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바둑돌이 아니죠 섞일雜 끓일湯 (Others)

언젠가부터 신문 웹사이트들에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만나게 된다. 경기도교육청이 낸 광고다. 아래 그림은 세 웹사이트에 등장한 광고를 오려서 한데 모은 것이다.




어린이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 하나하나를 위한 교육 정책을 펼치겠다는 다짐을 실은 광고다. 카피가 미국의 'No Child Left Behind'를 떠올리게 하지만, 여하튼 그 뜻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 광고를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편하지 않다.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 광고는 만화와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작품 <미생>을 소재로 썼다. 아시다시피 이 만화에는 바둑을 두던 주인공이 등장하고, 줄거리를 엮는 뼈대에서도 바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기도교육청의 광고는 비록 필체는 다르지만 원 작품과 똑같이 한자로 '미생'이라고 박아서, 작품과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배경 이미지로는 돌이 놓인 바둑판을 썼다. 그리고 텍스트에서는 바둑돌을 비유적인 개념으로 사용했다.

바둑판 위에 놓인 돌 가운데 처음부터 의미 없는 돌은 없습니다.

멋진 말이다. 여기서 돌은 물론 어린이를 상징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면 아이들을 바둑돌에 비유하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바둑이 두어지는 양상을 떠올려보면 그런 의문을 절로 갖게 된다. 그래서, 당장 보면 멋진 말 같고 그래서 여기저기 회자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형편없는 과장이거나 실제 사실과 모순되는 말임을 깨닫게 되는 숱한 아포리즘의 한 종류처럼 느껴진다.

1. 바둑에서는 처음부터 의미 없는 돌도 얼마든지 있다.

바둑판에 놓인 모든 돌이 의미를 갖는 것은 기재(棋才)가 아주 뛰어난 기성(棋聖) 같은 사람의 경우나 그렇다. 보통 바둑에서는 잘못 둔 수, 이른바 패착이나 완착이 비일비재하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 할 때의 악수(惡手)도 그렇다. 패착은 판세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고, 그런 경우 나중에 볼 때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의미한 수도 있다. 착각한 수, 실수한 수는 한 판의 바둑에서 얼마든지 나온다. 하수의 바둑이라면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날 때부터 패착과 같은 아이가 있는가? 처음부터 그 존재가 실수인 아이가 있는가? 처음에는 실수가 아니었고 뜻은 좋았던 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패착인 돌 같은 아이가 있는가? 아이를 바둑돌에 비유한 경기도교육청은, 아이가 패착이나 완착, 악수로 평가 받아도 좋다는 말인가?

2. 기사는 바둑돌을 흔히 버린다.

반상에 놓인 모든 돌을 예뻐하고 사랑하며 함께 끌고 갈 수는 없다. 어떤 돌은 훨씬 소중하고 어떤 돌은 별로 값이 없다. 다른 돌을 살리기 위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두는 돌도 있다. 미끼도 있고 총알받이도 있다. 바둑판 위에 놓인 돌 가운데 처음부터 의미 없는 돌은 없다 치더라도, 그 의미란 게 반상 위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크게 차등적이다.

원래 텍스트의 맥락을 잠깐 돌아보자. <미생>(드라마)에서 이 말이 나오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어릴 때 사범으로부터 지도를 받던 장면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옛사범: 왜 그 수를 거기에 두었는지 설명해봐.
장그래: 그... 그냥...
옛사범: 바둑에 그냥이라는 건 없어.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는, 그 수로 무엇을 하겠다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야 해. 그걸 '의도'라고 하지. 우상귀가 막혔어. 자, 위기야. 어떻게 할 거야?
장그래: 불필요한 수를 버려야 합니다.


바둑 사범과 나눈 이 옛날 대화가 회상으로 떠오른 것은 어떤 순간인가. 입사 발표를 하면서 버벅대던 장그래가, 모든 필요를 다 충족시킬 수 없으며 어떤 기대는 버리고 가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장면이다.

아이를 바둑돌에 비유하는 것이 왜 옳지 않은지 명확히 드러난다. '불필요한 아이를 버려야 합니다'라고 할 수 있는 아이는 없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사실이 우리 교육 환경의 끔찍한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그런 내용을 교육의 지표로 삼아서는 곤란할 것이다. 바둑돌의 운명은 'Some children should be left behind'이다. 이것은 교육 당국이 추구해야 할 정책 방향으로서는 최악의 것이라고 할 만하다.

3. 아이는 누군가에 의해 두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생>에서 쓰인 돌의 의미에 아이를 그대로 투사하면 곤란한 것이다. 바둑돌은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위해 둔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버려질 운명이라 하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상태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 역시, 위에 인용한 원문의 맥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서는 '의도'라고 했다.

