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프리카공화국, 2014년 4월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지난 12월24일, 국제 정치 전문 출판물인 <포린 어페어즈>를 발행하는 미국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는 2014년의 국제 이슈를 잘 보여주는 글 14편을 선택하여 '2014년에 꼭 읽어야 하는 14편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여기 선정된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각각의 글은 위 링크를 활용하십시오.) 미국의 시각에서 어떤 국제 이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 미국이 벌이는 지속적인 전쟁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분쟁
  • 중동 역사를 지도로 돌아보기
  • 이란 핵 문제
  • 아프가니스탄 리더쉽
  • '이슬람 국가(IS)'
  • 러시아와 푸틴
  • 이스라엘과 미국 관계
  • 에볼라 감염 사태
  • 중국의 해상 팽창
  • 이슬람 테러리즘과 인질 사태
  • 독일 총리 메르켈
  • 저유가 시대의 세계 경제
  • 미국의 고문 스캔들

14편은 모두 대중매체에 실린 글이다. <뉴요커><더 애틀랜틱>에서 각각 두 편이 나왔고, 나머지는 <버즈피드>, <뉴 리퍼블릭>, <복스>, <바이스 뉴스>, <폴리티코 매거진>, <뉴욕 북리뷰>, <런던 북리뷰>, <뉴욕 타임스 매거진>, <이코노미스트>, <아메리칸 인터레스트> 등에 실린 글이다. <버즈피드>와 <복스>는 온라인 매체다.

그 중에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내전 사태를 다룬 <뉴 리퍼블릭>의 글을 함께 보고자 한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1) 이런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잊고 살 만큼 우리에게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거리가 먼 나라지만, 우리 별의 다른 쪽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2) 종교적 믿음에 뿌리를 둔 집단 증오가 개인의 삶과 국가 사회에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또 한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3) 이렇게 긴 글을 쓰는 매체가 여전히 있고, 그렇게 길게 풀어낼 수밖에 없는 주제가 있으며, 또 그런 글을 읽어내는 독자가 여전히 있고, 그런 글을 기리고 치하하는 시각과 안목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회색 글자로 첨부된 설명과 링크, 중간 제목은 내가 붙인 것이고, 사진과 지도도 따로 찾아 붙였다. 긴 단락은 맥락을 가려 적당한 크기로 나누었다.




지옥이란 말은 부족하다
- 피비린내 속에 해체되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By Graeme Wood

중앙아프리카공화국(CAR, 중아공)의 수도인 방기(Bangui)에는 안정적인 주민 편의 서비스가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쓰레기 대부분은 넝마주이들 손에 의해 처리되며, 그들이 남기고 간 망고 씨앗, 플래스틱 조각, 녹슨 병마개 따위가 더러운 거리에 쌓여 굴러다니다 악취 나는 하수 개천으로 흘러들어간다. 지난 (2013년) 12월부터 적십자사는 이 도시 프랑스 가(街) 주변 황량한 거리에서 세심한 위생 지원 작업을 벌이고 있다.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이 작업은, 현장에 널린 시체나 그 조각들을 수습하는 일이다.

프랑스 가는 이 도시에 거주하는 두 집단의 경계선 역할을 한다. 거리의 시신들은 무슨 이유에선가 자기네 구역을 벗어난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이 거리는 중립 지역으로서, 왕래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양측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이곳에 방치한다. 땅에 묻을 필요가 없고, 거주 지역에서 썩으며 악취를 풍기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거리의 북쪽은 제5구(區)이다. 여기에는 기독교도만이 거주하며, 이슬람교도는 살해되거나 추방을 당한다. 이 나라를 떠나지 않은 이슬람교도 대부분은 이 거리의 바로 남쪽인 제3구에 모여 산다. 이 곳에서 기독교도라는 것은 이곳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이슬람교도인 것과 똑같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인구의 약 15%는 이슬람교도다. 이 나라 54년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이들은 다수인 기독교도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013년에 이 나라는 붕괴했다. 발작처럼 시작된 정치 폭력이 그 출발이었다. 이제는 파벌과 종교에 따라 서로를 도륙하는 소름끼치는 형태로 발전했으며, 그 결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악의 장소 중 하나로 전락했다.

중아공은 텍사스 크기이며, 인구는 보스턴 정도이고, 경제력은 체터누가(테네시 주의 도시)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내전 사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자료는 없다. 지난 12월부터 올 3월까지 계속되고 있는 길거리 살해가 너무 흔해서, 이제는 뉴스도 되지 않는다. 나이지리아 사태(그것도 악화되는 순간)를 제외하면,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는 나라는 없다. 방기는 세계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수도라는 자리를 놓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경쟁하고 있다.


