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와 한국 국방부 섞일雜 끓일湯 (Others)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같은 책으로 유명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지난 1월 말에 이런 트윗을 한 적이 있다.


종교 국가들에 에로 비디오를 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닐까? 폭력적이고 여성을 학대하는 포르노가 아니라 부드럽고 여성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에로티시즘 말이다.

여기서 종교 국가란 이슬람 국가들을 말한다. 이 트윗이 나온 시기는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으로 세계가 들끓고 있던 때다. 이런 상황에서 도킨스는 뭔지 모를 목적을 위해 이슬람 국가들에 '야동'을 주입하는게 좋은 방안이라고 제안한다.

도킨스의 이 트윗은 나오자마자 즉시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 자신도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트윗 올린 지 몇분 만에 바로 삭제했다. 위에서 링크한 <인디펜던트>는 "소셜 미디어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비판의) 태풍이 몰아치자 도킨스는 이 도발적인 트윗을 삭제했다"라고 썼다.

생각과 주장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자기 말을 삭제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우선은 경솔한 말이었다는 뜻이 되겠고, 좀더 따지자면 후속 주장으로 뒷받침을 할 만큼 말에 근거나 자신이 있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라도 삭제한 것이리라.

트윗을 삭제하면서 그는 이런 '악의적인 반응'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으며 내가 곰곰히 생각한 것은 도킨스의 트윗이 아니라, 그에 대한 (도킨스의 말로) '악의적인 반응', 혹은 (<인디펜던트>의 말로) '(비판의) 태풍'이다.

도킨스가 저 트윗을 낸 뒤, 이것을 보고 기막힌 생각이라며 무릎을 치는 반응은, 적어도 내가 본 한에서는 없었다. 어이없다거나 미친 소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학자라기보다 코미디언다운 발상이라는 주장들이 있었다. 자기 생각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조금만 있었더라도 도킨스는 저렇게 황급히 트윗을 삭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디펜던트>가 인용한 언론인들의 조롱은 다음과 같다.


도킨스의 또 한 가지 고전적 아이디어.
그가 대외 정책 담당자가 되는 일은 막도록 합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베이컨도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이라크 각지에 죽은 돼지 1만 마리를 투하하는 것은 어떨지?

리처드 도킨스, 우리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불알(배짱)이 있는 유일한 사내. (비꼬는 표현)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지난 1월 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테러로 사람들을 죽이고 서구에서 이런 사태에 항의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반대로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샤를리 엡도>의 연이은 무함마드 풍자에 항의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성, 더 나아가 이슬람 자체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던 때다.

이렇게 격앙된 분위기였는데도, 이슬람 국가에 포르노를 내쏘아 신성을 무력화하자는 도킨스의 말이 얼마나 멍청한 개소리인지를 사람들은 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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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은 도킨스의 트윗을 보고 '그래? 그거 기막힌 생각인데?' 하고 무릎을 칠지도 모른다.

나는 대체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성숙한 사람들이 내 글을 읽기를 원하고, 실제로도 그런 편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당신이 위와 같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이 블로그에 실린 글들이 기대하는 독자가 아닌 셈이다.

물론 글이 이르는 곳에 선을 그을 수는 없고, 세상 모든 인간이 이성적이거나 성숙한 존재이기를 바라기도 어렵다. 가끔 그러한 사실을 격렬하게 깨닫는다.

