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智出: 회고록 연결連 이을續 (Series)

아포리즘 프로젝트 世智出 세지출 입니다. '세상의 지혜들의 완벽한 출처'라는 뜻입니다.

단문의 형태로 회자되는 아포리즘의 메시지는 촌철살인의 지혜라는 가치와 더불어 위험함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일반화, 원 의미의 변질,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적용 따위가 그것입니다.

世智出은 아포리즘이 태어나고 자란 과정을 짚어보는 작업을 통해, 단문이라는 형태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줄이고 그 지혜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출처 캐기라는 개인적인 관심의 소산이기도 하며, 그저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궁금한 분들에게도 쓸모 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기획이 지향하는 바는, 최소한 한국어로 된 문서 중에서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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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한국은 갑자기 자서전에 대한 성찰로 일렁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을 물러난 지 2년 만에 내놓은 이 800쪽짜리 회고록에 대해 출간 직후 나온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 내용이 자기 미화와 변명으로 점철되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또 이른바 자원 외교에 대해 국정조사가 벌어질 상황에서 당시 정책을 합리화하는 내용을 출간한 것이 적절하냐는 시선을 받았다.

1월29일 JTBC의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회고록이지만 회고록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이 뉴스는 <1984> <동물농장>을 쓴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자서전에 대해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이명박 회고록을 비판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이었다. 이후 이 말은 인터넷에 널리 나돌았다.


JTBC '뉴스룸' 장면


이것은 조지 오웰이 1944년에 쓴 에세이 '성직자의 특권: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몇 가지 첨언(Benefit of Clergy: Some Notes on Salvador Dali)'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내용을 원문과 함께 다시 쓰면 이렇다.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것들을 드러낼 때에만 믿을 수 있다.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Autobiography is only to be trusted when it reveals something disgraceful. A man who gives a good account of himself is probably lying)


그런데 왜 그럴까? 누구나 다 일정한 정도로나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 테고, 그런 사람은 수치스러운 일들이 별로 없을 수도 있지 않는가? 신뢰 받는 자서전을 쓰려면 창피한 내용을 억지로라도 넣어야 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위 인용 부분의 바로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오웰의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원문을 인용하면서 마침표를 찍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며 완성된다.


왜냐하면 어떤 자의 삶이라도 그 내면에서 볼 때는 수많은 패배의 연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since any life when viewed from the inside is simply a series of defeats.)


이렇게 뒷말이 덧붙으면 잘 이해가 된다. 어떤 점에서 볼 때 이 부분이 더 중요하다. 오웰의 말은 단순히 자서전을 쓸 때 솔직한 자세로 치부를 드러내야 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이상화하는 스스로의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 괴리가 있게 마련이고, 이러한 괴리에서 나온 갈등과 실패를 그대로 서술해야 신뢰할 수 있는 자서전이 된다는 말이다. 단순히 윤리적인 글쓰기에 대해 강조한 말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웰의 말은 아직도 덜 끝났다. 그 뒤에도 중요한 부분이 있다.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것은 한국말뿐 아니라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정직하기로는 최악인 책이라도 그 저자의 진정한 면모를 의도하지 않게 드러낼 수는 있다. (However, even the most flagrantly dishonest book (Frank Harris's autobiographical writings are an example) can without intending it give a true picture of its author.)


변명과 거짓말로 채워진 자서전이라도 그 책을 쓴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미덕은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이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쓴 책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의미가 있는 셈이다. 자서전이 저자를 정직하고 존경받을 사람으로 만들지, 아니면 거짓말장이의 면모를 드러내주는 증거 역할로 가치가 있을지는 저자가 하얀 종이(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앉아서 스스로와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실제 책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노란 형광펜 부분이 흔히 회자되는 부분이고, 그 맥락은 뒤에 파란색 펜으로 구분했다.