방기에서 벌어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의 충돌 뒤 방치된 시신들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지난달 이곳을 방문하고 나서 "절망적이라는 말도 부족하다"라고 BBC에 말했다. 유엔 주재 미국대사 서맨사 파워도 평화유지군을 최대한 빨리 파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4월 초에 방기를 특별 방문했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유엔의 반응 속도로 볼 때(반어적), 실제 파견은 9월쯤에나 현실화할 듯하다.) 파워는 중아공 사태가 시작될 때부터 관심을 기울여 왔다. 대량 학살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을 지적한 책 <지옥에서 나온 문제(A Problem from Hell)>로 2002년 퓰리처 상을 받은 그녀는, 이 책에 새로운 장으로 실릴 만한 일을 그녀 자신이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든 방기 거리를 하루만 걸어본다면, 파워가 왜 이곳을 걱정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지난해에 벌어졌던 분쟁은 시민들에게 상처를 남겼으며, 지금은 거의 모두가 격렬한 원한에 사로잡혀 있다. 이곳은 복수에 복수가 중첩된 곳이다. 총으로 무장하고 전투로 단련된 아이들이 거리를 누빈다. 휴대전화가 고장났다고 투덜거리는 단순한 대화가, 인파 붐비는 거리를 향해 자동 소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1주일 동안에 배운 게 있다. 총소리가 나면 즉시 멈춰서서 귓등에 손을 대고, 어느 방향에서 총소리가 나는지, 어디로 가야 하고 어디로 가면 안 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문제거리를 찾는다면, 방기는 그 소재를 얼마든지 제공해줄 것이다. 지난 3월24일 나는 사진기자와 함께 차를 타고 보이 레이브로 향했다. 이곳은 방기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인 기독교 민병대 '안티-발라카'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는 지역이다. 안티-발라카라는 이름은 AK-47의 총탄과 마체테를 피한다는 뜻으로, 어린 병사들이 관습적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이 조직은 시골에서 (이슬람교도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키는 자경단 형태로 등장했으며, 수도 방기의 기독교도에게로 확산되었다. 이제는 이슬람교도를 압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인종이나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겁을 주고 금품을 뜯는 존재가 되었다.


무기를 지닌 아이들이 지배하는 거리

안티-발라카의 근거지를 찾아가는 것은, 술에 취해 있기 일쑤고 자신이 무적이라고 착각하는 중무장한 청소년의 처분 아래 스스로를 내던지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보이 레이브가 가까워지자, 우리를 태운 택시 운전사는 걸어가는 속도로 느릿느릿 차를 몰았다. 전방에 장애물이 은폐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변 건물에서 안티-발라카 대원들이 쏟아져나와 우리를 털어가거나 그보다 더 나쁜 짓을 하지 않을까 경계했다.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거리는 점점 더 조용해졌다. 택시와 고물 오토바이들이 일으키던 소음은 사라지고 보행자들만이 오갔다. 이윽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음산한 적막이 뒤덮은 지역에 이르렀다.

갑자기 길을 막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아이들 대여섯 명이 우리를 둘러쌌다. 모두 낡고 더러운 옷을 입었으며, 목에는 장식품과 식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부적 삼아 걸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 역시 낡고 더러워서, 치열한 상황에서 한참 쓰였던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가장 어린 아이는 열 살 정도로 보였고, 나이 먹은 아이도 16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세어 보았다. AK-47 세 정, 권총 두 자루, 장검 두 자루, 휘고 뭉툭해진 긴 낫 한 자루까지 세어보다가, 이런 일을 그만두고 빨리 여기를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택시 기사는 겁에 질린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그는 차로 돌아가서 온 길로 돌아가 버렸다. 아이들은 (중아공 공용어인) 상고어로 서로에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급히 수첩을 꺼내 보이며 서툰 프랑스어로 질문을 하자, 말을 멈추고 우리를 주목했다. 바로 그 순간만큼은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는 기자들이야"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여기 보스와도 말하고 싶고." 아이들은 그저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한 아이가 말했다. "보스는 없소." 이 말은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 그들이 우리와 대화를 하는 한,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을 하는 동안, 낫을 든 아이가 뭔가 흥분된 표정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사진기자인 마이클 브라운은 신속히 사진 촬영을 멈추고, 가장 어리숙한 미국식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미국인이야. 뉴욕에 산다고!" 우리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고 스파이도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20미터쯤 떨어진 담 뒤에서 어른 하나가 나타났다. 30대 정도로 보였고, 뚱뚱한 체구 위에 깔끔한 파란색 티셔츠를 입었다. 아이들은 보스가 없다고 했지만, 그는 분명히 아이들의 보스였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소리를 빽 질렀고, 아이들은 무기를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마치 불붙은 폭죽 다발처럼 신속하게 반응했다. 그 남자가 한 말 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첫 번째 말은 "얼른 꺼져" 였다. 마이클과 나는 손을 올려서, 취재용 장비 말고는 어떤 위험한 것도 지니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더듬더듬 말했고, 그는 "인터뷰 안 해"라고 소리친 뒤 "얼른 꺼져" 하고 다시 말했다. 그는 마이클을 밀치고 카메라를 팽개칠 정도로 가까이 육박해 왔으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 우리를 내쫓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물러나면서) 뛰거나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흘낏흘낏 보거나 두려워서 달아난다면, 그 사내나 부하들은 우리가 나쁜 의도가 있었거나 뭔가 뒤가 켕긴다는 증거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순간 그들에게는 무엇이든 자극이 될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로 뒤에서 AK 소총 탄환이 날아와 등이나 다리에 꽂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 목덜미를 손으로 짓누르고 한 아이가 총을 쏘아 나를 죽이는 상상이 들었다.

