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손기정 목에 금메달을 걸어줬다? 섞일雜 끓일湯 (Others)

‘손기정급’ 역사 만들고 청문회에…박태환을 따뜻하게 안아줄 순 없을까?

약물 시비에 휘말린 박태환을 손기정에 비기는 칼럼이다. 눈길이 가는 대목이 많지만, 우선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보자(강조는 내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양정모가 획득했다. ‘한국인’ 최초의 금메달은 그보다 40년 전,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손기정이 획득한 것이다(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이는 아돌프 히틀러다).


괄호를 친 부분 전까지는 누구나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괄호 안 내용은? 누구나 그렇게 아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사실은 무엇인가? 두 가지 사항으로 분리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었다?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관행은 근대 올림픽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때 각 종목의 우승자에게는 은으로 만든 메달과 올리브 가지를 상으로 주었다.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의 메달은 가로 4.2cm, 세로 6cm의 사각형이었다. 올림픽 메달이 사각형인 것은 이 대회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우승자 대부분에게는 사실 메달이 아니라 트로피가 주어졌다.

지금과 같이 1~3위 우승자 세 명(팀)에게 금, 은, 동의 원형 메달을 수여하는 시스템은 그 다음인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이런 초기 메달들은 목에 걸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다. 큼직한 동전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목에 걸 수 없다. 그래서 시상식 때 우승 선수들은 메달을 목에 거는 게 아니라 '받아 든다'.

손기정도 메달을 목에 걸고 있지 않다. 당시 사진을 자세히 보면, 1~3위를 한 손기정, 어니스트 하퍼(영국), 남승룡은 모두 작은 상자를 손에 쥐고 있다. 이게 메달이 든 상자다.





위키피디아에 실린 사진을 보면, 베를린 올림픽 메달은 다음과 같이 생겼다. 목에 걸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제3회 세인트루이스 때, 즉 금-은-동메달 관행이 시작되었을 때는 메달에 작은 리본을 붙이고 핀을 달아 가슴에 꽂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형태는 제3회가 유일했고, 그 뒤로는 계속 동전 형태로 상자에 넣어 주었다.

메달에 목걸이를 달아서 목에 걸 수 있게 만들고 실제로 그런 형태로 시상을 하는 방식은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이때는 목걸이도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섬유 리본줄으로 대치되었다.

그래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자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폴란드 선수들이 받아온 올림픽 메달. 목걸이가 없는 것들이 보인다.


이상의 내용은 올림픽 메달의 역사에 천착해온 사나이 짐 그린스펠드가 쓴 <올림픽 메달: 참고 가이드(Olympic Medals: A Reference Guide)>를 바탕으로 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가 펴낸 자료를 참고하였다.


2. 히틀러가 손기정에게 시상을 했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제3제국의 영광을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그의 희망대로 이 대회의 종합 우승은 독일이 차지했다. 히틀러는 8월1일 개회식 때 메인 스타디움 특별석에서 대회 개회를 직접 선언했다. 이후 경기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수시로 스타디움을 찾아와 참관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마라톤 우승자에게 직접 메달을 수여하는 시상까지 했다? 이것은 우선 상식적으로 의심이 드는 이야기다. 시상식은 경기장 바닥에서 진행된다. 히틀러가 시상을 하려면 특별석에서 나와 부관들을 이끌고 그곳까지 내려가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시상식은 우승자의 영광을 기록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국가 원수 히틀러가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마라톤의 우승자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이 사진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 사진을 본 적 있습니까?

당시 시상식 상황을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시상대 주변에 히틀러나 나치 간부들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수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며 시상하는 이는 독일 올림픽위원회 사람일 것이다.

히틀러와 베를린 올림픽에 대해 쓴 책 네 권을 살펴보았다. <히틀러의 게임: 1936년 올림픽(Hitler's Game: The 1936 Olympics)>, <히틀러의 올림픽: 1936년 베를린 올림픽(Hitler's Olympics: The 1936 Berlin Olympic Games)>, <나치 올림픽: 1930년대 스포츠, 정치, 유화정책(The Nazi Olympics: Sport, Politics, and Appeasement in the 1930s)>, <베를린 게임: 히틀러는 어떻게 올림픽의 꿈을 훔쳤나(Berlin Games: How Hitler Stole The Olympic Dream)> 등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책들에는 손기정과 마라톤 경기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것도 매우 구체적이다. 손기정의 표정이 어땠는지, 결승점을 지난 뒤 진행자 두 명이 그에게 타월을 어떻게 덮어 씌웠는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다 들어있다. 마라톤 경기를 지상 중계하는 식으로 서술한 책도 있다. 어떤 책에는 2위를 한 영국의 하퍼가 경기 직후 자기네 나라 라커룸을 찾기 위해 12명의 경찰관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으며, 하퍼는 피가 흐르는 발을 끌고 담배를 피우며 혼자서 스타디움을 헤메 다녔다는 서술도 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손기정에게 메달을 걸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어떤 작가나 역사가도 그런 사실을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히틀러가 친히 내려와서 우승자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첨부할 사실이 있다.

첫째, 대회 초기에 히틀러가 우승자들을 불러들여 치하한 것은 사실이라는 점.

베를린 올림픽에서 미국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는 100m를 비롯한 네 경주에서 우승하여 4관왕이 되었다. 그는 흑인이었다. 오언스의 우승 직후, 미국 매체들은 히틀러가 오언스와 악수하기를 거부했다는 기사를 앞다투어 실었다. 이런 보도는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던 히틀러가 강한 인종 편견을 가졌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언스는 히틀러가 자신이 경기를 갖기 전에 스타디움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우승을 볼 수 없었으며, 그 전에는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무시되었다. 오언스는 나중에 펴낸 자서전에서도 똑같은 증언을 했다.