오웰의 에세이 '성직자의 특권'은 제목에서 보다시피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글이다. 달리는 1942년에 <살바도르 달리의 비밀스러운 삶(The Secret Life of Salvador Dali)>이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오웰은 이 자서전을 읽고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사실은 자서전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 달리라는 예술가의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 글의 주제는 평생 변태적인 미치광이처럼 살아온 달리의 비윤리적인 삶과 그의 그림의 예술성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제목의 '성직자의 특권'은 중세 영국에서 성직자가 세속의 법 체계로 처벌받지 않는 특권을 가진 것을 말한다. 달리 그림의 예술성을 들어서 그의 변태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을 옹호하려는 주장은, 보통 사람의 도덕률에 묶이지 않고 교회법과 종교적 규범에 종속되던 중세 성직자들의 특권을 연상케 하다는 것이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문장이 간결하고 위트가 있어 아주 재미있는 글이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웰의 이 에세이가 검열로 삭제를 당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글은 당시 발간되던 연간(年刊) 문예비평지 <새터데이 북(The Saturday Book)>에 실리기로 되어 있었다. 오웰은 원고료로 25파운드까지 받았다. 그러나 출판사측은 그 내용이 너무 음란하다고 판단하고 뒤늦게 삭제를 결정했다. 달리의 시체 애호, 대변 애호 같은 파격적이고 음란한 취향에 대한 서술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쇄기는 이미 돌고 있었다. 오웰의 에세이는 인쇄된 책이 배포되기 전에 칼로 오려내졌다. 그의 글이 들어 있던 여섯 쪽은 미술가 로렌스 스카피가 쓴 글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목차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오웰의 글 제목이 그대로 박힌 채 나갔다.

아래는 도서관에서 찾은 문제의 책 <새터데이 북> 제4호(1944년)다. 목차에 오웰의 '성직자의 특권'이 찍혀 있다.





해당 페이지에는 종이를 찢어낸 흔적이 보이고, 그 자리에 새로운 페이지가 풀로 붙어 있다. 이 페이지 맨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주가 달려 있다: "편집자는 조지 오웰 씨가 쓴 '성직자의 특권: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몇 가지 첨언'이라는 글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외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급하게 썼으면, 제목에서 'Somes'라는 오자도 냈다.




그러나 출판사의 자체 검열로 책장이 뜯겨나가기 전 상태의 책 몇 권이 흘러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오웰에게 전달되었다. 오웰은 이 글을 갖고 있다가, 두 해 뒤인 1946년에 <Critical Essays>를 펴낼 때 거기 수록했다. 그렇게 해서 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명박이 회고록을 낸 덕분에 조지 오웰의 에세이까지 훑어보게 되었으니, 그의 책은 오웰이 말한 자서전의 두 가지 미덕을 넘어서는 (그리고 적어도 지금 내게 있어서는 그 의미에서만) 쓸모가 있는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자서전 vs. 회고록

조지 오웰은 달리의 자서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명박에 출간한 것은 회고록이다. 자서전(autobiography)과 회고록(memoir, '메모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가장 두드러진 점은 책의 내용이 되는 개인 삶의 시간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자서전은 대체로 개인이 살아온 전 인생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시간 순으로 서술된다. 이에 비해 회고록은 주로 인생의 특정 시기, 이를테면 재임 기간이라든가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진 경험이 책의 대상이 된다. 시간 범위가 자서전에 비해 좁다.

스타일 차이도 있다. 자서전은 역사서의 일부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 서술이 엄밀하게 사실에 근거할 것으로 기대된다. 자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자서전을 쓰는 사람은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고 끊임없이 사실 확인을 하면서 집필해야 한다. 반면 회고록은 개인의 감정과 인상에 주력한다. 사실도 중요하지만 자서전의 경우보다는 덜 강조된다. 그보다는 그런 사실을 겪으며 갖게 된 느낌, 소회가 주요 내용이 된다.

미국 작가이자 공공 지식인으로 존경 받았던 고어 비달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고록은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억하는 방식이며, 자서전은 조사를 거치고 날짜와 사실들을 반복해서 확인해야 나올 수 있는 역사서이다. 나는 회고록으로 쓰는 쪽을 선택했다. 느슨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정곡을 찌르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판계에서 두 가지 양식을 명확히 나누지 않고 뒤섞어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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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2/13 03:4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5/02/13 08:17 #

    구석에 적어둔 짤막한 글귀까지 꼼꼼히 확인해 주셨네요. 물론 링크와 의견 첨부는 얼마든지 하셔도 좋고, 오히려 권장 사항입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토론이 넓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재를 원하지 않는 것은 출처 문제도 있고, 원글에 잘못이 있어 수정할 경우 그 내용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방침에 관해 문의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5/09/12 10:1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5/09/15 21:38 #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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