수 있다. 웃고 다니면 미친놈이나 치한 취급을 당하고, 친절하면 쓸데없이 오지랍이 넓다고 손가락질을 받거나 역시 치한 취급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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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한국에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다. 수도권 중소도시에 있는 아는 분의 집에 갔다가, 아침 일찍 조용히 나왔다. 지하철 역까지 거리가 꽤 됐는데, 일요일 오전 한국의 신도시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서 천천히 걸었다.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표를 사야 하는데, 판매기를 어떻게 작동시켜야 하는지 영 아리송하다. 설명문을 이렇게 읽고 저렇게 읽고, 한글로도 읽고 영문으로도 읽었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설명이 복잡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술이 안 깨서 그런 것인지 갈피가 안 잡혔다. 아마도 낯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경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쉽고 간단한 지시라도, 그런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에소테릭한 주문(呪文)이 되는 것이다.

에이, 귀찮으니 그냥 역무원에게 표를 사자. 창구로 갔더니, 사람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플래스틱 판으로 막혀 있다. 임시로 막혀 있는 게 아니라, 단단히 고정이 돼 있다.

다시 판매기 앞으로 돌아왔다. 표를 사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일단 시작한 다음 헤매면 민폐가 된다. 눈치를 보며 계속 고민을 하는 중에,

"저, 도와드릴까요?"

뒤를 돌아보니, 초등학교 5, 6학년쯤 되는 남자 아이가 어른스럽게 서 있다. 친구들과 함께 어디를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두 번 놀랐다. 어린 아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그 말이 정확히 영어식 표현인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영어식 표현이라는 것이 별다른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다는 사실이 귀에 콱 박혔다.

이 아이는 내가 표 판매기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행색으로 보아, 일요일에 어디 외출하는 외국인 노동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인육을 발라먹는 살인마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다니. 그냥 자기 표를 산 뒤 동무들과 어울려 휙 가버렸어도 그만인 일을.

나는 그 날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 날뿐 아니라, 그 뒤에도 가끔 그 장면을 회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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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나는 공항에서 갈아 입은 무뚝뚝하기의 옷을 잠시 벗고, 그 아이에게 배운 놀라운 말을 써 보았다. 역시 지하철 역에서였다. 노선이 바뀌는 환승역이었는데, 출퇴근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인파는 도착 열차에서 물밀듯 쏟아져 나와 다음 노선으로 도도히 흘러갔다.

저만치 앞쪽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는 청년이 있었다. 사람의 발걸음은 휠체어보다 빠르다. 사람들은 그를 비껴서 신속하게 흘러갔다. 베르누이의 정리에 나오는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환승 통로는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지고 있었다. 높지는 않았지만,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는 태산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뒤에서 보고 가자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렇게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면 충분히 경험이 있을 거야. 걱정 안 해도 된다. 아니, 그런데 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짤막한 구간이라서 다른 장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에스컬레이터 디딤판은 휠체어가 올라서기에는 너무 좁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청년은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했고, 나도 거의 비슷하게 도착했다. 청년은 잠깐 머뭇머뭇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베르누이의 기체처럼 그 옆을 비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아, 도와드릴까요?"

며칠 전에 그 아이가 내게 한 말이다. 잠깐이지만 몇 가지 걱정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청년이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네가 무슨 슈바이처냐, 아니면 마더 테레사냐. 남들은 다 그냥 지나가는데 왜 나서고 난리야. 청년이 정색하고 거절하면 아주 머쓱해질 텐데. 아, 괜히 말했나. 역시 그냥 계속 무뚝뚝했어야 했어.

"네! 여기를 조금만 잡아 주세요. 잠시면 됩니다."

청년은 당당하게 말했다. 도움을 받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자신이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온 뒤, 기체처럼 빠져나가는 나에게 그가 감사의 말을 던졌다. 나는 속으로, 선의를 스스럼없이 받아줘서 고맙다고 그에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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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바이러스란 말이 있다. 기분 좋은 느낌, 행복함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가 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인 듯하다. 행복은 몰라도 친절함은 그런 것 같다.