중심가로 이어지는 흙길은 200미터 정도 됐는데, 그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오가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따라서 어떤 목격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우리를 죽이는 편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면, 누구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 테고, 우리의 시체는 오후쯤에 발견되어, 프랑스 가에 널린 시체 중 가장 희멀건한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슬람 반군이 휩쓸고 간 다음 기독 민병대 발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로, 북으로는 차드, 남으로는 콩고민주공화국 사이에 끼어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이 나라가 가장 최근에 국제 사회의 눈길을 끈 것은 4반세기 전의 일이다. 당시 이 나라의 자칭 황제 장 베델 보카사는 먹다 남은 사람 고기로 냉장고를 가득 채운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였을 때, 이 고기를 대접받았는지도 모른다.

이후 이 나라의 정치는, 아프리카의 기준으로 보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왔다. 르완다처럼 인구의 10분의 1이 살해되는 사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들은 천연 자원이나 인적 자원을 적당한 정도로만 약탈했다. 최소한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정도는 아니었다. 말리나 소말리아처럼 알 카에다의 근거지가 된 적도 없고, 콩고처럼 에볼라의 세균 배양접시 노릇을 하지도 않았다. 이 기간에 중아공은 번영하지는 않았지만 붕괴하지도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복된 나날이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날 중아공 사람 대부분은, 지금 겪는 문제보다는 차라리 전염병에 시달리거나 약간의 인육 풍습이 존재하는 편을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갈등의 시작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프랑수아 보지제는 석유로 부자가 된 차드 대통령 이드리스 데비의 후원을 받아 권좌를 차지했다. 그 뒤 8년 동안 데비는 보지제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차드 정예군을 파견하여 그가 권력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2011년 경에 보지제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데비와 조금 멀어졌다. 격분한 데비는 중아공 동부와 북부에 있는 이슬람 반군들이 느슨하게나마 연합하여 권력을 차지하도록 방조했다.

'셀레카'라고 불리는 이 연합은 병력이 부족하였으므로 차드와 수단에서 용병을 모집하여 충원한 뒤, 방기를 향해 피의 진군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마치 범죄의 파도처럼 촌락들을 휩쓸었으며, 마침내 2013년 봄에 수도를 접수하고 정부를 장악했다. 방기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을 때의 셀레카는, 동부와 북부의 불만 세력이 주변 이슬람 국가의 도움을 받아 형성한 느슨한 정치적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을 차지할 즈음이 되자, 기독교도들은 셀레카가 자신들을 목표로 하며 이슬람교도는 봐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인식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셀레카가 정권을 장악하기 전부터 방기에 살던 이슬람교도는 10만 명 가량이다. 이들 대부분은 셀레카 정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어쨌든 다수 세력이던 기독교도들은 이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슬람교 민병대 조직원이 기독교도를 잡아 협박하며 몸을 수색하고 있다.


2013년 한 해 동안 기독교도들은 교외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서서히 무장을 갖추었다. 그해 연말쯤이 되자 이러한 움직임은 방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셀레카가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정권을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저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2014년 1월이 되자 셀레카의 명목상 지도자인 마이클 조토디아는 베넹으로 달아났다.

현재 임시로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카트린 삼바-판자는 변호사 출신 기독교인이다. 그녀는 무능하며, 지방 촌락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수천 명씩 쫓겨나는 양극화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방기에서는 이슬람교도 축출이 거의 완료되었다. 이 도시 대부분의 구역은 보이 레이브처럼 안티-발라카가 차지했으며, 아직 남아있는 소수의 이슬람교도는 굶주린 채 포위되어, 모두가 죽음을 맞는 최후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학살 경험' 가진 르완다가 평화 유지

현재 이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임무는 아프리카연합(AU) 소속 국가들에서 파견한 6천 명의 평화유지군이 맡고 있다. 이들은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토요타 랜드크루저나 소형 장갑차를 타고 시가지를 순찰한다. 장착된 기관총의 탄환은 작은 당근 크기로, 사람의 몸을 반토막낼 수 있다. 평화유지군을 구성하는 여러 나라 병력 중에서 가장 증오를 받은 집단은 지난 3월까지 주둔했던 차드군이었다. 방기의 기독교도들은 차드 평화유지군이 오로지 셀레카 조직원만 보호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아주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중아공 상황에서 차드 병력의 존재는 불에 기름을 더 붓는 격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중아공을 떠났으며, 이제 긴밀히 협력하는 두 나라인 브룬디와 르완다의 병력만 남아, 이슬람교도의 보호자이자 동시에 안티-발라카의 골칫덩이가 되고 있다.

안티-발라카 장악 지역을 찾아갔다가 곤욕을 치른 다음날, 나는 평화유지군으로 파견 나온 두 르완다 장교를 초청하여 점심을 함께 했다. 식당은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사냥한 야생 동물을 요리해 내놓는 것으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장 폴 카랑와 중령은 르완다군 750명의 지휘관이었으며, 오거스틴 미가보 소령은 그의 작전 수행관이었다. 둘 모두는 아프리카에서 구하기 어려운 사냥감, 즉 평범한 소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그들에게 이런 스테이크는 특별식이었다. 르완다군의 식사 메뉴는 쌀과 닭고기만 반복되며, 이따금씩 정어리가 추가될 뿐이다. 게다가 그 날 두 사람은 축하할 일이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도 트럭 운전사들을 카메룬으로부터 호송하여 데려왔는데, 안티-발라카 세력이 진을 치고 있는 지역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 네 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다르푸르에서도 파견 근무를 했다. 지난 1월에 중아공에 들어온 이래 겪은 아수라장에 비하면, 다르푸르는 오히려 지극히 단순했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 외향적인 성품의 카랑와는 총탄 세례를 받는 가운데에도 미소를 띠며 악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내다. 반면 미가보는 과묵하고 엄숙했으며 생각이 많았다. 그들의 이야기로 짐작해 보건대, 두 사람은 르완다의 소수 부족인 투치족이며, 그들이 지휘하는 병사들은 르완다 군대 대부분이 그렇듯 다수 부족인 후투족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투치/후투 부족 이야기는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르완다 정부는 부족과 관련한 사항은 불문에 부치는 것을 정책으로 하고 있고, 누군가에게 그런 것을 묻는 일은 금기시된다. 나는 르완다군의 기지에서 5일 밤을 잤다. 이 기지는 미군 기지와 비슷했다. 에어컨이 없다는 점만 달랐다. 거기 머무는 동안, 후투나 투치라는 말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르완다 학살 때 벌어진 일 때문에 자신의 병사들에 대해 증오를 갖고 있다면, 그들은 이를 완벽하게 감추고 있는 셈이었다.