너댓 해 전에 나는 '걸 그룹 전광판, 정말 놀고들 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이명박 정부의 한국군 당국이 휴전선에 대형 전광판을 세우고 걸 그룹이 요동치는 장면을 틀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 나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놀아도 어쩌면 이렇게 값싸게 노는지, 국가 정책, 그 중에서도 국방 안보 정책이라고 하는 걸 어쩌면 이렇게 중2 마인드로 하는지 그 정신 세계가 심히 궁금하다'였고, 다시 좀 정리하면 '1) 열라 유치한 발상인데다 2) 성을 선전 도구로 쓰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어서 기가 차고 3)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이 포스팅에는 댓글이 230개 넘게 달려 있다. 이 블로그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 대부분이 나이 어린 여성들을 벗겨서 주야로 틀어대는 방안을 탁월한 책략이라고 칭송하며, 이런 방안을 비판하는 나를 종북주의자, '김왕조 지지자'로 몰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포로를 심문하면서 가짜 생리혈을 활용한 것을 거론한 데 대해서는,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을 이해시킬 것을 요구했다. (위 도킨스의 포르노 내쏘기 트윗에 대한 비꼼 반응 중에는 '이제 이슬람 사원 앞에 돼지 피를 쏟아붓기만 하면 되겠네' 하는 것도 있다. 이런 반응이나 돼지고기 대량 투하 같은 조롱도 모두 조금만 생각해 보면 동일한 맥락을 지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나는 이런 댓글들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했으나, 별별 개소리들이 등장하자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 포스팅 및 댓글과 관련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를 따로 후기로 썼다.

그 와중에 어떤 분이 귀뜸해주신 것처럼, 그리고 나중에 대통령 선거 국면에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려 한 사건이 파헤쳐지면서 드러난 것처럼, 이런 댓글을 써제낀 사람들 중 일부는 국방부 사이버사령부나 정보기관 소속 밥버러지들인 것으로 믿고 있다.

어쨌든 이런 초딩 마인드 정책에 대해 비슷한 초딩 마인드를 가진 인간들이 열렬히 지지했음에도, 걸 그룹 전광판 방안은 폐기되었다. 기가 막힌 책략이라고 칭송했던 인간들이 국방부 앞에 몰려가 시위를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 일은 내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식을 표현하는 데에 키배 싸움 하나가 소비되었다. 물론 무익한 싸움이었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안이 좋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상대에게 빨간칠을 하는 종류의 인간 군상은 어떤 이야기로도 납득시킬 수 없다.

이것이 변방 블로그 따위에서나 벌어지다 마는 일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변방 블로그에서 벌어지는 일은 변종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일의 축소판이다.

어떤 사회에서 당연한 상식은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또 어떤 사회에서는 당연한 상식을 이야기하기 위해 치고박는 싸움이 필요하다. 인간의 에너지가 개싸움에 소모되고 소진된다는 것, 이것이 몰상식한 사회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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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긁적 2015/02/24 21:30 # 답글

    그리고 이 포스트의 덧글란은 조용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 deulpul 2015/02/25 01:12 #

    Multa paucis!
  • kalms 2015/02/25 10:14 # 삭제 답글

    악마는 무능하지 않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전지? 전능? 둘 다 omni하고 opti한 그냥 개념일 뿐이죠.
    신이 개념이다 라면 맞고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한 절대로 omni하고 opti할 수 없습니다.

    반면, 신의 일종이면서 인간세계에 내려온 사탄은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집값이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에
    사설학원 수요가 줄어들면 안되기 때문에
    빈민계층이 줄어들면 안되기 때문에
    김영란법은 절대로 통과되면 안되기 때문에
    나쁜 일 시킨 댓가를 줘야 하기 때문에
    이 순간에도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요즘 페이스북 상에 정청래와 함께 이혜훈이 빨리고 있더군요.
    정신 나간 문재인을 까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혜훈은 다르다구요?
    오세훈은 언제부터 싫어하셨는지 묻고 싶네요.

    --

    제가 보기에 sns 공간도 이미 알바들이 점령했습니다.
    최근 재판 결과와 상관 없이, 국방부든 국정원이든 댓글 알바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고
    실제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실명제이기 때문에 저들은 꼬리가 잡히더라도 자를 능력이 있지만
    우리는 머리를 직접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실명제는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손자의 후손이 나오면 모를까...
    이 싸움은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 deulpul 2015/02/26 02:49 #

    뭐라고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 다시다 2015/03/05 17:25 # 삭제 답글

    황당한 일을 황당하다고 지적하는데 너무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네요.
  • deulpul 2015/03/06 07:18 #

    제 말이요. 역시 이것은 황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사물의 여러 면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성숙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ㅎㅈㅁ 2015/04/22 00:59 # 삭제 답글

    포스팅이 모두 흥미로워요ㅋㅋ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 deulpul 2015/04/22 10:11 #

    운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보내시는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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