일요일 아침, 지하철 역에서 만난 소년의 친절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마 한국에는 그 아이와 같은 어린이가 아주 많을지도 모른다. 이런 게 변화다. 길이 새로 나고 빌딩이 올라가는 변화보다 훨씬 중요한 변화다. 한국에 몸담고 사는 사람들은 알아챌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보면 생생하게 체감된다.

그 아이에게 남을 배려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알게 가르친 그 아이의 부모와 선생님께 뒤늦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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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Ellery 2014/12/17 09:47 # 삭제 답글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저도 처음 미국에 왔을때 영어도 못하는 외국인이라 걱정많이 했었는데 마주치는 사람들이 가볍게 인사해주고, 상점에서도 직원들이 말걸어줄때 사소하지만 정말 힘이 되더군요. 한국도 이런 사소한 즐거움이 많아 졌으면 합니다~
  • deulpul 2014/12/17 15:22 #

    사소한 즐거움, 정말 딱 일상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개성들이 섞여서 돌아가는데 서로 부딪쳐서 무리가 생기지 않도록 완충을 해준다고 할까요. 어떤 분들은 가식 같아서 싫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윤활유로 가는 자동차 있나요. 연료는 따로 있고, 윤활유는 기계가 잘 돌아가게만 해주면 되는 것이죠. 어느 외국어든 처음 배울 때 흔히 인사로부터 시작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겝니다. (꿈보다 해몽이다...)
  • 아인하르트 2014/12/18 22:27 # 답글

    전 보통 길 가다가 누군가와 부딫이면 가볍게 "미안합니다" 라며 사과하는 편인데, 예전에 한국에서 가족과 같이 길 가다가 그 말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소매치기같이 더 수상하게 보인다면서.

    독일에 와서 독일사람들이 가장 무뚝뚝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다거나 계단, 복도에서 만나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가볍게 인사 하더군요. 뭐 그래도 선 긋는 건 확실하다만. 오히려 그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친하거나 안면이 있으면 '우리가 남이가"라며 하는 것보단 확실히. 알아도 당신 싫거든요? 라는 말 나오는 사람도 많고.)
  • deulpul 2014/12/19 13:30 #

    아무래도 서양이 한국보다는 그런 분위기가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쪽도 지역에 따라 꽤 차이가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대도시 같은 곳에서는 '미국 남부식 친절함'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렵고 한국이나 서울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더라도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분위기 같은 것이 좀 다른 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남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줄기차게 가르치는 교육도 한 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 오롱 2014/12/20 13:53 # 삭제 답글

    도와드릴까요가 영어식 표현이라고 하셔서 여쭤봅니다. 국어식 표현은 어떤 것일까요? 문득 저 상황에서 저라도 도와드릴까요? 하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궁금합니다.
  • deulpul 2014/12/20 14:28 #

    글쎄요... 본문에 썼듯 특별히 잘못되거나 나쁜 표현이라고 여기지 않아서, 우리말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말씀 듣고 생각해 보니, 우리는 저런 일반적인 범용(汎用) 표현보다는 좀더 상황에 밀착된 표현들을 써왔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1)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나 2) 길에서 지도를 들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때, 영어식으로는 모두 '도와드릴까요?' 하겠지만, 우리는 1)은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 하고 2)는 '어디 찾으세요?' 하며 접근하는 정도의 차이가 될까요. 가게에서도 미국 점원은 손님에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일반적인 표현을 쓰지만, 우리는 '무엇을 찾으세요?' 하고 시작하지요. 하지만 '제가 도와드릴까요?' 역시 여러 경우에 쓸 수 있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사실 말이야 어떻든,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마음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 오롱 2014/12/22 18:19 # 삭제 답글

    답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런 마음이 더 소중한 것이야 두말할 것 없지요. 제가 궁금증이 지나쳐 그것에 관해 잘 써주셨다는 말씀을 잊었네요. 실례했습니다. 저도 동감하고 답변 덕분에 마침 궁금증도 풀었습니다. 상황에 더 밀착한 표현을 쓴다는 말씀이 과연 적절해 보입니다. 뭘 드실래요? 뭘 찾으세요? 같은 말을 영어로 곧장 옮기면 확실히 어색하다는 생각이드는군요. 감사합니다.
  • deulpul 2014/12/23 23:44 #

    천만에요-. 덕분에 저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적절한 질문을 던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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