1994년에 르완다는 지옥이었다. 100일 동안 80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 사태에 비하면 오늘날 중아공 사태는 여전히 새발의 피다. 학살을 겪어본 나라가 또다른 학살을 막는 데 가장 적극적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카랑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주민들과 대화하며 복수심을 버리도록 이끌고 있다." 그는 학살 사태를 다뤄 본 르완다 사법기관의 경험이 중아공 사람들에게, 그들 속에 섞여있는 학살자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중아공 갈등의 어떤 측면은 (학살을 겪은) 이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끔찍함이어서, 관련자를 사살하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했다. 공공연히 사지를 절단하는 일 같은 것에는 절대 관용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랑와는 "르완다에서는 전통적인 무기(마체테)가 쓰였는데, 그것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 자신은 원래부터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살인자로 파악된 사람을 자기 병사들이 사살한 일을 말해 줄 때는 조금도 유감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길에서 습격을 당한 이슬람교도가 르완다군 주둔지로 도망쳐 왔다. 안티-발라카 조직원들은 그를 내달라고 요구했으나 르완다군은 이를 거부했다. 얼마 뒤, 조직원 중 하나가 돌아왔는데, 또다른 이슬람교도의 시체를 가져 왔다. 외국군이 피해자를 주둔지에 보호해주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나가면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슬람교도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니까. "그는 우리 앞에서 시체의 사지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카랑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사살했다. 누군가가 우리 앞에 총이나 사람의 시체 조각을 들고 나타나면, 우리는 그를 사살해야 한다."


평화유지군 사이의 갈등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다리를 들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을 모두 쏘아 죽임으로써 중아공 사태가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면, 르완다군은 진작에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역사로부터 온갖 종류의 원한이 뿜어 나오며, 게다가 이에 대처하는 태도도 르완다군과 프랑스군이 크게 다르다. 방기에는 프랑스 평화유지군이 200명 주둔하고 있다. 프랑스군은 자기네 작전을 '상가리스 작전'이라고 부른다. 중앙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나비 시모토에 상가리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나비는 잠깐 동안만 살 수 있는데, 프랑스의 개입이 가벼운 정도이고 그 기간도 짧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나비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사실은, 수컷들이 자기네끼리 싸우는 데 엄청난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인데, 아닌 게 아니라 평화유지군 간의 관계는 (이 나비 수컷들처럼) 상당히 험악하다.


프랑스 소속 평화유지군
아프리카연합 소속 평화유지군


르완다군은 프랑스군을 조롱하는 일을 즐기는데, 심지어 공식 언어에서조차 그렇다. 르완다 육군 대변인인 응자밤위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군대를 파견한 다른 나라들이 타성적인 평화 유지 활동을 하는 데 비해, 르완다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프랑스가 현재의 중아공에 손을 댄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역사를 돌아본다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할 것이다. 식민 초기에 프랑스는 원주민을 노예화하려 했으며, 이 나라를 면화 공급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중아공은 가장 멍청한 식민지 관리자들이 좌천되는 곳으로 전락했고, 1960년대 초반에 식민국들의 독립 열풍이 불 때, 프랑스는 이 나라을 잃어버리는 것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 시대의 향수 때문인지, 프랑스는 그 뒤에도 이 나라 정치에 개입하곤 했다. 1980~90년대에 중아공은 자국 내에 프랑스군 기지를 제공했다. 저명한 프랑스 정치인들은 이곳에서 금과 다이아몬드 지분을 차지했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보카사 황제를 찾아온 것은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유명한 식당에서 음식 맛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왜 프랑스가 방기의 반프랑스 정서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프랑스는 르완다의 성장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르완다는 이 지역에서 성장하는 세력으로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영향력을 얻어가고 있다. 프랑스는 르완다가 보호하고 있는 방기의 이슬람교도들이 프랑스군 두 명을 살해한 사실과, 이들이 동네 벽에 "프랑스에 반대하라, 그들은 유럽의 개다"라는 낙서를 적고 다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프랑스는 르완다가 콩고민주공화국에 있는 중아공 반군을 지원하고 정적을 암살하도록 방조한다고 크게 비난하기도 했다. (올해 초에 방기에서 한 사람이 저격당해 숨졌는데, 르완다군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증오가 한쪽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르완다는 2000년대에 주프랑스 대사를 철수시킨 바 있다. 프랑스가 현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에 충성하는 세력을 지원하여 1994년에 후투족 지도자를 살해케 함으로써 대학살을 초래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현재 이런 주장은 철회되었다.) 지난 4월에 카가메는 한 인터뷰에서, 1994년 대학살과 관련해 프랑스로부터 '정치적 준비'를 위한 지원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 얼마 뒤 카가메는 (학살 사태에서 프랑스 정부의 역할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자) 르완다 학살 희생자 20주기 추모 행사에 프랑스 대사 초청을 취소하기도 했다.

