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 걸고 싶은 나라부터 만드시오 때時 일事 (Issues)

정부가 국기를 매개로 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을 펼칠 모양이다. 한 기사에 따르면 정부 여러 부처가 떼로 나서서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벌인다고 한다.

기사를 보면, 정부가 국민에게 강요하거나 유도할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고 한다.

  • 상가/사무실용 민간 건물에 게양대 설치 의무화
  • 주택 신증축시 국기꽂이 설치
  • 학생들 국기 게양하고 인증샷/일기/소감문 제출
  • 각 교실에 국기 걸려있는지 점검
  • 국기 게양식/하강식 실시
  • 방송사/기업 동원 홍보

한국 정부가 하려는 일이다. 북한 정부가 아니다.

금방 굶어죽을 사람처럼 입만 열면 경제 경제 염불처럼 외면서도, 실제로 어려운 살림에 시달리는 국민과는 달리 저희는 배가 불러터졌는지, 밥 먹고 할 짓이 없으니 이런 뻘짓을 한다.

정부가 하려는 일은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게 아니라 애국심의 씨를 말리기 위한 작태에 가깝다. 정부가 국민에게 국기를 달라고 강요하고, 그렇게 등이 떠밀려 억지로 국기를 단다고 해서, 없던 애국심이 물씬물씬 솟아나겠는가? 오히려 그 반대겠지. 21세기에 이따위 정책이나 생각하고 있는 전근대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 그나마 남아있던 애국심을 박박 긁어내서 세금 도둑들의 낯짝에 패대기치고 싶어질 것 같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하는 표상일 뿐이다. 국기를 일제히 내건다고 해서 한심하던 나라가 갑자기 자랑스러운 나라로 변신하지 않는다. 국기를 내걸게 한다고 없던 애국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애국심 고취를 위해 국기 게양 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 70년대식 지지리궁상 발상의 졸렬함은 둘째치더라도, 어이없는 착각의 논리다. 순서가 거꾸로다.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하는 데서 국기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 국기라는 상징물에서 애국심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국기를 열렬히 내걸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면 된다. 국민이 이민 떠나고 싶지 않은 나라를 만들면 된다. 정의로운 나라, 높은 자들도 잘못하면 벌 받는 나라, 없고 힘든 사람을 돌보는 나라, 국민 단 한 명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 권세있는 자들이 모범을 보이는 나라, 국민의 피땀 어린 세금을 소중하게 쓰는 나라, 국민을 뭉치고 화합시키는 나라, 인권을 존중하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나라, 국민의 개성과 창의를 존중하고 살려주는 나라... 이런 나라를 만들면 된다. 그럼 누가 하지 말라고 말려도 국민 스스로 국기 내건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직자들이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사랑 받을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윗놈 눈치 보면서 애국심 고취 선전 캠페인이나 궁리하라고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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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는 거대한 성조기 두 개를 늘 볼 수 있다. 가로 9m, 세로 6m짜리 이 대형 국기는 24시간 문을 여는 대중 식당 두 곳 앞에 서 있다. 퍼킨스(Perkins)라고 하는 이 식당 체인은 대형 국기를 내거는 것을 50년 이상 된 전통으로 삼아 왔다. 아래는 이 두 곳의 구글 스트리트 뷰 모습이다. (이 도시에는 퍼킨스가 하나 더 있고 이곳도 물론 대형 국기를 게양하는데, 내게 익숙한 곳은 아래 두 곳이다.)





이 회사 홍보팀의 비비앤 브룩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소박한 팬케익 가게로 영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단골 손님들은 식당 앞에 걸린 국기의 존재가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자부심,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 자유를 누리게 된 것과 이 위대한 나라의 풍요로움을 공유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 같은 것을 심어 준다고 말해 왔습니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나라, 위대하지 않은 나라, 풍요로움을 공유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축구장만한 국기를 내건다 해도 저런 반응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위 첫 번째 사진을 자세히 보면, 큰 국기 말고도 뒤로 국기들이 두어 개 더 보인다. 미국 사람들은 유난히 그들의 국기를 좋아하고, 또 잘 내건다. 미국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하여 '나라사랑 성조기 달기 운동' 같은 추잡한 캠페인을 벌이지 않는데도 그런다. 나는 이것이 단지 국기 디자인이 좋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상시에 주택가에서 나부끼는 국기를 봐도 그렇지만, 특히 재난이나 참사가 닥쳤을 때 국기부터 내거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2005년 카트리나 태풍 때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 때


언젠가도 썼지만, 미국인이 성조기를 열심히 내거는 것은 자기네 나라, 자기네 정부에 대한 굳은 신뢰와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한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 중에서 자기 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86%며, 미국보다 더 나은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2%에 지나지 않았다. 또다른 여론조사에서는 자기네 나라가 극단적으로/매우 자랑스럽다는 사람이 85%나 됐고, 전혀 자랑스럽지 않다는 사람은 1%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가 자랑스러우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또 관제 캠페인을 벌이지 않아도 스스로 국기를 내걸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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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부가 비싼 세금을 들여가며 저런 뻘짓을 함으로써 국기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추락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지지율 30%의 정부가 권위주의 시대에나 어울릴 아이템과 방식으로 관제 캠페인을 벌이며 들이미는 국기, 코흘리개가 아닌 다음에야 돌아보고 싶기나 할 것인가.

정부의 방안 중에는 기업으로 하여금 '고객 사은품'으로 국기를 주게 한다는 것도 있다. 더 막힐 기도 없는데, 새로이 기가 막힌다. 분별없이 닥치는 대로 들이대는 양을 보면, 죽어도 뭔가 하긴 할 모양이다. 그래서 좋은 방안을 하나 가르쳐 준다.

나라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나라 밖에 나가서 국기를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것은 나라와 시대에 관계없이 늘 그렇다. 국기라는 국가 상징물이 단번에 애국심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를 생산하는 흔하지 않은 경우다.

그런데 한국 국민을 모두 외국에 내보낼 수는 없다.

국기를 활용해 애국심을 짜내고자 하는 의지에 충만한 세금 도둑들은, 한국을 외국으로 탈바꿈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연구해 보기 바란다. 5천만 국민은 매일 외국에서 국기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찔끔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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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mooni 2015/02/23 21:04 # 삭제 답글

    '국기 사은품'이 다 나가지 않으면 쓰레기장 직행하는 걸까요. 왠지 그게 국격 추락일 것 같은데...?
  • deulpul 2015/02/24 06:40 #

    그러게요. 그렇게 버리지 않더라도, 국기라는 국가 상징물을 상업주의의 부산물로 활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대한민국 국기법'의 목적인 국기 존엄성의 수호에 크게 어긋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지구인 2015/02/24 08:27 # 삭제 답글

    다른 말 필요없이 격하게 공감하고 갑니다.
    유신을 만들거나 배운 자들이 유신에 대한 향수에 젖어서 다시 유신시대로 돌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 deulpul 2015/02/24 21:27 #

    대통령 본인의 정체성이나 주변에 주리를 틀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지요. http://news.khan.co.kr/kh_cartoon/khan_index.html?artid=201308062020002&code=361102
  • 2015/02/24 23:4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2/25 00:0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2/26 13: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2/26 14: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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