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욕조> 섞일雜 끓일湯 (Others)

현대 한국인이 수백 년 전 그들의 조상이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 갔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덕분이다. 왕조 정부가 벌이고 행한 일을 시시콜콜 적어 남긴 책 1,894권은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을 글자로 박제하여 둔 기록이다. 후손이 그 책을 펼치는 순간, 과거는 박제에서 꿈틀거리는 생물로 되살아난다.

이순신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영웅담은 군담 소설 주인공의 활약보다 더 극적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민담 속 영웅같이 화려하면서도 모호한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이 흐르고 번민하고 고뇌하는 인간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가 일기를 썼고 그 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으로 존재한다. 그 기록이 보존되어야 역사는 구체적으로 기억된다. 우람한 건축물은 쉽게 눈에 띄고 쉽게 남는다. 불타 없어지면 현대 한국인이 하듯 날림 공사라도 해서 번지르르하게 다시 꾸며놓을 수 있다. 하지만 1차 자료는 사라지면 끝이다. 불타 없어진 건축 유산을 복원할 수 있는 것도 기록물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물이 없으면 역사는 종결되거나 실종된다.

세계에서 나라 일을 가장 열심히 기록하고 보관하는 곳은 미국일 것이다. 엄청난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렇게 한다. 그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흥환이 쓴 책 <대통령의 욕조>는 그런 미국의 노력과 그 성과물을 한눈에 보여주는 책이다. 거대한 국립문서보관소, 전국의 대통령 도서관 13개, 연방기록물센터 등 세 개체가 솥발처럼 버티고 서서 역사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 체제를, 바로 그 속에서 읽고 보여준다.




책은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의 구성과 역사를 생생한 자료와 사례로 설명하고, 거기 보관된 문서 중 흥미로운 것을 추려 보여주는 형태로 되어 있다. 구체적인 구성은 인터넷 서점의 해당 항목에 나와 있는 차례를 참고하면 된다.

아카이브 작업이라면 흔히 기록과 보관만 생각하기 쉽다. 저자가 본문에서 공들여 강조하고 있는 또 한 측면이 있다. 바로 공개다.

미국의 국가 기록 시스템은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기록과 보관, 공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빠져나가는 순간 국가 기록이라는 시스템은 무너지고 만다.

역사를 일껏 기록했으나 처박아 두기만 한다면 그 의미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이런 자료가 시민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태극기 달기 운동처럼 후진적인 관제 캠페인을 벌인다는 말이 아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 국가 문서를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개방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국가 기록은 시민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밀 문서로 묶인 것은 예외다.) 돈도 안 들고 분량 제한도 없다. 미국 시민뿐 아니라 외국인도 똑같이 대접한다. 내셔널 아카이브의 이런 방침과 노력은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돈이 많은 나라니 가능한 일이잖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기록물 보존 작업을 시작한 것은 돈이 펑펑 남아돌 때가 아니라,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30년대 대공황 시절이었다. 책에 따르면 워싱턴에 있는 내셔널 아카이브 건물은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35년에 완공했다.


'미국 역사의 신전', 워싱턴의 내셔널 아카이브 건물(사진)


건물이 다 되기 직전인 1934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립문서보관서법을 제정하고 서명했다.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는 건물을 지은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 법안을 만든 루스벨트 대통령 두 사람의 의지가 합쳐져서 탄생한 작품인 셈이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의지를 가진 국가 지도자의 존재가 돈보다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 --- ** ---


저자는 10년 넘게 한 우물만 팠다. 10여 년 세월에 강산이 변하고 미국 아카이브도 변하였으나, 그는 계속 팠다. 그렇게 파낸 자료들을 기초로 해서 그동안 책을 몇 권 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의 목소리는 계속 눌러왔다.

이 책 <대통령의 욕조>에서 저자는 비로소 말을 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한다. 10여 년 동안 한 우물을 파며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을 다 털어놓는다. 10여 년 세월을 투자하지 않고도, 미국 워싱턴과 메릴랜드의 내셔널 아카이브 속에 들어가 살지 않고도 저자의 경험과 깨달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책이라는 매체가 주는 특혜가 아닐 수 없다.

원래 나는 이 책에 나온 인상적인 부분들을 골라 여기에 쓰고 싶었다. 내가 많은 말을 하기보다, 직접 내용을 보이면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부분이 나올 때마다 책갈피를 끼웠다. 책갈피가 모자라서, 레터지 이면지 한 장을 길게 오려서 북마크로 썼다. 전체 384쪽인 책의 중간쯤을 넘어갈 때, 이런 일을 그만 두었다.

이것은 물론 나의 개인적인 취향과 이 책이 잘 맞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과 역사, 그것도 거시사(巨視史)가 아니라 미시사(微視史)에 관심이 있고 거기에 약간의 문자 중독까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아비는 자식이 아비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할 때 가장 살 맛이 난다. 선생은 학생이 선생 가르치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할 때 가장 살 맛이 난다. 책을 쓰는 사람은 독자가 책으로부터 배우고 더 나아가 책에 나온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할 때 가장 살 맛이 날 것이다. 이 책에서 그런 가능성을 보는 이유는, 이런 주제를 다룬 대중적인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하고 보관하고 공개하는 일은 남에게는 있어도 우리에게는 없었고, 그래서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권력자든 평범한 사람이든, 국가와 개인의 행적을 역사로 남기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데에 이 책이 안내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에는 아카이브 건물에 주춧돌을 놓은 후버 대통령의 명언에서부터, 문서고에서 서류를 양말 속에 숨겨 나오다 적발된 전 국가안보보좌관, 미국 비밀 문서들의 등급과 공개 범위, 1948년 CIA의 이승만 평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소장에게 <타임> <뉴스위크> <리더스 다이제스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넣어달라고 요구한 인민군 포로들의 서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 뒤에 색인을 만들어 붙였으면 독자가 좀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저자는 내가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다.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점을 고려하시기 바란다.


※ 저는 위 책에 대한 내용을 쓰면서, 저자로부터 증정받은 해당 책 1권을 참고하였습니다.



Advertisement


 

덧글

  • 2015/03/02 21:1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5/03/03 14:30 #

    저도 그렇습니다. '인민군 우편함'이 전하고 있는 전쟁통 속 사람들의 목소리도 흥미로왔고, 그런 목소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인 '욕조'의 구조적이고 정책적인 관심도 제게는 재미와 의미가 있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