방기의 르완다군은 프랑스군이 그 상징물인 상그리스 나비에 지나치게 흡사한 나머지, 안티-발라카가 이슬람교도에게 잔악한 일을 벌여도 팔짱만 끼고 있다고 말한다. 르완다군이 현장에 출동하여 보면, 프랑스군은 사태를 구경만 함으로써 유혈극을 허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가보는 이렇게 말했다. "안티-발라카가 자동 소총을 들고 프랑스군 옆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건 큰 문제다. 평화유지군이 소속 나라에 따라 서로 다른 전투 수칙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니까. 중아공 사람들은 그런 점을 잘 알고 이를 이용해먹고 있다." 언젠가 르완다가 안티-발라카 대원 몇 명을 사살하고 나자, 시람들이 시신을 내달라며 다가왔다. 한 프랑스 병사가 먼 곳에서 이 모든 장면을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르완다군은 프랑스군이 '시민을 사살하는 르완다군'의 전쟁 범죄 현장을 잡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고 믿는다.


프랑스군을 따돌리고 여는 간부회의

다국적 평화유지군 간의 갈등은 이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다. 평화유지군의 아프리카연합 사령관인 카메룬 출신 마틴 투멘타 촘무 장군은 종종 아프리카국 간부 장교들을 기지 내 사무실이 아니라 호텔로 소집하여 회의를 연다. 휴대전화는 끄도록 한다. 프랑스군이 나타나서 방해하거나 그들의 계획을 망쳐놓고 작전 계획을 안티-발라카에 누설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르완다는 프랑스군이 안티-발라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군에게 작전 내용을 알려주면, 한두 시간 안에 안티-발라카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중아공 거리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폭력과 증오를 생각하면, 평화유지군 사이에 벌어지는 이 같은 다툼은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방기의 이슬람교도 상당수는 제5구에 살았다. 이곳은 지금은 셀레카와 안티-발라카가 들이닥치기 전의 삶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낡은 박물관 같은 꼴이 되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었던 미스키네 사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 폐허에 쌓인 벽돌 부스러기 사이로 아랍어로 적힌 낡은 종교 문서 조각들이 나뒹군다. 내가 여기 도착하던 날에는 이 문서 조각들이 대변 덩어리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완전히 폐허가 된 미스키네 사원


어떤 이슬람교도가 이곳(제5구)에 얼씬하거나 혹은 (이슬람교도의 유일한 주거지가 된) 제3구를 벗어나 다른 지역을 돌아다닌다면, 그는 무모하거나 아니면 절망적인 상태일 것이다. 국제 기구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후자의 경우다. 그는 카메룬의 피신처로 도망가서 3개월을 지내다가,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얼마 전에 중아공으로 돌아왔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그는 우리를 불과 두 블럭 떨어진 자기 사무실로 데려가기 위해 우리가 있던 식당으로 차를 보냈다. 보통 때라면 그 자신이 식당까지 걸어 왔겠지만, 지금 그는 호텔과 자기 사무실 말고는 어디도 가지 않는다. 그가 거리를 걷는 동안 누군가가 그를 알아본다면, 그는 즉시 총을 맞거나, 구타당하거나, 어린이를 물어뜯다 사로잡힌 개처럼 끌려다닐 것이다. 반면 기독교도는 공공 구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며, 안티-발라카는 르완다군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무기를 휘두르며 활보할 수 있다.

방기를 휩쓸고 다니는 안티-발라카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은 딱 한 군데, 제3구다. 이곳 중앙에 있는 이슬람 사원 마당에는 많은 남녀와 어린이들이 깔개 위에 누워 있다. 이들은 버려진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안경을 쓴 사내 하나가 자신이 이슬람학부모연합 회장이라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이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피난민이며, 최대한 빨리 방기를 떠날 길을 찾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안티-발라카는 총을 쏘아대며 이곳을 침범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오늘 밤에도 쳐들어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책벌레처럼 안경을 치켜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심장은 용감하며, 우리에게는 마체테가 있다."


"안티-발라카가 우리를 지켜준다"

중아공의 갈등에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유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유혈극으로 이어지는 증오의 정서가 그것이다. 낫을 휘두르며 활보하는 안티-발라카를 이슬람교도가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쫓겨나고 살해당하는 일이라면 기독교도 역시 할 말이 많다.

지난 12월에 제3구에 살던 기독교도 수만 명은 집에서 쫓겨나, 음포코 국제공항 인근 흙밭으로 피신하여 왔다. 이 공항은 아직은 공항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파리에서 오는 에어프랑스 여객기가 도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항의 절반 가량은 천막이 차지했다. 주기(駐機)된 비행기들 사이 공간을 꽉 채운 기독교도들은, 날개 밑 그늘에 움막을 짓고 프로펠러에 빨래를 널어 말린다. 천막은 활주로 부근까지 이어지며, 아이들은 비행기가 뜨고 내리지 않는 동안에 활주로에서 논다. 비라도 내리면 이곳은 시궁창물로 가득 찬 베니스가 된다.