히틀러가 오언스와의 악수를 거부했다는 것은 지금은 사실이 아닌 역선전의 일환으로 간주된다. 이와 관련하여, 아서 켐프가 쓴 <타이탄족의 행진: 백인종의 역사 완결판(March of the Titans: The Complete History of the White Race)> 제2권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이 책의 의도는 순수해 보이지 않지만, 여하튼 방대한 자료를 모아 집대성한 특이한 역사서다.)




히틀러는 육상 경기가 벌어진 첫날인 1936년 8월2일 스타디움에 나와 경기를 참관했다. 그는 (포환 던지기에서 금메달을 딴) 독일 선수 한스 뵐케를 (자리로 불러) 개인적으로 치하했다. 뵐케는 1896년 (근대 올림픽 시작) 이래 올림픽 육상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최초의 독일 (남성) 선수였다. 이날 내내 히틀러는 독일인, 비독일인을 가리지 않고 경기의 모든 우승자를 그의 VIP석에서 접견하고 개인적인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다음날인 8월3일 아침에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인 앙리 드 바예-라투르는 히틀러를 찾아가서, 우승자를 줄줄이 불러들여 개인적인 축하를 건네는 일이 올림픽 규정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한 일을 사과하고, 앞으로는 어떤 우승자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축하를 건네는 일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손기정의 마라톤 경주가 벌어진 날은 8월9일이다. 히틀러가 경기장에서 우승자에게 개인적인 축하를 건네지 않기로 한 다음이다. 이상의 사실에서 볼 때, 히틀러가 손기정에게 시상을 한 것이 사실이 아님은 물론이고, 그는 이날 경기장에서 히틀러를 만난 적도 없다.

둘째, 나중에 손기정이 히틀러를 만난 것은 사실이라는 점.

히틀러가 당일 손기정에게 시상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는 경기 다음날 히틀러를 만난 적이 있다.

손기정은 1976년 1월 <동아일보>가 연재하던 '그때 그일들'이라는 시리즈에서, 베를린 올림픽 참가를 비롯한 과거 경험을 23회에 걸쳐 썼다. 그 중 1월23일자에 실린 18회차 글은 '히틀러 인상기'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내가 베를린 올림픽대회 기간 중에 히틀러를 만났을 때는 그의 나이 48세로 33년에 수상에 취임한 후 독재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한 지 3년째 접어들던 해였다. 마라톤 세계 제패를 실현한 다음날인 8월10일 오후 3시경 통역관인 타무라(田村) 씨(그때 베를린 주재 무역상이었다)와 나는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히틀러의 축하 인사를 받기 위해 메인스타디움 응접실로 갔다.

(중략)

왼쪽 소매에 나치 심벌 마크가 선명히 박힌 훌륭한 제복을 입고 있었던 히틀러는 나에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위대한 청년'이라고 말해 주었는데, 그의 손은 체격에 비해 무척 커서 내 손을 휘감아 쥐는 듯했고, 그가 웃을 때는 마치 코 밑의 수염이 웃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손기정과 히틀러가 만나서 악수를 나누며 3~4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눈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마라톤 경기 다음날 가진 비공식적 자리일 뿐이며 메달을 걸어주는 식의 공식 행사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진이 없는 것, 그래서 손기정이 이를 아쉬워한 것은 이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이 손기정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도 나온다. (이 책의 내용은 내가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손기정의 진술은 히틀러가 올림픽 규약을 존중하여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선수들을 축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아서 켐프의 책 내용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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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의 칼럼에 적힌 '히틀러가 손기정에게 금메달을 걸어주었다'라는 잘못된 서술은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글 위키피디아의 손기정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1936년 8월 9일)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사발라(Zabala)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처절한 사투는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결판이 났다. [1] 이로 인하여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이 때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람은 다름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이때 손기정은 히틀러와 악수를 했다.


마지막 두 문장은 출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전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밝힐 수가 없다. 출처를 명시하지 않으면 이처럼 거짓이 유포되어도 그 근원을 따질 수 없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백과사전 같이 많은 사람에게 참고가 되는 자료는 사실 여부나 출처가 확인된 내용만을 실어야 한다.

어쨌든 출처도 없고 확인되지도 않았는데도 이런 이야기는 널리 퍼저나간다. 이 잘못된 내용을 담은 문서는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이것이나 이것.

많은 독자가 보는 신문에 실린 위 칼럼은 또 새로이 여러 사람을 잘못된 사실로 이끄는 결과를 낳았을 듯싶다. 그래서 글을 싣는 매체는 사실 확인, 이른바 팩트 체크*를 게을리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한 줄 정리: 히틀러는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실이 없습니다.

(* 팩트 체크는 흔히 '사실 확인'으로 번역된다. 이런 한국말이 있는데 왜 팩트 체크라는 말을 쓰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두 말이 표현하는 작업의 내용은 좀 다르다. 이것은 기회 있을 때 살펴보기로.)

☞ 관련글: 손기정이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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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Gatsby 2015/02/23 10:44 # 삭제 답글

    팩트 체크를 떠나 참 편파적인 칼럼이네요. 칼럼이 아무리 개인의 의견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데요.
    저자가 말하는 '손기정급'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도핑테스트 면죄부와 연결이 되는거군요.
  • deulpul 2015/02/23 15:19 #

    그렇죠. 원래는 글에 들어있는 억지와 괴상한 논리를 짚어보고 싶었으나 쓸데없는 일인 것 같아서 관뒀습니다. 혹시 이 글을 통해 보시게 되었다면 사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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