아이가 이런가? 모든 아이가 누군가의 의도나 섭리에 따라 어떤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내보내졌고 그 목적을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진 존재인가? 이런 발상은 종교적 세계관이 교육 정책에 그대로 투영되는 곳, 혹은 국가나 집단을 절대시하고 개인은 그에 봉사하는 것으로만 존재 의의를 찾는 전체주의 집단에서나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4. 바둑은 전쟁이다.

바둑을 흔히 수담(手談)이라고 한다. 손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품격 있고 점잖은 놀이 같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바둑은 박터지는 싸움이다. 짜장면 값을 걸고 두어지는 동네 바둑에서부터 수천만 원 상금과 타이틀이 걸린 세계적 대국에 이르기까지, 바둑판 앞에 앉은 사람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이겨야 한다는 목적의식뿐이다.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떻게 이겼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따라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 현찰을 밝힌다는 평가를 받든, 뜬금없이 세력만을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든, 정석을 무시한다는 평가를 받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이기면 된다.

바둑돌은 그 전쟁을 치르기 위한 수단이다. 돌들은 반상의 전장에서 상대편 돌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면서 자기 땅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어 사라진다. 바둑을 수담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돌이라는 칼로 상대방을 푹푹 찌르는 게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다. 돌은 싸움에 이겨야 한다는 목적에 철저히 봉사하는 존재로서만 의미가 있다.

바둑판 위에 놓인 모든 돌이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란 바로 그런 의미다.

교육이 그런 것인가? 교육은 전쟁이 아니고 싸움도 아니다. 아이들은 승리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역시, 불행히도 그러한 사실이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해도, 이를 교육의 지표로 삼을 수는 없다. 물론 경기도교육청이 의도한 바도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여 보면, 교육 정책을 상징하는 소재로써 바둑을 차용하는 일, 그리고 아이들을 바둑돌에 비유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들을 염두에 두면, 꼭 바둑돌을 교육 정책 홍보의 소재로 쓰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아이들이 바둑판 위에 놓인 돌 같은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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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육청 광고는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교육 정책을 홍보하면서 <미생> 열풍을 손쉽게 끌어다 썼다. 이것은 마치, '강남 스타일'이 유행하니까 각급 경찰서, 군부대, 행정 기관 등이 일제히 이 노래와 춤을 홍보 소재로 들고 나오는 양상과 비슷하다.

물론 광고란 눈길을 잡아 끌어야 한다는 의무를 안고 있고, 그것이 성공한 결과 내가 이렇게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흔히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불리는 교육을 담당하는 관청이라면, 값싸게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바람직하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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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측면이 더 이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광고는 <미생>을 그 소재로 하고 있다.

<미생>이 그려내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내용을 짚어낼 수 있겠지만,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이고 인간 파괴적인 고용 시스템도 그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개인 능력보다 학벌이나 줄서기가 성공에 더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을 읽어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미생>의 세계를 그대로 끌어와 교육의 지향점을 홍보하기 위한 소재로 쓰는 것은 썩 적합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극복의 대상이 지향인 것처럼 묘사된 셈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광고를 위해 어떤 소재를 사용할 때,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껍데기만을 끌어와 차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두텁지 못한 사고(思考) 깊이를 반영하는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경기도교육청은 <미생>을 활용한 것에 틀림없는 저 광고를 제작하면서, 작가에게 사용료를 지급하였거나 아니면 동의를 구하였는지 궁금하다. '미생'이 상표 등록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고, 광고문은 활자체가 다르며 본문 텍스트도 원문의 내용과 조금 다르지만,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모티프를 가져왔으므로 충분히 분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적으로 시시콜콜 따지는 일을 떠나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워내는 일을 담당하는 교육청이라면, 이렇게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쓸 때 당연히 대가를 지급하거나 동의를 얻는 모범을 보였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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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kalms 2015/01/19 11:03 # 삭제 답글

    광고기획자가 원작 웹툰을 보았는지 의심스럽군요.

    장그래와 사범의 대화에서 돌은 장그래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장그래의 행동과 결정 하나하나를 상징합니다.
    의미없는 돌이 없다는 건 의미없는 행동과 결정은 없다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편의점 알바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편의점 사장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고
    그렇지만 편의점 알바를 한 이력이 쓸데없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요즘 인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고 합니다.
    역설적으로 요즘 세상에 인문학의 기초가 너무 없다고 느껴지는 데서 오는 반작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 deulpul 2015/01/20 23:50 #

    바둑에 대한 대화는 말씀처럼 새겨야 맞는 일이겠지요. 드라마나 만화는 아마 보았겠지만, 활용하기에 바빠서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인문학이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재재조명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 pepe 2015/01/20 01:41 # 삭제 답글

    그냥 딱 봐도 구리네요 기업이나 사교육 업체라면 걍 그려려니 하겠지만.. 에휴
  • deulpul 2015/01/20 23:55 #

    미적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그 부분을 넘어서 발상과 표현 자체가 독창적이지 않고 시류에 편승한다는 점에서 아쉽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pepe님도 그런 시각에서 하신 말씀이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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