방기 공항의 난민촌


그래도 음포코 공항의 기독교도는 중앙 사원 주변의 이슬람교도보다 상황이 나은 편이다. 적어도 목숨을 잃을 염려 없이 나다닐 수 있다. 또 미로 같은 길을 채운 가판 상점이 있어, 의약품이나 DVD, 말라비틀어졌을 망정 야생 동물의 고기까지 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물어봤을 때, 이들 중 다수는 분노를 드러냈다. 한 남자는 이슬람교도인 이웃과 그동안 평화롭게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웃은 셀레카가 도착하자마자 미쳐 날뛰며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했다고 한다.

벤자민 소야 신부는 제3구의 가톨릭교구에서 사목 활동을 했었다. 그는 (안전한) 제5구에 자신의 새 집이 있지만, 비행장의 군중에게 강론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제3구에 있던 그의 교회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 사원처럼)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슬람교도로 위장한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살람 알라이쿰'이라고 인사했으며, 아내에게 흰색 수단(성직자 옷)을 입혀, 마치 아랍 스타일 드레스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공항의 천막촌에서 한 젊은이를 만났다. 윗통을 벗어젖힌 그는 불만에 가득찼는데, 말할 때는 먼 곳을 응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름은 장 자크라고 했다. 목에는 안티-발라카 신분증을 걸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중아공 북쪽 마을이다. 그곳에서 부모와 누이가 셀레카에 의해 살해당한 뒤, 복수를 위해 수백 마일을 걸어 방기를 찾아왔다. 허리에는 보이 나이프를 차고 있었으며, 목에 걸린 신분증 옆에는 의무적으로 착용하는 부적이 걸려 있었다. "내가 믿는 것은 신과 이 그리그리(부적) 뿐이다." 그는 부적 장식물을 가운뎃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르완다군은 안티-발라카가 이 난민촌을 공격의 전초기지로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장 자크 같은 이들의 존재는, 살인자들이 난민 속에 섞여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내가 난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불량스럽게 선글라스를 끼고 축구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자주 느낄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나와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또 이슬람교도를 비난했다. 몇몇은 칼을 뽑아든 모습을 보이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서로 목에다 칼을 겨누고, 어디에 칼을 대야 목을 가장 쉽게 잘라낼 수 있는지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존재는 (이들이 아니라) 뒤로 빠져서 묵묵히 쳐다만 보고 있는 이들이었다.

난민들은 안티-발라카 전사가 자기네를 지켜주는 정의의 세력이라고 강조했다. 마르크 요아네라는 한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안티-발라카는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무기란 고작해야 사냥총이나 장식용 칼 같은 것이다. 그런 걸 들고 직업적 병사들과 맞서 싸운다." 그가 말하는 직업적 병사들이란 이슬람교도에 섞여 있는 차드의 용병이다. "안티-발라카가 없다면 이슬람교도가 당장 이곳에 밀어닥칠 것이다."


안티-발라카 민병대원. 소총, 단도, 마체테로 무장하고 부적을 줄줄이 차고 다닌다.


음포코 공항이나 다른 곳의 기독교도 어느 누구도, 이슬람교도의 삶 역시 매우 위태로우며, 자기네보다 훨씬 궁핍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추리닝을 입은 젊은이 안드레 케케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부룬디인의 비호를 받으며 이곳에 와서 우리를 죽인다. 그들은 중아공 국민이 아니다. 그들 중 다수는 차드인이며, 우리를 학살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말하는 동안 군중이 모이자, 그는 말리와 세네갈 출신인 그의 이슬람교도 이웃은 이곳(난민촌)에 와도 좋다고 말했다. (이슬람 사원을 무너뜨린 것이나 코란을 똥종이로 쓴 것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뜻인 모양이다.) 그러나 차드인은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차드인'이라고 말할 때 군중은 분노로 웅성거리며 그 말을 반복했다. 몇몇 사람은 '식민주의자들'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다수인 기독교도보다 큰 권력을 가졌던 기업가들을 뜻하는 것이다.

케케는 차드인이 지난 한 달 동안 30명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30명 살해! 30명 살해!" 그는 이 말을 반복했으며, 그럴 때마다 군중은 증오의 소리를 냈다. 나는 이들이 난민촌을 지키는 자경단과 안티-발라카 전사를 구분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들은 구분하지 못했다. 대신, 안티-발라카라는 말이 나오자 환호성부터 질렀다. 마치 어떤 축구팀의 팬들이 모인 술집에서 그 팀의 전설적인 선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미스키네 지역 동장(洞長)인 에티에네 응가카는 자기 지역이 안전해서 다행이라며, 이런 안전은 오직 "우리 안티-발라카 애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자 케케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안티-발라카가 인민이다!" 미스키네의 모든 사람이 그 소속원이라는 것이다. "아기들까지 그렇다."


싸움이 끝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참혹함을 해결할 방안을 찾노라면, 대량 학살을 초래하지 않거나 끝낼 수 있는 방안이라면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국제 평화유지군은 중아공의 내분을, 갈등 양측이 서로 눈을 노려보는 싸움 정도로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위태롭지만 유혈 사태는 진정시킨 셈이다. 또 다른 방안은 현재 남아있는 이슬람교도를 이슬람 다수 지역이나 주변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이 방안의 지지자에는 이슬람교도 자신이 포함된다. 내가 중아공을 찾았을 때 이들의 주요 요구 사항은, 차드나 카메룬과의 국경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르완다군 지휘관 중 하나인 오거스틴 미가보 소령은 이 방안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길게 보면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원하는 것은 그저 이 나라를 떠나려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람들이 떠나면 싸움은 끝날 것이다." 이것은 긍정적인 전개가 아닌가. 비록 단기간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르완다가 내전 이후 20년 동안 구축해온 화해 모델과 정반대이다. 미가보는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이 갈등 양측(안티-발라카와 이슬람교도) 모두가 원하지 않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남아있는 이슬람교도를 모든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며 두 분쟁 세력이 함께 어울려 살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질 것이라고 미가보는 말했다. "북쪽으로 간 이슬람 세력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 그들은 무자비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차드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셀레카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다시 집결하여 방기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 기색이 있다. 미가보는 미루었다 터지는 재앙이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그것은 1994년 르완다 사태와 비슷하다.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치를 보이고 있는 현재의 방기 상황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십만 명의 죽음이 나은가, 아니면 수만 명의 죽음이 나은가 하는 문제다.

전문가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시도되었어야 할 방안을 가장 안전하거나 최소한 가장 덜 나쁜 대안으로 지지하는 듯하다. 즉 국제 평화유지군이 위임 통치를 담당하며 취약한 계층을 강력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지난 4월1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평화유지군 11,800명을 파견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이제 중아공이 할 일은 이 군대가 도착하는 9월까지 기다리며 그 사이에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증오가 이미 고착되기 시작했으며, 영구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 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자기 머리를 베려고 했던 동네로 가장 먼저 들어갈 사람은 없다. 유엔의 노력이 얼마나 오래 효과적으로 지속될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목을 걸 사람도 없다. 이미 중아공 정부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 즉 정부군을 이슬람교도가 배제된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중아공 정부군은 셀레카가 방기를 접수했을 때 해체되었다. 현재 정부는 군대를 재건하고 있는데, 그 구성원이 어떤 전력을 지녔는지는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다. 지역 분쟁이나 정치적 폭력에 연루된 적이 있는지, 안티-발라카에 충성하는 성향인지를 점검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될 정부군이 나라 전체를 대표하게 될지, 아니면 기독교도만을 대표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중아공 정부군 기지를 찾아가 보았다. 병사들이 소집 신고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여름방학을 끝내고 새로운 학기를 맞아 학생들이 몰려드는 대학 캠퍼스 같은 분위기였다. 병사들의 군복은 제각각이었다. 카스트로 스타일의 녹색 전투복도 있었고, 사막 전투용 위장복도 있었으며, 미국 농구팀 올랜도 매직의 유니폼도 있었다.

지휘관들은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범죄 전력이 없는 한 모든 중아공 사람의 지원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아공 정부군에서 30년을 일한 한 장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내게 넌지시 말해 주었다. "상황이 미묘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안티-발라카를 색출해야 한다." 그는 삐쩍 말랐는데, 내게 귓속말을 하기 위해 몸을 기울이자 옷이 허수아비의 그것처럼 몸에서 따로 놀았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지만, 그런다면 안티-발라카가 나를 찾아내 두들겨팰 것이다."

더 심할지도 모른다. 지난 2월4일, 새로 취임한 대통령 카트린 삼바-판자가 군대를 사열하고 연설을 끝낸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정부군 소속 군인 몇이 대열을 이탈하여 한 젊은이를 잡았다. 그가 셀레카 소속원이라는 것이다. 군인들은 그의 머리를 발로 차고 칼로 찔러 죽인 뒤, 시체를 거리에 끌고 다니다 불태웠다. 그들은 기자들이 이런 장면을 사진 찍는 것까지 허용했다. 이 소동은 프랑스 평화유지군이 공포탄을 쏘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이날 민간인이 군대 행사를 구경하다 군인들에 살해당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지옥 속 평화의 섬 같은 대통령 사택

나는 이 나라를 떠나기 전에, 방기 동부에 있는 삼바-판자의 집을 찾아갔다. 중아공 갈등의 두 세력은 모두 그녀를 싫어한다. 안티-발라카는 그녀를 '셀레카의 창녀'라고 부른다. 이슬람교도는 그녀가 자기네를 도울 의사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녀는 최소한 양 진영의 극단적인 요소를 배척하는 온건함을 지녔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체질적으로 권위주의자였던 전임자들에 비하면, 그녀는 물론 훨씬 나은 과거를 지녔다. 보카사 황제는 대관식 행사를 치르는 데 이 나라 GDP의 100%에 이르는 금액을 쏟아부은 사람이다. 그 행사가 얼마나 눈부시고 화려했던지, 베르너 헤어초크(독일 영화감독)다큐멘터리로 만들었을 정도다(유튜브). 보지제는 시위가 벌어지면 초기에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차드군)을 투입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과는 달리, 삼바-판자는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변호사였다. 그녀는 마법을 쓴다고 기소 당한 여성이나 아이들처럼 취약한 계층을 변호한 경력도 있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국가 원수가 등장했다는 데 대해 환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국가의 안녕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로는 유례가 없는 지도자 모양을 하고 있다. 삼바-판자는 편안함과 안전함의 거품 안에서 살고 있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르완다군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자기 정부군은 믿을 수 없다. 르완다군의 무장 차량이 그녀를 아침마다 사무실로 데려다 주며, 일요일마다 방기의 노틀담 사원에서 프랑스어로 열리는 미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외국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그녀가 타고 온 비행기는 '가봉 공화국'이라는 글자가 붙은 민간 제트기였다.

삼바-판자는 잘 정돈된 그녀의 집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그녀의 집은 중아공 기준으로 보면 화려했지만, 전임자들의 사치에 비하면 수수한 편이었다. 아프리카식 나무 조각품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그녀가 앉은 자리 위에는 유화로 그린 꽃 정물화가 걸려 있었다. 며칠 동안 르완다군과 함께 방기 거리를 헤메고 다니느라, 내 바지는 세탁이 필요한 상태였다. 내가 그녀와 마주 앉으려 할 때, 나는 그녀의 소파 위에 붉은 색 흙먼지 자국을 남기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아마 그녀의 가구에 중아공의 흙이 닿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다.


2014년 1월 삼바-판자 대통령의 취임식


은신처 같은 이 집에서 삼바-판자는 중아공 역사에 깃든 비극적인 리듬에 대해 한탄했다. 그녀는 동부와 북부 지역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이 일으킨 봉기가 어떻게 종교 분쟁으로 신속하게 변질되었는가를 설명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은 정치적인 모양을 띠기 시작했다.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양상이었다. 비이슬람 사람들이 일어나 대응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이슬람교도를 싫어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자기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이런 사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좀 건방진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조직하는 것, 대화와 화해를 이끄는 것, 분쟁으로 결딴난 정부를 재구성하는 것 같은 방안을 피상적으로 말했다. 또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끄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있는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남수단이나 시리아를 보라."

악몽 같은 자기 나라의 한 가운데 에어컨이 켜진 공간에 앉아, 그녀는 쿨한 변호사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이 나라를 이끌 화해 중재자로 떠오르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미쳐 날뛰는 의뢰인을 맡아 변호해야 하는 불운한 국선 변호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법원 직원에게 달려들고, 판사에게 연필을 집어던지고, 석방되어 나가는 즉시 또 범죄를 저지르겠다고 공언하는 의뢰인을 담당하여, 변호를 하기는 하지만 방어도 구출도 못하는 변호사 말이다.

그녀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녀의 경호를 책임진 르완다 장교가 옆에 배석하여 조용히 듣기만 했다. 르완다는 내분으로 학살이 벌어진 이후 어떻게 화해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삼바-판자는 르완다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르완다는 (대통령) 카가메의 투치족이 이끄는 르완다애국전선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상대편인 후투족을 정부 조직과 시민사회에 적극 영입하는 방식으로 화해를 진행해 나감으로써 내전을 끝낼 수 있었다. 만일 한 쪽이 전쟁을 이기지 못했더라면 그러한 방식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아공은 상황이 다르다. 사태가 르완다처럼 악화되지 않도록 평화유지군이 개입하고 있다. 또 안티-발라카나 복수할 기회를 노리는 셀레카 중 어느 한 쪽이 결정적으로 승리하는 일은 피해야 마땅한 결과다. 나라 밖으로부터 안정의 수단이 느리게나마 공급되고 있지만, 중아공 사람들 스스로에서 나오는 자비와 용서의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안정은 재앙을 잠시 미뤄두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삼바-판자는 경제 부흥을 위한 자신의 방안에 대해 내게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시내 중심부로부터 타탁거리는 총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우리는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기에는 너무나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쓸데없이 길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나라도 겪어서는 안 되는 현실로 돌아가기 전에, 이 평화의 섬 안에 잠시라도 더 머무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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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1 2015/01/15 05:09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 deulpul 2015/01/15 09:02 #

    인사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 중앙 2015/01/15 10:28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 deulpul 2015/01/15 11:49 #

    고맙습니다.
  • 2015/01/16 10:57 # 삭제 답글

    들풀님께서 번역 해주신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종교와 이념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어떤 절망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글에서 생생하게 보여집니다. 몰입해서 읽어서 그런지 가슴이 답답해지네요.
  • deulpul 2015/01/16 12:52 #

    현지 취재와 구조적인 이해를 잘 엮어내서 쓴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글을 읽으며, 한국 해방 정국의 좌우 대립 상황이 자꾸 연상되는 불행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 2015/02/22 23: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5/02/23 08:17 #

    하!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썼는데 이렇게 잡아 주시는 분이 다 있네요. 말씀 듣고 찾아본 뒤, 앞으로 참고하려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 두었습니다.

    1. 둘러싸다: 주변을 무엇으로 감싸는 느낌. ≒ 에워싸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둘러싸다)
    2. 둘러쌓다: 주변에 무엇을 차곡차곡 쌓는 느낌 (집을 벽돌담으로 둘러쌓다)
    3. 둘러싸이다: 주변이 무엇으로 감싸지다
    4. 둘러쌓이다 - 없는 말

    본문에서 쓴 것은 둘 다 분명히 3의 뜻이므로 '둘러싸이다', '둘러싸여'가 맞습니다. 즉시 수정하였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답글은 다른 분도 보실 수 있게 비공개를 풀어놓습니다.
  • 2015/02/24 01:4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2/24 21: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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